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전 대한민국 해군 '기네스북에 등재' 되다.

. 2009.11.02
조회28,524

1974년 2월 22일 - 통영에서 해군 예인정 침몰, 159명 사망


 

해군이 침몰한 YTL정을 인양하고 있습니다.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 예인정 (YTL)이 침몰해 해군과 해양경찰 훈련병 159명(해군 159기 109명, 해경 11기 50명)이 숨지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훈련병 311명이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인 한산도 제승당과 충렬사를 참배한 뒤 예인정을 타고 모함인 LST-815(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 ‘북한함’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예인정이 급선회를 시도하다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사고 해역 지도 (출처 = 동아일보)

 

당시  사고 해역에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초당 최대풍속 18m의 강풍이 불어 파도가  1~2m로 높았고, 기온마저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있었죠. 영하의 바닷물에 빠진 훈련병들은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짠물을 연신 들이키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하나 둘씩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마침 풍랑 주의보를 접하고 항구로 피항 하던 어선들이 달려와 구조작업에 나섰지만, 예인정에 타고 있던 인원 중 절반이 넘는 젊은 군인들이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을 낸 대참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비극적인 참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고 이후 ‘해군의 수치’라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 없이 사고를 덮어 왔으나

그나마 군사정권 이후 국민의 정부가 들어오면서부터 이 사건이 겨우 양지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인정(YTL)은 주로 다른 선박을 예항(曳航) 또는 압항(押航)하는 소형 함정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배에 300명이 넘는 장병들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해군은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탑승정원 150명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을 태우고 무리한 운행을 강행했고, 거기다 정장의 미숙한 조함 지휘가 겹쳐진 전형적인 인재였습니다. 사고 직후 정부는 해군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경질하고 진해 해군 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훈련소 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습니다.

 

 

                              2006년 2월 21일 열렸던 합동 위령제.

 

그러나 당시 유가족들은 군사정권의 시퍼런 서슬에 억울함을 드러내지 못했고, 그동안 위령제도 자체적으로 치뤄왔습니다. 2004년, 사고에서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해군 해경 159위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발족하면서 통영시와 함께 사고 현장에서 1km 떨어진 정량동 망일봉에 위령탑을 건립합니다. 해군 당국도 ‘해군의 수치’인 이 사건이 거론되는 것을 꺼려 왔으나,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며 1998년부터 통영 해군 전우회와 함께 합동위령제를 주관해 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50대 남성입니다.

현재 70~80세의 노인이 되신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대한민국 해군의 수치라 여겨 쉬쉬하는 국가의 분위기와 어두운 시대 때문에 어디가서 자식 잃은 서러움을 표현하지도 못하셨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습니까?

 사건 발생 이후 30년이 지나 겨우 위령탑 하나 세울 수 있었습니다.

 

1974년 2월22일.

날씨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2배를 초과하여 승선시키고

정장의 운전 미숙으로 젊은 20대 청년 159명이 2월 차가운 바닷물에서 순직하셨습니다.

이건 분명 대한민국 해군史에 수치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 우리 군의 안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리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쉬쉬 되었던 이 역사적 비극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말아야 합니다.


故해군,해경 159인과 故이종도 큰아버지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