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는 곤란한데요." "아까 카드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카드 된다고 해서 이곳에 들어왔는데요." "일부는 돈으로 내고 일부만 카드를 쓰세요." "가지고 있던 돈을 울릉도 가서 다 쓰고 이제 만원 남았는데 그럼 이것이라도 받으시고 나머지는 카드로 결재합시다." 그때 방을 안내하러 갔던 젊은 여자가 왔다. "8만원에 안돼요. 9만원 주셔야 합니다." "처음에 두 분, 네 분 나누어서 방 2개 투숙하는데 8만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원수는 그대론데 올리면 어떡해요?" "방을 큰 것 잡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처음부터 네 분이 주무시려면 당연히 큰방을 드려야 하잖아요?" "어쨌든 9만원 아래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9만원에 하기로 하고 카드를 주었다. 그 여자는 카드를 받더니 이제는 카드기가 고장 났다며 다시 현금을 달라고 했다.
이 종학 전 독도박물관장님의 송덕비 제막식에 갔다가 같이 포항으로 나오게 된 이종학관장님의 유가족들이 피곤해서 포항에서 주무시고 서울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모텔을 잡아드렸다.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이종학관장님을 예우하는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예우해 드리고 싶어서 카드 결재가 될 만한 깨끗한 모텔을 찾아 포항역까지 갔다가 다시 포항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북부 해수욕장의 시티모텔로 숙소를 정했다. 우리는 사무실 여자에게 고 이 종학 관장님에 대해 소개하면서 유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을 일부러 부탁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우리의 간절한 부탁에는 관심도 없이 늪 속으로 우리를 유인하듯 불러들여 방을 정하게 하고는 가격을 올리고 유가족 앞에서 보란 듯이 현금을 요구했다.
바로 옆 모텔에서는 8만원에 된다고 했지만 유가족들이 이미 방을 정한 후라 나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곁에 서 있던 이 관장님의 조카 되는 분이 우리가 사무실에서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만 우리 대신 현금으로 결재해버렸다. 나는 울고 싶었다.
"아주머니!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저 분들은 독도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 삶을 바친 분의 유가족들이오. 저 귀한 분들을 위로하고 싶어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 기회를 빼앗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요? 이런 분들을 모실 기회가 흔한 줄 아시오? 당신들은 오늘 이 분들을 대접하고 독도를 지킬 기회를 잃어버렸고, 우리는 그 기회를 빼앗겼소. 이 일이! 얼마나! 큰 실수 인지! 아시오?"
나는 이 사람들이 카드 결재에 대해 상습적으로 기피하는 것 같아 보여 더 화가 났다. 카드를 기피하고 현금만 챙기려는 그 모습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 삶을 바친 이종학 관장님의 삶과 대조가 되어 가슴이 저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서 가슴을 쳐도 지나가 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 이종학 관장님이 살아계실 때 독도지키기 100만인 서명을 달성하고 댁에 가서 만나 뵌 적이 있다.
그 당시 이종학 관장님께서는 독도지키기 서명운동에 참여한 서명용지를 청와대에 제출하는 것보다 독도박물관에 보관해서 독도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열정을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하셨다.
우리는 관장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그 서명용지를 독도박물관에 전달하게 되었다.
생전에 독도 일로 만나거나 전화를 드리면 "고맙습니다." 를 말끝마다 하셨던 이 종학 관장님!
우리는 그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뒤늦게 독도지키기 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그 분이 가시고 난 지금 와서야 관장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식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라도 예뻐 보이듯이, 생전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오래된 가족처럼 사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지는 이 마음!
이종학 관장님이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이종학 관장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독도지키기 운동에 시작한 지 10년이 다 된 요즈음 와서야 깨달아 지니......
이종학 관장님의 유가족들이 관장님을 만나는 것처럼 소중하게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이 종학 관장님이 일생동안 독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사모님과 가족들을 예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가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가 방을 구해드리는 것이라 생각되어 모텔로 안내했던 우리는, 결국 그 기회마저 빼앗기고 비통한 심정으로 오히려 그분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그 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애국지사의 유가족을 예우하는 것은 그 분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선조의 뒤를 이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도 뛰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동안 그 일을 너무 소홀히 해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지사의 후손들에 대한 예우가 부족했다는 것을 전국 순회를 하면서 깨닫고 우리는 그 점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종학 전 독도박물관장님의 송덕비 제막식에 참가해서 울릉 군민들이 초등학생부터 군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어 이 종학 관장님과 유가족들을 예우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포항 시티 모텔 사람들의 횡포는 우리에게 더 충격적이었다.
2002년도 독도 사랑 작품 전시회를 포항 문화예술회관에서 했을 때 우리는 북부 해수욕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잠을 잔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공중 화장실 청소를 너무 깨끗하게 하시는 70대 할머니를 만나 그 분의 철저한 소신과 국가관을 보면서 감명을 받고, 그 분을 이 시대의 독도 의병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우리는 바로 그 화장실 맞은편에 있는 시티 모텔 사람들을 자격 미달의병으로 추천(?)해야 했다.
* 빼앗긴 기회, 잃어버린 기회 - 14회
독도지키기 200만인 서명운동 달성 체험기 연재 14회
빼앗긴 기회, 잃어버린 기회
"카드는 곤란한데요."
"아까 카드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카드 된다고 해서 이곳에 들어왔는데요."
"일부는 돈으로 내고 일부만 카드를 쓰세요."
"가지고 있던 돈을 울릉도 가서 다 쓰고 이제 만원 남았는데 그럼 이것이라도 받으시고 나머지는 카드로 결재합시다."
그때 방을 안내하러 갔던 젊은 여자가 왔다.
"8만원에 안돼요. 9만원 주셔야 합니다."
"처음에 두 분, 네 분 나누어서 방 2개 투숙하는데 8만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원수는 그대론데 올리면 어떡해요?"
"방을 큰 것 잡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처음부터 네 분이 주무시려면 당연히 큰방을 드려야 하잖아요?"
"어쨌든 9만원 아래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9만원에 하기로 하고 카드를 주었다.
그 여자는 카드를 받더니 이제는 카드기가 고장 났다며 다시 현금을 달라고 했다.
이 종학 전 독도박물관장님의 송덕비 제막식에 갔다가 같이 포항으로 나오게 된 이종학관장님의 유가족들이 피곤해서 포항에서 주무시고 서울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모텔을 잡아드렸다.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이종학관장님을 예우하는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예우해 드리고 싶어서 카드 결재가 될 만한 깨끗한 모텔을 찾아 포항역까지 갔다가 다시 포항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북부 해수욕장의 시티모텔로 숙소를 정했다.
우리는 사무실 여자에게 고 이 종학 관장님에 대해 소개하면서 유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을 일부러 부탁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우리의 간절한 부탁에는 관심도 없이 늪 속으로 우리를 유인하듯 불러들여 방을 정하게 하고는 가격을 올리고 유가족 앞에서 보란 듯이 현금을 요구했다.
바로 옆 모텔에서는 8만원에 된다고 했지만 유가족들이 이미 방을 정한 후라 나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곁에 서 있던 이 관장님의 조카 되는 분이 우리가 사무실에서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만 우리 대신 현금으로 결재해버렸다.
나는 울고 싶었다.
"아주머니!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저 분들은 독도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 삶을 바친 분의 유가족들이오.
저 귀한 분들을 위로하고 싶어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 기회를 빼앗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요?
이런 분들을 모실 기회가 흔한 줄 아시오?
당신들은 오늘 이 분들을 대접하고 독도를 지킬 기회를 잃어버렸고, 우리는 그 기회를 빼앗겼소.
이 일이! 얼마나! 큰 실수 인지! 아시오?"
나는 이 사람들이 카드 결재에 대해 상습적으로 기피하는 것 같아 보여 더 화가 났다.
카드를 기피하고 현금만 챙기려는 그 모습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 삶을 바친 이종학 관장님의 삶과 대조가 되어 가슴이 저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서 가슴을 쳐도 지나가 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 이종학 관장님이 살아계실 때 독도지키기 100만인 서명을 달성하고 댁에 가서 만나 뵌 적이 있다.
그 당시 이종학 관장님께서는 독도지키기 서명운동에 참여한 서명용지를 청와대에 제출하는 것보다 독도박물관에 보관해서 독도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열정을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하셨다.
우리는 관장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그 서명용지를 독도박물관에 전달하게 되었다.
생전에 독도 일로 만나거나 전화를 드리면
"고맙습니다."
를 말끝마다 하셨던 이 종학 관장님!
우리는 그 당시엔 그 이유를 몰랐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뒤늦게 독도지키기 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그 분이 가시고 난 지금 와서야 관장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식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라도 예뻐 보이듯이, 생전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오래된 가족처럼 사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지는 이 마음!
이종학 관장님이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이종학 관장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독도지키기 운동에 시작한 지 10년이 다 된 요즈음 와서야 깨달아 지니......
이종학 관장님의 유가족들이 관장님을 만나는 것처럼 소중하게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이 종학 관장님이 일생동안 독도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사모님과 가족들을 예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가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가 방을 구해드리는 것이라 생각되어 모텔로 안내했던 우리는, 결국 그 기회마저 빼앗기고 비통한 심정으로 오히려 그분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그 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애국지사의 유가족을 예우하는 것은 그 분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선조의 뒤를 이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도 뛰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동안 그 일을 너무 소홀히 해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지사의 후손들에 대한 예우가 부족했다는 것을 전국 순회를 하면서 깨닫고 우리는 그 점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종학 전 독도박물관장님의 송덕비 제막식에 참가해서 울릉 군민들이 초등학생부터 군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어 이 종학 관장님과 유가족들을 예우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포항 시티 모텔 사람들의 횡포는 우리에게 더 충격적이었다.
2002년도 독도 사랑 작품 전시회를 포항 문화예술회관에서 했을 때 우리는 북부 해수욕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잠을 잔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공중 화장실 청소를 너무 깨끗하게 하시는 70대 할머니를 만나 그 분의 철저한 소신과 국가관을 보면서 감명을 받고, 그 분을 이 시대의 독도 의병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우리는 바로 그 화장실 맞은편에 있는 시티 모텔 사람들을 자격 미달의병으로 추천(?)해야 했다.
2003년 6월
독도의병대(www.o-dokd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