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이유 또는 목적

유원재20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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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왜 하느냐, 라는 질문은 사람은 왜 사느냐, 사람은 무엇이냐,

나는 누구냐, 라는 질문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질문은 이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해 오던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철학의 시작이고

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정신없이 하던 일에 대해서 문득 제삼자의 눈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느냐, 라는 질문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은 의미 없는 일은 하기가 힘드는 특이한 존재이다.

아무리 남들이 좋다고 해도 내가 거기에서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래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열심히 할 수가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한때 하지만,

이내 배부른 소리라 생각하고,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뭘, 하고는

일상사로 돌아간다. 우선 먹고 사는 일이 급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야

뾰족한 답도 나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보자.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파푸아 뉴기니 등의

원시림에서 우리가 산다고 해보자.

거기도 이제 현대 문명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아직 석기 시대의 삶을 영위하는 부족이 많이 있다.

이런 곳에서 공부하라는 말을 할까, 또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민족이 사는 북한에 가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지만,

성분에 의해 대학가는 것이 결정되는 만큼 공부하고 싶어

안달이 나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공부 내용도 김일성 가문의 역사가 중심이다.

노력 동원이라 해서 일 년에 몇 달씩 들에 가서 일해야 하고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사상 학습을 끝없이 해야 하고

날마다 자아 비판, 상호 비판을 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인구의 3% 이내였다.

그들 양반은 방안에 앉아서 유교 경전이나 뒤지면서

큰 소리 치며 살 수 있었다.

문과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은 일 년에 전국 통틀어 30명 안팎이었다.

지방의 향시에만 합격해도 평생을 큰소리치며 살았다.

토지와 노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공부하는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다.

상것들은 글을 읽지 못해기 때문에 성현의 말씀을 몰랐고

그래서 무시 당했다. 백성들을 돕는 공부가 아니라 백성에게

군림하기 위한 공부였다.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내용도 다르고 할 수 있는 사람도 다르다.

넓은 의미에서 공부는 어느 사회나 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좁은 의미에서 어떤 시대에 어떤 사회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공부라 할 때,

그것이 특권인 사회보다 일반적 권리인 사회가 인류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나라이다.

 

일본, 유럽 심지어 미국도 공부하라는 말을 자식에게 별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아직도 공부는 가진 사람,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계층의 특권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사람들은 자식 공부를 한국 이상으로 강조하고 거의

강제로라도 시킨다. 기숙 학교에 엄청난 돈을 주고 자식을 맡기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집에 오게 하는 제도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자식들이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렇게 해야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자식 대에서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상류층 사람들은

자식에게 최대한 좋은 공부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은 교육 기회가 특이하게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한국에서는 누구나 자식 교육에

엄청난 신경을 곤두세운다.

공부하라는 말을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많이 하는 소리이다.

자식들은 또 이걸 제일 듣기 싫어한다.

특히 80년대 이후 먹고 사는 게 어렵지 않게 되면서

자식들은 공부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공부가 중요하고 그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의 지름길임을 알고서

가정, 사회, 국가 모두가 하나같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공부하라고 하지만, 어떤 공부를 어떻게 시켜야 될지 이걸 잘 모른다.

일제 시대에 배운 것과 미국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흉내내는 정도이다.

그래서 공부가 아주 재미없게 되어 있다. 또한 쓸데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현실은 이 싫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되기 쉽다.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것은 꼭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면서 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더라도 숨어서 몰래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공부는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의 지적 능력을 키우는 일일 뿐이다.

그러면 안 하면 그만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착하게 살면 될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이다.

원시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농경 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제 공부는 점점

생존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공부해야 되는 어떻게 보면 참 불행한 시대가 되었다.

위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부가 부족하면 전국민에게

엄청한 고통을 안겨 준다.

아래로 한 가정의 부모가 무식하면 제일 먼저

자식으로부터 부모 대접을 못 받는다.

"엄마, 아빠는 모르면 가만있으세요."

 

아버지의 초등학교 다닐 시적 동기들만 해도 반 정도가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들은 자식에게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모른다.

가슴깊이 한이 맺혀 있다.

설령 잘 살더라도 이 쓰라린 고통을 없앨 길 없다.

사회 생활하면서 무시당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시당하지 않더라도 몰라서 손해보는 일이 너무도 많다.

친구와 대화를 해도 대화가 안 통하는 수가 너무도 많다.

중졸, 고졸도 마찬가지이다.

바보 아닌 바보가 된 것이다.

바보는 착하고 안 착하고는 전혀 관계없지만,

사람들과 아는 것이 너무 차이나고 관심 분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정상인과 생활할 수가 없다.

아무도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

같이 놀아주지 않을 때 그것만큼 인간이 비참한 감정을 맛볼 수 없다.

 

그러면 공부만 잘하면 되느냐?

천만에 말씀이다.

공부해서 쌓은 지식으로 남을 속이고 괴롭혀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이런 자는 공부를 안 할수록 좋다.

이런 자들 때문에 지식이 폭발함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는 한치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만약 이런 자들이 착한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인류는 파멸한다.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지식과 지혜를 쌓아야 한다.

그런데 착함과 지혜로움을 키우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어릴 때부터 둘을 동시에 계속 키워야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는 착한 사람이 되라는 공부를 주로 했고

현대는 착한 사람에 대한 공부는 거의 않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공부를 주로 한다.

이 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문제가 아니다.

지식의 폭발이 인류에게 복이 되도록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한에서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인터넷이 아무리 좋아도 바이러스에 걸리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이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백신을 개발하는 사람들,

그들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공부는 따분한 것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 학문한 지

얼마 안되어 무척 재미없는 것을 많이 가르치지만,

그러나 이것도 자꾸 하다 보면 참 재미있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이 있는데, 공부만큼 이 호기심을 끝없이

만족시켜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는 왜 하느냐?

첫째, 자기 계발을 위해서이다.

자기 계발은 크게 넷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착한 인간이 되는 것 ( 이것이 제일 어렵고 끝이 없다),

둘째는 지혜를 쌓는 것( 이것도 몹시 어렵고 끝이 없다),

셋째는 아름다움을 아는 인간이 되는 것 (이를 느끼면 즐겁기 한이 없는데,

이것도 그냥 되는 일이 아니고 끝이 없다)

넷째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인간은 누구나 육체가 있는데,

이 육체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게 건강이거니와

이를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는 왜 하느냐?

둘째, 남을 돕기 위해서이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인간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어떤 존재보다 무력하다.

태어났을 때 가장 무력한 게 인간이다.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전적으로 그 생명을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다.

끝없는 사랑으로 누군가, 대개 어머니가 돌보아 주어야 한다.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서 자립하는 기간이 아주 짧다.

길어야 1년, 2년이다.

인간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빨라도 15년은 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20년 이상 걸린다.

동물로 보아서는 5년이면 엄청난 기간이지만,

인간을 만약 5년 만에 다 키웠다고 사회에 내보낸다고 해 보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치보기와 동냥과 도둑질 밖에 없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젠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것마저 날지도 못하는 제비를 처마 끝에서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하고 한창 젖을 먹는 호랑이를 숲 속에 홀로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렇지만,

그 전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여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친지,

사회, 국가로부터 헤아릴 길 없이 많은 것을 받는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받은 것에 대해 일부나마 같기 위해

실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내가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으면 줄 수가 없다.

의사가 되지 않으면 사람을 고칠 수 없고 과학자가 되지 않으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새로운 과학 이론을 정립할 수 없다.

컴퓨터 도사가 되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단지 운영할 따름인

컴퓨터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을 때,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져도 고칠 수가 없다.

바로 내 앞에서 사람이 굶어 죽는 데도 내가 실업자라서

한 푼도 적선할 수 없으면,

마음만 괴롭지 도와 줄 수가 없다. 도리어 빼앗아 먹고 싶어진다.

 

인간 사회는 혼자 살 수 없어서 누구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누구나 도움을 주여야 한다.

그러나 이 도움은 뜻만으로 안 되고 말만으로 안 되며

반드시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 실력을 쌓는 게 바로 공부이다.

 

공부를 왜 하느냐?

 

셋째, 자신이 노력해서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나한테는 답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찾아야 하는가?

바로 나 자신이 찾아야 한다.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공부이고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며 하신 말씀이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그렇다. 착해야 한다. 그리고 똑똑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면서 살 수가 없다.

많은 일들이 하기 싫은 일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별을 보려고 용수철처럼 따듯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매일같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개미처럼 일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싶은 가정주부도 없다.

직장에 매일 출근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매일 매일 학교 가고 싶은 학생도 없다.

그러나 자기가 하기 싫다고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누구나 그렇게 하면 세상은 느 날로 바로 아수라장이 된다.

서로를 위해서,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서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전세계의 청소년들 특히 한국의 청소년들이 사이버 세계에

깊숙이 빠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 세계에서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함께 활동하는 일이 너무 적다.

함께 운동하는 경우가 너무 적다.

함께 봉사 활동하는 게 너무 적다.

산으로 들로 자연을 구경하러 다니는 수가 너무 적다.

음악과 미술을 직접하고 감상하는 일도 너무 적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일도 거의 없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일기 한 장도 쓰지 않는다.

들에 나가서 땀흘리는 일은 아예 없다.

현실 세계서 직접 경험을 통해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거기서 느끼는 희열이 없다 보니까,

상상의 세계에 그 정열을 쏟게 된다.

인간에게는 상상의 세계도 매우 중요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사이버 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온몸을 던져 힘든 고통과 더불어

짜릿한 희열을 느끼려 들지 않고,

손쉽게 고통은 전혀 없이 손가락과 머리만으로 간단하게

희열의 강에 빠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