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문학관

민상기2009.10.11
조회2,269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은 「봄·봄」「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고향 마을입니다.

김유정의 소설 대부분이 이곳에서 구상되고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지명 등도

대부분 이곳의 실제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마을 전체가 작품의 산실이며 그 현장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김유정의 문학과 생애를 생생히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유정의 예술적 열정,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세월이 흐를수록 돋보이는 작품세계를 새로이 만날 수 있습니다.

대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새 천년의 감성으로 30년대 김유정의 문학세계로 여행을 떠납니다.
점순이의 눈으로, 덕돌이와 산골나그네의 마음으로 떠난 <김유정문학촌> 여행에서

당신은 비로소 혜성처럼 나타나 영롱한 무지개로 아로새겨진,

겸허하고 정직한 작가 김유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유정문학촌장 전상국-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하차 후 3분 정도만 걸어가면

김유정 문학촌이 나온다.

이 김유정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람 이름을 사용한 역이라고 한다.

 

 

 

남춘천역에서 내릴 경우에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남춘천역에서 택시비로는 5천원 가량이 나온다.

 

 

 

김유정역은 간이역이다. 춘천사람들에겐 낯익지만

이 작은 시골역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MBC 드라마 ‘간이역’을 통해서이다.
1997년, 철도원의 애환과 가족의 사랑을 그린 홈 드라마로 인기를 끌은 이후 전국에 알려졌다.
그 이후 김유정역은 영화 ‘편지’의 촬영 무대인 경강역과 함께

경춘선에서 가장 서정적인 간이역으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 안에는 바람개비가 승객들을 맞이하고

철로 주변의 꽃들은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역사 앞에 있는 김유정문학촌 안내도

 

 

 

역사 안에 전시되어 있는 김유정 관련 도서들

 

 

 

역사 앞에는 김유정 역으로 바뀐 사연이 안내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상국 작가와 문학기행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문학촌 입구 정문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필승前. 3.18)에게 편지 쓰기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촌 홈페이지 발췌-

 

 

 

기념관안의 의자. 앉아서 사진 촬영을 하라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기념관 안에는 그의 대표작은 봄 봄의 기념탑과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김유정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김유정을 위하여 실시한 사업들이

년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의 일대기와 대표작 그리고 작품속의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김유정 관련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 "봄 봄"의 작품 배경을 인형과 더불어 설명을 해 놓았다.

 

 

 

작품 배경지도와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유정의 생애와 그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무렵 그의 어머니를 닮은 첫사랑 '박록주'라는 여인을 만났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그는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 후 그는 2년 동안 광적으로 박록주에게 구애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요 기생이었던 박록주는 네 살 연하인 김유정의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박녹주는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그 후 시인 박용철의 동생인 "박봉자"와 잡지 '여인'이라는 곳에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에게 30여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그의 지인인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또다시 좌절하게 만든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

 

 

 

휘문고보 학적부

 

 

 

성적표와 신체검사표

 

 

 

청풍김씨 세보

 

 

 

기념관에서 바라본 그의 동상과 생가

 

 

 

기념관 옆에 위치한 김유정 동상

1994년 문화체육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김유정선생을 선정한 것을 기념해

김유정기념사업회가 1994년 10월에 건립했다.
춘천문화예술회관에 세워져있던 것을 김유정문학촌 개관에 맞춰 문학촌내로 이전했다.
제작: 이운식(강원대교수)
글씨:황재국(강원대교수)

 

 

 

생가앞 마당과 의자들

 

 

 

뒤란의 장독대

 

 

 

뒤란 언덕에는 꽃들이 피어 있다.

 

 

 

뒤란과 아궁이 모습

 

 

 

생가안의 모습들

 

 

 

생가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옆으로, 작은 문이 하나있고 아궁이도 있다

 

 

 

우물가의 모습

 

 

 

생가안의 모습이다.

생가는 조카 김영수와 금병의숙 제자들에 의해 고증 복원되었다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청의 모습

 

 

 

연못과 정자의 모습

 

 

 

외양간의 모습

 

 

 

생가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방 봉당 부엌 곳간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ㅁ자형이다.

 

 

 

외양간 옆 모습

 

 

 

외양간에 걸려 있는 망태

 

 

 

정자에서 바라 본 생가

 

 

 

연못에서 바라 본 생가와 기념관

 

 

 

입구에서 바라 본 정자와 연못 그리고 외양간

 

 

 

기념관 전경

 

 

 

2008 김유정 탄생 100주년 봄 봄 스토리 페스티벌 실레마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별다른 설명서가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길가에서 벼를 말리는 농부들

 

 

 

페스티벌 실레마을 안의 모습으로 공연장 인듯...

 

 

 

이곳에서는 김유정에 대한 교육을 하는 공간인듯.

 

 

 

탄생 100주년 기념관인듯 한데 자료들과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탄생 100주년 기념장 안의 모습

 

 

 

페스티벌관 외부 모습

 

 

 

유정마을에서 막국수 한 그릇씩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한번쯤 먹어볼 만 하다

 

 

 

춘천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유정은 무덤도 유품도 없다고 한다.

그의 유품은 김유정과 절친했던 친구 안회남이

김유정이 사후에 유가족에게서 유품을 받아 보관하던 중 1947년을 전후해 월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