우주로 나가고, 깊은 바다를 탐험하고, 전 세계 어느 지역이라도 인간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유전자 연구를 통하여 장기를 배양하는 반면, 핵기술은 무한한 에너지 자원을 창출하고 있다.
인간은 어느덧 광활한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가는 시간을 멈출 수 없고 동시에 2곳에 존재할 수 없다. 아무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아니, 그렇지 못하도록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
공간(하늘과 땅)이 생기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하면서도 시간이란 개념은 함께 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태어난 즉시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육체와 정신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다.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보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신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Ubiquitous라는 시대적 흐름에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어떤 이에게는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은 초월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정확한 의미에서 '현재'란 없다.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가 언급하였듯,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이미 지나가고 있는 과거가 되고 있다.
강의 한 가운데 돌을 던졌다면, 그 돌과 부딪힌 물살들은 이미 저 하류로 흘러가 버린다. 또 다시 돌을 던졌을 때 동일한 물살에 맞출 수는 없다. 흘러간 그 물살을 정확하게 짚을 수 없듯이,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제한적이다.
but,
시간의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현재'라는 벽에 갖혀살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필력해보고자 하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세계관'이다. 어떻게 하면 그 한계를 초월해볼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내가 돌을 던진 강의 전체를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강의 모양, 물길의 흐름, 상류부터 하류까지의 세세한 하나하나를 아는 것이다. 언제 다른 셋강과 만나고, 어느 시점에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지를 살펴 보자.
산기슭에서 작은 물방울이 모여 발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계곡에 발담근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상상될 것 같다. 점차 하류로 내려가보자. 물살은 점차 약해지고 강폭이 넓어진다. 삼림이 우거진 곳과는 달리 갈대풀도 있고 둥글둥글한 자갈이 많아진다. 해안과 만나는 곳의 강을 본 적이 있는가? 그곳은 마치 바다와도 같다. 해수가 밀려와서 짜기도 하고 모래사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차가운 바닷물과는 달리 약간 미지근한 듯도 하다. 어쩌면 물살이 멈춰있는 것처럼 물살이 잔잔하기까지 하다.
강의 흐름을 '역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군가 그 역사의 길을 따라 걷는 존재들은 '물분자 H₂O'라고 할 수 있겠다. 물분자가 되어 보자. 자신이 알 수 있는 건, 단지 다른 물분자들과 한참을 흘러간다는 것 뿐이다. 더러는 펌프질에 퍼올려져 논으로, 밭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더러는 물고기 입으로, 더러는 식용수로 흘러가며, 더러는 증발해서 하늘의 광활함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선가 비가 되어 지면과 충돌하겠지. 그 곳이 산이라면 이 물분자는 다시 강을 통해 흘러 내리는 여정을 가질 것이다. 2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 원자로 분해되기 전까지...
이처럼 흐르는 강 전체를 이해하고 물분자의 life cycle을 이해한다면,
난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갖혀 있고, 흘러가버리는 강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라도, 산기슭으로부터 바다까지, 아니 어쩌면, 물분자가 갈 수 있는 세상 모든 곳을 상상할 수 있다. 아니, 내가 물분자를 더 잘 이해할 수록 어쩌면 그것은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느낌이 바로 세계관이다.
동물의 왕국에 자주 나오는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 세렌디피티 초원을 기억하는가?
그 곳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어느덧 그 곳에 가 있을 수 있다.
세계관은 지역, 지리, 날씨와 기후, 인종, 토질, 역사, 문화, 사회와 정치, 사상, 경제, 인물..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세렌디피티 초원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가서 직접 체험하고 그 곳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영국의 멋진 지역들을 여행했더라도 6~7세기 중세 바이킹 시대부터 대항해시대 전성기, 시민혁명과 종교개혁의 근대, 그리고 산업혁명이 시작한 이후 지금의 최고의 선진국이 되기까지 성장해온 역사적 줄기를 알지 못하면 영국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자주 여행하고 책을 많이 읽자.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으로 부터 세상 곳곳의 (위에 언급된) 지역, 지리, 날씨와 기후.. 문화.. 등등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종합적인 통찰력을 발휘함으로써 점차 세계관을 넓혀갈 수 있다.
#뉴욕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감격을 느낄 수 있고
#중동의 어느 왕실에서 갓 태어난 왕세자의 우렁찬 울음도 느낄 수 있고
#반대로, 태어난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이라고 (너무 쉽게) 말해버릴 수 있는... 가난과 기근에 힘들어하는 난민촌 가운데 죽어가는 생후 3일 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 눈물 흘릴 기력도 없는 16살 엄마를 품에 안아줄 수도 있다.
#적도 지역에서 언제나 바나나를 줏어먹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일할 필요도 없는, 세상에 불행이라곤 없는 새까만 원주민들이 (나는 어쩌면 죽기 전에 한번 볼까 말까 할) 그 너무나도 아름다운 석양과 매일같이 함께 춤추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네팔 산등성이의 꼬질꼬질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을 가진 소녀를 만날 수도 있다.
시간적 한계를 넘어 보자.
#이미 불타버린 남대문을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이 상상될 수도 있다. 크고 무거운 돌을 옮기고 높이 쌓아가는 노역자들의 땀방울은 어쩌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의 이집트 노예들의 그것과도 흡사하다.
#어쩌면 석기 시대, 우연히 곡식 기르는 법과 불 지피는 법, 돌을 날카롭게 만드는 법을 발견했을 그 때의 그 사람들의 감격을 느껴볼 수도 있다.
그 곳의 사람들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한 지리적, 사상적, 문화적 차이를 이해한다면,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익히고 전 세계를 훑고 지나가는 커다란 흐름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세계관은 미친 듯이 확산된다.
세계관은 마치 죽을 때까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없는 것처럼 크고도 넓다. 과학과 기술과 문학을 이해할 수록 세상을 보는 관점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고 느끼는 것은 세계관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나아가 전 우주적으로 커질 것이다. 수억 개의 은하들 사이에 우리가 속한 태양계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거기서 또 지구라는 작은 별의 또 아시아의 끝에 붙은 한국이란 나라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위치가 상상될 수 있다.
혹시 당신은 지구라는 별이 너무나도 크고, 아니 오늘 조금 걸을 수 있는 300 m라는 곳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만큼 좁은 boundary에서, 그 좁은 세계관 속에 사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우주 저편에서 지구를 느껴 보았던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당신의 손바닥 위에 있을 지도 모른다.
갓난 아이의 세계관은 엄마 품과 요람이다. 자랄 수록 방과 거실을 돌아다니고, (매일 데리러 오는) 유치원 차를 타고 친구들을 만난다. 이윽고 걸어서 제법 먼 곳에 위치한 학교를 다니게 되고, 동네를 이해하게 되고, 내가 사는 지역을 이해하게 되고, 다른 도시를 방문하게 되고, 지하철 노선도를 외우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전국 지도를 한 눈에 그리게 되고, 해외 여행을 하고, 전 세계에 landmark를 하나씩 찍게 된다. 공간적으로, 내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지 못하지만 그 곳의 조금 다른 문화(가령 경상도와 전라도의 문화 차이)를 알고 그 사람들의 습성을 알게 될 수록 내 공간적(구체적으로는 지리적, 문화적) 세계관이 커져 있는 것이다. 역사를 알면 시간적 세계관을 넓힐 수 있다.
왜 큰 세계관을 가져야 할까?
라는 비판적을 시각으로 반문을 던진다면 당장 다른 곳으로 파도타고 가라.
이 글은 당신의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더 넓은 세상으로의 진출을 소망한다면, 세상을 품길 원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내 짧은 소견이 당신의 세계관 형성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의 boundary 속에 갖혀 지내도 관계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의 구성원으로써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럽지 않겠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은 이와 같은 몇 사람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길 원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라.
내가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시대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내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지구 반대편서 잠자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한번에 그려보라. 아니,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평생에 훈련을 통해 끊임 없이 성장해 간다.
성장의 끝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앞으로 되어 있을 당신의 모습이 그 훈량의 분량을 말해 줄 것이다. 항상 염두하고 노력하여 날마다 성취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 훈련의 때이고, 세계관 형성의 습관을 가질 때이다.
내일이면 이미 오늘은 흘러가버린 과거이다. 미래에 몸을 담고 살아간다면 과거에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살다
TV 등을 통하여 종종 극한과 인간으로써의 한계의 끝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우주로 나가고, 깊은 바다를 탐험하고, 전 세계 어느 지역이라도 인간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유전자 연구를 통하여 장기를 배양하는 반면, 핵기술은 무한한 에너지 자원을 창출하고 있다.
인간은 어느덧 광활한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가는 시간을 멈출 수 없고 동시에 2곳에 존재할 수 없다. 아무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아니, 그렇지 못하도록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
공간(하늘과 땅)이 생기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하면서도 시간이란 개념은 함께 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태어난 즉시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육체와 정신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다.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보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신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Ubiquitous라는 시대적 흐름에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어떤 이에게는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은 초월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정확한 의미에서 '현재'란 없다.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가 언급하였듯,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이미 지나가고 있는 과거가 되고 있다.
강의 한 가운데 돌을 던졌다면, 그 돌과 부딪힌 물살들은 이미 저 하류로 흘러가 버린다. 또 다시 돌을 던졌을 때 동일한 물살에 맞출 수는 없다. 흘러간 그 물살을 정확하게 짚을 수 없듯이,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제한적이다.
but,
시간의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현재'라는 벽에 갖혀살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필력해보고자 하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세계관'이다. 어떻게 하면 그 한계를 초월해볼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내가 돌을 던진 강의 전체를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강의 모양, 물길의 흐름, 상류부터 하류까지의 세세한 하나하나를 아는 것이다. 언제 다른 셋강과 만나고, 어느 시점에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지를 살펴 보자.
산기슭에서 작은 물방울이 모여 발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계곡에 발담근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상상될 것 같다. 점차 하류로 내려가보자. 물살은 점차 약해지고 강폭이 넓어진다. 삼림이 우거진 곳과는 달리 갈대풀도 있고 둥글둥글한 자갈이 많아진다. 해안과 만나는 곳의 강을 본 적이 있는가? 그곳은 마치 바다와도 같다. 해수가 밀려와서 짜기도 하고 모래사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차가운 바닷물과는 달리 약간 미지근한 듯도 하다. 어쩌면 물살이 멈춰있는 것처럼 물살이 잔잔하기까지 하다.
강의 흐름을 '역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군가 그 역사의 길을 따라 걷는 존재들은 '물분자 H₂O'라고 할 수 있겠다. 물분자가 되어 보자. 자신이 알 수 있는 건, 단지 다른 물분자들과 한참을 흘러간다는 것 뿐이다. 더러는 펌프질에 퍼올려져 논으로, 밭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더러는 물고기 입으로, 더러는 식용수로 흘러가며, 더러는 증발해서 하늘의 광활함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선가 비가 되어 지면과 충돌하겠지. 그 곳이 산이라면 이 물분자는 다시 강을 통해 흘러 내리는 여정을 가질 것이다. 2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 원자로 분해되기 전까지...
이처럼 흐르는 강 전체를 이해하고 물분자의 life cycle을 이해한다면,
난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갖혀 있고, 흘러가버리는 강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라도, 산기슭으로부터 바다까지, 아니 어쩌면, 물분자가 갈 수 있는 세상 모든 곳을 상상할 수 있다. 아니, 내가 물분자를 더 잘 이해할 수록 어쩌면 그것은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 느낌이 바로 세계관이다.
동물의 왕국에 자주 나오는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 세렌디피티 초원을 기억하는가?
그 곳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어느덧 그 곳에 가 있을 수 있다.
세계관은 지역, 지리, 날씨와 기후, 인종, 토질, 역사, 문화, 사회와 정치, 사상, 경제, 인물..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세렌디피티 초원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가서 직접 체험하고 그 곳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영국의 멋진 지역들을 여행했더라도 6~7세기 중세 바이킹 시대부터 대항해시대 전성기, 시민혁명과 종교개혁의 근대, 그리고 산업혁명이 시작한 이후 지금의 최고의 선진국이 되기까지 성장해온 역사적 줄기를 알지 못하면 영국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자주 여행하고 책을 많이 읽자.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으로 부터 세상 곳곳의 (위에 언급된) 지역, 지리, 날씨와 기후.. 문화.. 등등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종합적인 통찰력을 발휘함으로써 점차 세계관을 넓혀갈 수 있다.
#뉴욕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감격을 느낄 수 있고
#중동의 어느 왕실에서 갓 태어난 왕세자의 우렁찬 울음도 느낄 수 있고
#반대로, 태어난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이라고 (너무 쉽게) 말해버릴 수 있는... 가난과 기근에 힘들어하는 난민촌 가운데 죽어가는 생후 3일 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 눈물 흘릴 기력도 없는 16살 엄마를 품에 안아줄 수도 있다.
#적도 지역에서 언제나 바나나를 줏어먹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일할 필요도 없는, 세상에 불행이라곤 없는 새까만 원주민들이 (나는 어쩌면 죽기 전에 한번 볼까 말까 할) 그 너무나도 아름다운 석양과 매일같이 함께 춤추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네팔 산등성이의 꼬질꼬질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을 가진 소녀를 만날 수도 있다.
시간적 한계를 넘어 보자.
#이미 불타버린 남대문을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이 상상될 수도 있다. 크고 무거운 돌을 옮기고 높이 쌓아가는 노역자들의 땀방울은 어쩌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의 이집트 노예들의 그것과도 흡사하다.
#어쩌면 석기 시대, 우연히 곡식 기르는 법과 불 지피는 법, 돌을 날카롭게 만드는 법을 발견했을 그 때의 그 사람들의 감격을 느껴볼 수도 있다.
그 곳의 사람들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그렇게 존재하게 한 지리적, 사상적, 문화적 차이를 이해한다면,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익히고 전 세계를 훑고 지나가는 커다란 흐름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세계관은 미친 듯이 확산된다.
세계관은 마치 죽을 때까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없는 것처럼 크고도 넓다. 과학과 기술과 문학을 이해할 수록 세상을 보는 관점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고 느끼는 것은 세계관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나아가 전 우주적으로 커질 것이다. 수억 개의 은하들 사이에 우리가 속한 태양계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거기서 또 지구라는 작은 별의 또 아시아의 끝에 붙은 한국이란 나라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위치가 상상될 수 있다.
혹시 당신은 지구라는 별이 너무나도 크고, 아니 오늘 조금 걸을 수 있는 300 m라는 곳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만큼 좁은 boundary에서, 그 좁은 세계관 속에 사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우주 저편에서 지구를 느껴 보았던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당신의 손바닥 위에 있을 지도 모른다.
갓난 아이의 세계관은 엄마 품과 요람이다. 자랄 수록 방과 거실을 돌아다니고, (매일 데리러 오는) 유치원 차를 타고 친구들을 만난다. 이윽고 걸어서 제법 먼 곳에 위치한 학교를 다니게 되고, 동네를 이해하게 되고, 내가 사는 지역을 이해하게 되고, 다른 도시를 방문하게 되고, 지하철 노선도를 외우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전국 지도를 한 눈에 그리게 되고, 해외 여행을 하고, 전 세계에 landmark를 하나씩 찍게 된다. 공간적으로, 내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지 못하지만 그 곳의 조금 다른 문화(가령 경상도와 전라도의 문화 차이)를 알고 그 사람들의 습성을 알게 될 수록 내 공간적(구체적으로는 지리적, 문화적) 세계관이 커져 있는 것이다. 역사를 알면 시간적 세계관을 넓힐 수 있다.
왜 큰 세계관을 가져야 할까?
라는 비판적을 시각으로 반문을 던진다면 당장 다른 곳으로 파도타고 가라.
이 글은 당신의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더 넓은 세상으로의 진출을 소망한다면, 세상을 품길 원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내 짧은 소견이 당신의 세계관 형성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의 boundary 속에 갖혀 지내도 관계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의 구성원으로써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럽지 않겠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은 이와 같은 몇 사람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길 원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라.
내가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시대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내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지구 반대편서 잠자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한번에 그려보라. 아니,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평생에 훈련을 통해 끊임 없이 성장해 간다.
성장의 끝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앞으로 되어 있을 당신의 모습이 그 훈량의 분량을 말해 줄 것이다. 항상 염두하고 노력하여 날마다 성취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 훈련의 때이고, 세계관 형성의 습관을 가질 때이다.
내일이면 이미 오늘은 흘러가버린 과거이다. 미래에 몸을 담고 살아간다면 과거에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출처 http://www.cyworld.com/mcury_old 작성자 이원섭 작성일 200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