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 - 이 호준

이호준200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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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 - 이 호준

 

작은 방 - 이 호준

 


 “삼촌!”

 


 아이들이 정겹게 달려와 나에 품에 안긴다. 유난히 밝은 미소와 맑다 못해 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는 이 여린 꽃들은 보호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이다.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볼 때 나는 두발로 기립(起立)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이 젖어 밖으로 나와 감정을 가라앉히기도 하고 아려오는 심장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삼키고 거짓 의젓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떫은 것들을 힘들게 삼키는데 아이들은 일체(一體)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일을 척척 해나갈 뿐만 아니라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가족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거기에 더해 삼촌에게 강제적으로 먹을 것을 챙겨주니 정말 콩 한쪽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더욱 아이들이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정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형태를 초월한 이익은 언제나 밑바탕에 깔아놓고 일을 시작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공유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옷을 사 입는 것도 비싼 음식을 먹는 것도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이들이 아프진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꾀병을 부리긴 커녕 아파도 말하지 않을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파도 금방이라도 자신이 아픈 것처럼 달려와 위로해주고 치료해줄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더 아리게 했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마음으로 고독 속에서 아픔을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은 차라리 고문일 것이다.

 나는 찾아온 낯선 감정이 그리 싫지 않아 마음속에서 노닐도록 잠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자 자리 잡은 그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롭게 갈아놓은 이성을 무뎌지게 하고 심지어 녹슬게 하였다. 시퍼런 비수를 숨기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서슴없이 찌르는 사회에 이 얼마나 무식한 행동인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못쓰게 된 흉기를 보며 안락함을 느꼈다. 예리한 것들이 사라진 마음은 긴장과 동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그렇기에 윤동주는 이렇게 슬픔을 8번이나 강조했나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逆說)적이게도 행복이 아닌 슬픔이다. 슬픔 중에서도 단연 긍휼이 으뜸이 아닐까. 개인주의와 냉소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이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또 있겠는가. 그러나 긍휼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내 가면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논리와 이성, 가식과 허영으로 몇 겹이나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혐오스러운 껍데기를 나와 완벽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스스로 질문해보자. 아니, 남을 위해 아파해야 할 당위성이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 사색해보자.

 상처를 같이 아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에 작은 방을 내어 준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 계절에 관계없이 평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방은 벽으로 된 단절의 방이 아니다. 매일 마주 볼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며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대화의 공간이다. 마음에 방 한 칸 내어주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렵겠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시대의 그 방 하나의 소중함은 주는 사람이나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나 옛날 방 한 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훈훈하게 얘기할 수 있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시간은 고사하고 차가운 노란색 광물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진심으로 내어주기도 힘든 것이다. 그러나 구하기 힘들다고 불평하지 마라. 당신은 누구에게 따뜻한 방 한 칸 되어준 적 있는가.

 각박해지는 시대의 물줄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단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기도 응답은 주로 환경의 변화가 아닌 환경을 보는 시각의 변화임을 기억하자. 시각의 변화는 곧 세상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각이 따뜻하게 변할 때 세상도 따뜻해진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나뿐임을 깨닫고 우리가 비록 평생 한 칸의 방도 못 얻을 지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방 한 칸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세상은 변한다. 그것이 나에게 조차 방 한 칸 내어주지 않는 삶에 영원한 쉼터를 짓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