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백제에 역사를 알려면 먼저 고(구)려(고구려에 원레 나라이름은 고려 였으나 훗날 왕건이 세운 고려와 비교 하기 위해 서 句(구)자 를 넣어 표기 한것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분명 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표기 하고 있다 예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대한민족 최초의 국가 (古:고)조선과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추모성왕의 이름은 흔히 주몽 또는 동명성왕으로 알고 있으나 주몽은 중국식 발음 인 것 이다. 고(구)려식 발음은 추모 이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연호:영락)릉비 비문에는 분명 추모로 기록 되어있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서에도 추모로 표기 하고 있다. 동명성왕은 추모성왕과 다는 인물 인 것이 된다. 동명성왕은 이름은 동명, 탁리국을 탈출해 부여를 건국 하신 부여시조 인 것이다. 부여 건국과정과 고(구)려 건국 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고(구)려가 부여 동명성왕에 부여 건국과정을 배낀 것이 된다.
그리고 우태가 온조왕에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라에 국통맥을 치졸하게 끝는 것이다. 온조왕에 아버지는 일설로만 우태일뿐 온조왕에 아버지는 추모성왕 인것이다.
다만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라고 할 수는 있다.
대륙백제는 백제 제8대 고이왕대에 개척 했고, 제9대 책계왕대를 거쳐 10,11,12 제13대 근초고왕대에 전성기를 맞아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세우고, 산동반도 일부에 백제성을 쌓았고, 성왕, 무령왕대을 거쳐 백제에 대륙영토를 잃어 버렸습니다. 백제는 대륙영토를 한반도 전라, 제주,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 산동반도(중국), 양자강(중국), 요서지방(중국), 중국 남부지역, 베트남 북부지역, 대만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중부지역은 제외), 대마도(일본), 규슈(일본) 지역을 지배해 왔습니다.
대한사가 세계사에 주인 입니다.
지근은 우리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빼았겼던 문화제를 되찾으려 하고 있지만, 옛 대한민족은 그런 오랑캐들을 누르고 지배하던 민족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언급 못하오니 삼국사기 등 역사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백제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백제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백제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토대로 한 백제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막강한 해상교역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조선술은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일. 실제로 백제는 「방(舫)」이라고 표현되는 대형 선박을 이용하였고,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백제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 이라는 책은 중국인 학자들이 중국정사인 25사에 남아있는 장군들의 업적을 여러가지 문헌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위인집이다.
이 책에는 그 동안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만 알려진 ‘흑치상지’의 고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사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구당서』,『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등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그저 ‘백제서부인(百濟西部人)’ 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를 그저 사비지역의 서쪽사람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당(唐)나라)이 말하는 ‘백제 서부인’ 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중국에 있는 ‘요서군’이나 ‘진평군’과 같은 ‘백제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인을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주 ; 일찌기 신라인 최치원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인정한다)
--------------------------------------------------------------------------- 이 「장수전전」은 놀랍게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廣西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黑齒常之 (? ~ 689年) 唐高宗李治武則天后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西部人) ---------------------------------------------------------------------------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그의 묘지명에서 발힌 바 와 같이 (묘지명은 약 70년 전 중국 洛陽(락양)에 발굴) 그의 조상 문덕(文德), 덕현(德顯), 사차(沙次)등은 백제인 으로서 대대로 「흑치국」의 왕에 봉해진 백제왕의 후왕(侯王)으로서 자신은 그들의 후손으로서 지금의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출생은 629년으로 추정)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백제사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의 하나인 「흑치국」의 위치를 비정(比定)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과연「흑치국」은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답은 기록을 통해서 찾기는 어려운게 사실이나,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흑치국」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백제향’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번 내가 이 지역을 방문한 주된 이유도「흑치국」의 소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지방의 한 유지에게 “옛날 이 고장에도 ‘흑치인’들이 살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60살은 된 듯함) 내질문에 성큼 답하기를 “자신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없었지만 조부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조부의 소년 시에는 거리에서 종종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의 거리에서는 ‘흑치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도읍지도 이 지역의 어디엔 가에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정은 그리 빗나간 이야기는 아닌 상 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흑치상지’의 조상들의 유물도 이 근방 어딘가 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고 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기약하고 ‘백제향’을 떠났다.
(주;옛날 중국의 양자강 이남의 여러지역(대만도 포함)에서는 이빨이 검은 ‘흑치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서부지역 및 서남방과 월남경내에는 많은 ‘흑치인’이 살았다고 한다) -->> http://www.coo2.net/index.htm
<자료>
< 흑치상지 (黑齒常之) >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흑치상지(黑齒常之)는 ☞ 자료출처 : 야후 백과사전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달솔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나당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며, 백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끼어 참전,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명장 흑치상지를 "광동성 흠현 서북의 백제 서부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광동성이 백제땅이라는 것인가 ?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 -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인궤가 백제를 통수하는 기간중에, 그 지대에 이어지는 (백제)수복의 전투에 힘을 다 쏟았다.
다른 중점은 호적의 새로운 정리, 관청(행정 조직) 설치,도로 개통,교량 건설, 제방 보수, 경작 육성을 하여, 백제 일대가 사람이 편안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힘썼다.
유인궤는 고종에게 상서를 올려,현재 당군 초모병역중의 문제에 진술하여, 그중에 이로운 것과 폐할것을 세밀히 분석하였는데, 다른 건의도 같이 고종은 채납(채용하고 받아들여)하였다.
함형 5년(674년), 유인궤는 명림도 대총관 부임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 신라를 공격했다.(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④)
위에서 언급한 내용중
① 1은 신라(지금의 복건성 장정현), ② 2는 웅진(지금의 남조선 대전 서북) ③ 3은 백강(지금 호남성 기양), ④ 4는 신라를 공격했다. (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한족의 동이족 말살정책의 일환인 "동이역사 반도 밀어내기 정책"의 영향으로 지명의 위치가 대륙과 반도를 오고감을 알수 있다
이는 대륙백제의 기록임을 왜 모르는가 ?
“광서장족자치구에 있는 백제인 흑치상지가 반도의 백제로 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묻혔다“이것이 말이되는가 ? 바로 대륙에 백제의 본토가 있었음을 말함이다. 수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부분이다
< 기양 = 치양 >
호남성 면적 : 21만 천평방킬로미터, 인구 : 6300만명 (1995년 지도자료) 상강(湘江)의 유역에 있는 광서장족자치구 전주 --> 호남성 영주 --> 호남성 치양 (稚陽: QiYang) 稚陽 ---> (원문에는 祁땅이름치 陽=언덕부변+日) 祁陽縣 백제 22담로는 백제가 해외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이자 백제의 힘을 상징하는 상징적 매개물이었습니다. 백제 22담로를 통해 백제가 약소국이 아닌 해외를 재패한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22담로는 백제가 해외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22개의 행정 구역입니다. 위의 분 말씀대로 백제의 담로는 다물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담로라는 뜻은 경계, 담을 의미하지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국시는 잃어버린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고 그 영광을 재현하는 다물정책이었습니다.
『양서』「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서』와 『남제서』를 보면 백제 대왕(천황)이 왕족이나 신하를 담로왕으로 봉해 백제 22담로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다물(영토를 되찾자)하기 위해 8대 고이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그 틈을 노려 지금의 금주지방(요서)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10대왕 분서왕 때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노려 지금의 천진(북경 이남)지방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전 국력을 동원하여 중국 동해안 일대를 차지햇지요
송서를 보면 호(胡)가 동진을 공격하여 동진은 양쯔강 하구의 기름진 옥토를 빼앗깁니다. 학자들은 이 호를 당시 5호라 불리던 흉노,갈,선비,저,강 족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호와 흉노를 구별했습니다. 사기를 보면 고조선을 동호(東胡)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동진을 압박한 호(胡)는 백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중국 동해안과 일본 일대를 차지했다는 증거가 바로 칠지도와 구당서를 들 수 있습니다. 칠지도를 보면 명문에 "백제 대왕이 왜 후왕(담로왕)에게 하사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왜에 식민지를 설치하여 왜 후왕 정확히는 담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당서를 보면 백제의 영토를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양쯔강 하구)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른다"라고 썼는데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일본과 중국 동해안에 진출하여 담로를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헌비고를 보면 "월왕 구천의 고도를 둘러싼 수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강병이 백만이었으며 북으로는 유,연(하북성),제,노(산동성)을 침략하여 소란케 했고, 남으로는 오,월(양쯔강 일대)를 차지하였다"란 구절이 있어 이들 두 가지 기록은 백제 22담로를 뒷받침 해줍니다.
그리고 백제 24대 동성왕 때 북위와 전쟁을 할 때 정로장군 매라왕 사법명, 안국장군 벽중왕 찬수류, 무위장군 불중후 해례곤, 광위장군 면중후 목간나를 보내 북위 기병10만군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왕, 후 입니다. 북위를 토벌한 장군들의 이름 앞에 왕 또는 후가 붙었다는 것은 백제 천황이 이들 신하를 백제 해외 식민지를 다스리는 담로왕 또는 담로후로 임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분 말씀대로 흑치상지의 성 흑치는 검은 이빨을 뜻하는데 지금도 필리핀,인도네시아를 가면 흑치 즉 검은 이빨 부족이 있는데 그들의 이빨이 검은 이유는 먹으면 이빨이 검어지는 야자열매를 그들이 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백제의 풍속을 지닌 부족이 있어 당시 백제가 서남으로 동남아를 넘어 인도네시아 까지 백제군 아니 백제 22담로를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지요
가림토(책이름)에서 발췌 「백제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대륙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방대한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이상 계속 되는 그들의 항쟁사를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아직까지 이러한 대백제의 전통과 문화(유물 및 유적)가 중국 대륙 곳곳에 남아있으며 일본 열도에는 그러한 잔영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다만 우리가 그것을 밝히고 널리 알리지 못할 따름이다)」
참고로 백제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고 문정창 선생께서는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 이후 중국의 남조가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며 남조는 백제인의 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나라를 세운 도이 숙연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양나라를 건국했으며 양나라 이전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은 백제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령왕릉에 출토된 벽돌문화가 양나라 문화가 아닌 백제 문화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중국 25사를 연구하여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제는 당시 막강한 경제대국이었습니다. 백제는 방대한 해외식민지를 차지하여 그 곳에 담로를 설치했는데 담로를 통해 국제무역이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제는 왕도 매지권을 사야 묘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발달되었으며 담로제도를 통하여 국제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백제가 동아시아 해상을 움켜쥐어 동아시아의 국제교역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흔히들 백제에게 "내세울것은 문화밖에 없는 외소한 나라" 라고 말한다.그러나 199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된 백제사는 이제 학계에서 인정받는당당한 제국이 되었다.한반도 백제사란 그저 반토막 백제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대륙백제』에 대하여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정설로 들어난지가 꽤 지났는데도.. 말이다.『대륙백제』에 대해 말하려면 너무 많은 글이 필요하기에 간단히 설명만 하겠다. 백제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국제무대를 누비는 해상제국이었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일치하는점을 찾을수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비슷하게보고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워 여러번 이긴것처럼 백제군 또한북위와 5차례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한것이 중국 사서에 분명히 기록 되어있다. 무적 기질은 고구려에 비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국세(國勢) 또한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구당서(舊唐書)에 『西渡모모모, 比渡海모高모, 南渡海모모』라고 하 여 백제의 강통가 중국 산동절강(山東浙江) 일대까지 이르고 일본을 속국 으로 두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남제서(南濟書)에는 기원 490년에 위 (魏)가 두번이나 기병, 보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범하였다가 모두 격 퇴된 사실을 적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의 10만 이상의 군대를 쳐부 순 것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때가 처음으로 당시 백제의 강력한 무력 을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은『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 다고 하였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나라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고 하여 백제인이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뛰어난건 더욱히 사실이나 백제 또한 고구려에 비해 뒤지지 않았음을.. 중국에서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대륙백제에 대한 시기와 반발이 오가지만 이미 학계에서 대륙백제를 인정했으며 대규모 사서들과 일치하는 대목을 봐서는증거가 너무나도 정확하다. 신라를 찬양하는 사람에겐 백제란 작은 국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게 된다면, 실제로 신라는 백제에 비하여 외소한 국가임을 깨닫게 되는게 사실이다. 당대 중국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높게 평가 헀지만 신라 라는 나라는 매우 낮게평가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다. 위 그림을 보면 알수 있듯이 교과서에서 나온 백제와는 전혀 틀리다. 그렇지만이것이 진정한 백제이다. 아니 이것보다 훨씬 클수도 있다. 박영규 교수님은 백제를 쇄족에 묶인 거인이라 표현하였고이도학 교수님은 백제를 동방로마제국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이외에 여러 학자들이 백제를 크기를 알수없는 거인이라 표현하였다. 이 찬란한 영광과 문명.. 이 모든것들이 하루아침에 역사가 왜곡 되어, 영광스런 제국이 잊혀져 갈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라, 놀라움을 금치못해 경악을 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신라의 배신으로 축소되고 소멸된 제국.. 백제 해상제국의 영광을 이제 드러내야할때다. 이 음악이 백제의 비운과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영광스런 제국이 사료들의 제거와 왜곡되어버린 비운.. 백제는 정말 안타까운 국가이다. 때문에 백제는 잃어버린 제국이다.. <EMBED src=http://home.hanmir.com/~kris4/c.asf hidden=true loop="true" autostart="true">이의제기 내용추가 (2006-05-10 14:01 추가) 이의제기 내용보기 사실 백제의 제후국이 일본이었다는것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 백제 지방제도 명칭이었던 22담로, 담로의 지명은 중국~일본 해안가를 포함해 동남아시아 지대까지 '담로'지명이 발견이 되는것이 가장 큰 증거.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백제흔적에 비해 일본열도 내에서 백제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는다는것. 흑치국인 필리핀의 출생인 흑치상지가 백제인인데다 필리핀지대에도 "담로"지명이 발견되는것으로 보아 그곳도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중국남부에 '백제허'라는 지명이 발견되는데 그곳에서는 한국에서만 볼수 있다는 '맷돌'이 발견되었다는것. 이외에 수많은 중국사서에서 백제의 국력,백제의 영역,백제의 인구수가 76만호에 육박하는것으로 보아<고구려는 69만호, 신라는 약 20만호 추정> 등을 서술하는것으로 보아 백제는 이미 중국,동남아시아,일본을 장악한 대 제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짓입니다. 때문에 한국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일본을 백제의 영역이라고 직접적으로 서술 할 수 없이구요.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증거를 놔두고도 백제의 역사를 축소시키려는 국사계의 의도가 이해가 안가는건 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그리고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신라 또한 우리나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미워도 우리 조상이고.. 역사를 배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배운다는것에 따라.. 분명 신라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미워 할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말을 돌리자면, 현재 우리나라는 신라위주의 역사와 일본의 침략역사가 결합한 어리석은 역사임이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응당 수정,보완 하지 않는것으로 보아 국사계의 윗쪽이 썩어있으이라 짐작됩니다. 이는 분명히 우리나라에 주어진 과제이지만 우리나라는 물질주의에 만연하여 역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몇백년이 지난다 해도, 역사혁명이 일어나지 않는한 제대로 된 역사는 결국 아는 사람만 아는 가설이 되어버리고 말겠죠.
해양 제국 백제와 흑치상지
대륙백제 !!
백제의 대륙의 광활한 영토와 영광을 제보 합니다.
여기선 모든걸 언급 못하오니 간단이 말하겠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대륙백제 [위대한유산 74434]에 제보 합니다.
백제사 700년에 영광과 자부심 그리고 자존심을 다시 한번..
그리고 백제에 역사를 알려면 먼저 고(구)려(고구려에 원레 나라이름은 고려 였으나 훗날 왕건이 세운 고려와 비교 하기 위해 서 句(구)자 를 넣어 표기 한것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분명 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표기 하고 있다 예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대한민족 최초의 국가 (古:고)조선과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추모성왕의 이름은 흔히 주몽 또는 동명성왕으로 알고 있으나 주몽은 중국식 발음 인 것 이다. 고(구)려식 발음은 추모 이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연호:영락)릉비 비문에는 분명 추모로 기록 되어있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서에도 추모로 표기 하고 있다. 동명성왕은 추모성왕과 다는 인물 인 것이 된다. 동명성왕은 이름은 동명, 탁리국을 탈출해 부여를 건국 하신 부여시조 인 것이다. 부여 건국과정과 고(구)려 건국 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고(구)려가 부여 동명성왕에 부여 건국과정을 배낀 것이 된다.
그리고 우태가 온조왕에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라에 국통맥을 치졸하게 끝는 것이다. 온조왕에 아버지는 일설로만 우태일뿐 온조왕에 아버지는 추모성왕 인것이다.
다만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라고 할 수는 있다.
대륙백제는 백제 제8대 고이왕대에 개척 했고, 제9대 책계왕대를 거쳐 10,11,12 제13대 근초고왕대에 전성기를 맞아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세우고, 산동반도 일부에 백제성을 쌓았고, 성왕, 무령왕대을 거쳐 백제에 대륙영토를 잃어 버렸습니다. 백제는 대륙영토를 한반도 전라, 제주,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 산동반도(중국), 양자강(중국), 요서지방(중국), 중국 남부지역, 베트남 북부지역, 대만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중부지역은 제외), 대마도(일본), 규슈(일본) 지역을 지배해 왔습니다.
대한사가 세계사에 주인 입니다.
지근은 우리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빼았겼던 문화제를 되찾으려 하고 있지만, 옛 대한민족은 그런 오랑캐들을 누르고 지배하던 민족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언급 못하오니 삼국사기 등 역사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백제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백제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백제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토대로 한 백제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막강한 해상교역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조선술은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일. 실제로 백제는 「방(舫)」이라고 표현되는 대형 선박을 이용하였고,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백제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 이라는 책은 중국인 학자들이 중국정사인 25사에 남아있는 장군들의 업적을 여러가지 문헌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위인집이다.
이 책에는 그 동안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만 알려진 ‘흑치상지’의 고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사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구당서』,『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등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그저 ‘백제서부인(百濟西部人)’ 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를 그저 사비지역의 서쪽사람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당(唐)나라)이 말하는 ‘백제 서부인’ 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중국에 있는 ‘요서군’이나 ‘진평군’과 같은 ‘백제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인을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주 ; 일찌기 신라인 최치원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인정한다)
---------------------------------------------------------------------------
이 「장수전전」은 놀랍게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廣西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黑齒常之 (? ~ 689年) 唐高宗李治武則天后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西部人)
---------------------------------------------------------------------------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그의 묘지명에서 발힌 바 와 같이 (묘지명은 약 70년 전 중국 洛陽(락양)에 발굴) 그의 조상 문덕(文德), 덕현(德顯), 사차(沙次)등은 백제인 으로서 대대로 「흑치국」의 왕에 봉해진 백제왕의 후왕(侯王)으로서
자신은 그들의 후손으로서 지금의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출생은 629년으로 추정)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백제사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의 하나인
「흑치국」의 위치를 비정(比定)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과연「흑치국」은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답은 기록을 통해서 찾기는 어려운게 사실이나,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흑치국」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백제향’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번 내가 이 지역을 방문한 주된 이유도「흑치국」의 소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지방의 한 유지에게 “옛날 이 고장에도 ‘흑치인’들이 살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60살은 된 듯함) 내질문에 성큼 답하기를 “자신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없었지만 조부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조부의 소년 시에는 거리에서 종종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의 거리에서는 ‘흑치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도읍지도 이 지역의 어디엔 가에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정은 그리 빗나간 이야기는 아닌 상 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흑치상지’의 조상들의 유물도 이 근방 어딘가 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고 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기약하고 ‘백제향’을 떠났다.
(주;옛날 중국의 양자강 이남의 여러지역(대만도 포함)에서는 이빨이 검은 ‘흑치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서부지역 및 서남방과 월남경내에는 많은 ‘흑치인’이 살았다고 한다) -->> http://www.coo2.net/index.htm
<자료>
< 흑치상지 (黑齒常之) >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흑치상지(黑齒常之)는 ☞ 자료출처 : 야후 백과사전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달솔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나당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며, 백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끼어 참전,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명장 흑치상지를 "광동성 흠현 서북의 백제 서부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광동성이 백제땅이라는 것인가 ?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
-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 흑치상지는 백제서부인인데, 반도의 충남서부인인가 아니면 광서장족자치구인인가 ?
< 원문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47,
- 黑齒常之(?∼689年), 唐高宗李治, 武則天時名將.
- 百濟(今廣東欽縣西北)西部人 : 백제(금광동흠현서북)서부인
- 身長七尺有余, 驍勇善戰, 有謀略.
黑齒常之早先在本蕃任達率兼郡將. 顯慶五年(660年), 唐高宗派蘇定方破灰百濟, 黑齒常之率部下前去送降款, 遭到唐軍兵士的 劫殺戮, 黑齒常之見狀, 忙帶了十幾人逃回本部, 不幾日收羅兵士三萬余人. 蘇定方破兵圍攻, 黑齒常之率部報死相 , 唐軍大敗, 黑齒常之一擧收復失地二百多 城池. 龍朔三年(663年), 唐高宗下詔招降黑齒常之, 常之隨卽率部降唐, 被任左領軍員外將軍.
※ 百濟는 今廣西壯族自治區 南寧市에 속함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敵兵大戰于白江(今湖南祁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 焚燒敵船四百余 ,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敵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敵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원문에는 敵(舌+ )임]
白江은 今湖南永州市祈陽縣
<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 소개 >
이책은 중국인 학자들이 중국정사인 25사에 남아있는 장군들의 업적을 여러가지 문헌을 토대로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위인집으로 상중하 3권으로 구성
최원용 선생님이 99년 3월에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서점에서 발견하였다가 2001년 2월 국내로 반입한 책임
# 저자 등 소개 #
정복전 가영설 양효춘 주편 {중국장수전전}(권중 유인궤),
(북경, 공상출판사, 1997), p.933,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 (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 원 문 >
當時,唐將蘇定方奉詔(고할,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알릴 조)
兵討高麗,戰敗而ㅇ(이 簡字는 모르겠음),
高宗下詔給劉仁軌,
"我們(우리들 吾等 문)的大軍己(자기, 다스릴 기)經撤回,
稱們一城孤守,十分不利,看情況離以守下去,不幸的活就渡海回來(아이다툴,어조사 파)."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刮兵大戰于白江(今湖南祁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 焚燒刮船四百余 ,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刮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刮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 해 설 >
당시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고려(=고구려)를 토벌하는 병사를 일으켰으나, 전쟁은 패색이 되어, 고종(당 고종)이 유인궤를 보내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우리의 대군이 철회를 하여야할 수 밖에 없음이, 외로이 1개성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니,정황을 볼 때, 지키지 말고 물러가 불행적으로, 바다를 건너 돌아올 활로를 찾으라(찾을 수 밖에 없다)" 하였다.
유인궤가 가서 장수와 군사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우리는 고구려로 출병하였는데, 이는 국가적 대업인데, 현재, 공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가게 되었으니,
우리는 장차 조정을 어떻게 바라 볼것이냐, 장졸들은 죽기로서 싸워 국가에 보답할 공을 이루라" 하였다.
유인궤가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적과 아군 쌍방 형세를 분석해 보고는, 백제를 견고히 지키고 살펴 나가기로 결정하였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유인궤는 병사를 데리고 진현성 야습에 나서 등나무 줄기를 잡고 성위로 올라 단번에 공격하여 성아래 연못에 이르러,
통로를 만들어 신라(지금의 복건성 장정현 ①)의 군량 운반 도로로 갔다.
이후, 유인궤, 유인원은 웅진(지금의 남조선 대전 서북 ②)의 동쪽에 있으며 백제군대를 연속 3년 패배시키고 또, 성이 앉은 곳의 연못을 공격하여 없앴다.
용삭삼년(663년) 유인궤는 소속한 수군과 운량선대와 병사를 인솔하여, 백강(지금의 호남성기양 ③)의 위에서, 연속 4전(四戰)에 접하여, 균일하게 크게, 전선 4백여를 불태우고 깨트려서, 일시, 강 상류에 화광이 빛나고 하늘은, 강물이 빨갛게 물듦이 배었다.
병이 대패한, 백제왕은 황급히 도망하여 도피했는데, 우리가 그 도읍을 쳐부수고 당군은 그 항복을 받았다.
유인궤는 그공으로 인해서 대방주자사에 임명됐고, 백제의 진을 수비했다.
건봉원년(666연) 임우상
--------------------------------------------------------------------
< 이하 원문 생략 : 원본책자사진 참조 >
유인궤가 백제를 통수하는 기간중에,
그 지대에 이어지는 (백제)수복의 전투에 힘을 다 쏟았다.
다른 중점은
호적의 새로운 정리, 관청(행정 조직) 설치,도로 개통,교량 건설, 제방 보수, 경작 육성을 하여,
백제 일대가 사람이 편안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힘썼다.
유인궤는 고종에게 상서를 올려,현재 당군 초모병역중의 문제에 진술하여,
그중에 이로운 것과 폐할것을 세밀히 분석하였는데,
다른 건의도 같이 고종은 채납(채용하고 받아들여)하였다.
함형 5년(674년), 유인궤는 명림도 대총관 부임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 신라를 공격했다.(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④)
위에서 언급한 내용중
① 1은 신라(지금의 복건성 장정현),
② 2는 웅진(지금의 남조선 대전 서북)
③ 3은 백강(지금 호남성 기양),
④ 4는 신라를 공격했다. (지금의 조선 반도 동남부),
한족의 동이족 말살정책의 일환인 "동이역사 반도 밀어내기 정책"의 영향으로 지명의 위치가 대륙과 반도를 오고감을 알수 있다
이는 대륙백제의 기록임을 왜 모르는가 ?
“광서장족자치구에 있는 백제인 흑치상지가 반도의 백제로 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묻혔다“이것이 말이되는가 ? 바로 대륙에 백제의 본토가 있었음을 말함이다. 수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부분이다
< 기양 = 치양 >
호남성 면적 : 21만 천평방킬로미터, 인구 : 6300만명 (1995년 지도자료)
상강(湘江)의 유역에 있는 광서장족자치구
전주 --> 호남성 영주 --> 호남성 치양 (稚陽: QiYang)
稚陽 ---> (원문에는 祁땅이름치 陽=언덕부변+日) 祁陽縣 백제 22담로는 백제가 해외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이자 백제의 힘을 상징하는 상징적 매개물이었습니다.
백제 22담로를 통해 백제가 약소국이 아닌 해외를 재패한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22담로는 백제가 해외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22개의 행정 구역입니다. 위의 분 말씀대로 백제의 담로는 다물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담로라는 뜻은 경계, 담을 의미하지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국시는 잃어버린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고 그 영광을 재현하는 다물정책이었습니다.
『양서』「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서』와 『남제서』를 보면 백제 대왕(천황)이 왕족이나 신하를 담로왕으로 봉해 백제 22담로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다물(영토를 되찾자)하기 위해 8대 고이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그 틈을 노려 지금의 금주지방(요서)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10대왕 분서왕 때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노려 지금의 천진(북경 이남)지방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전 국력을 동원하여 중국 동해안 일대를 차지햇지요
송서를 보면 호(胡)가 동진을 공격하여 동진은 양쯔강 하구의 기름진 옥토를 빼앗깁니다. 학자들은 이 호를 당시 5호라 불리던 흉노,갈,선비,저,강 족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호와 흉노를 구별했습니다. 사기를 보면 고조선을 동호(東胡)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동진을 압박한 호(胡)는 백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중국 동해안과 일본 일대를 차지했다는 증거가 바로 칠지도와 구당서를 들 수 있습니다. 칠지도를 보면 명문에 "백제 대왕이 왜 후왕(담로왕)에게 하사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왜에 식민지를 설치하여 왜 후왕 정확히는 담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당서를 보면 백제의 영토를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양쯔강 하구)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른다"라고 썼는데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일본과 중국 동해안에 진출하여 담로를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헌비고를 보면 "월왕 구천의 고도를 둘러싼 수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강병이 백만이었으며 북으로는 유,연(하북성),제,노(산동성)을 침략하여 소란케 했고, 남으로는 오,월(양쯔강 일대)를 차지하였다"란 구절이 있어 이들 두 가지 기록은 백제 22담로를 뒷받침 해줍니다.
그리고 백제 24대 동성왕 때 북위와 전쟁을 할 때 정로장군 매라왕 사법명, 안국장군 벽중왕 찬수류, 무위장군 불중후 해례곤, 광위장군 면중후 목간나를 보내 북위 기병10만군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왕, 후 입니다. 북위를 토벌한 장군들의 이름 앞에 왕 또는 후가 붙었다는 것은 백제 천황이 이들 신하를 백제 해외 식민지를 다스리는 담로왕 또는 담로후로 임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분 말씀대로 흑치상지의 성 흑치는 검은 이빨을 뜻하는데 지금도 필리핀,인도네시아를 가면 흑치 즉 검은 이빨 부족이 있는데 그들의 이빨이 검은 이유는 먹으면 이빨이 검어지는 야자열매를 그들이 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백제의 풍속을 지닌 부족이 있어 당시 백제가 서남으로 동남아를 넘어 인도네시아 까지 백제군 아니 백제 22담로를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지요
가림토(책이름)에서 발췌
「백제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대륙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방대한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이상 계속 되는 그들의 항쟁사를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아직까지 이러한 대백제의 전통과 문화(유물 및 유적)가 중국 대륙 곳곳에 남아있으며 일본 열도에는 그러한 잔영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다만 우리가 그것을 밝히고 널리 알리지 못할 따름이다)」
참고로 백제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고 문정창 선생께서는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 이후 중국의 남조가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며 남조는 백제인의 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나라를 세운 도이 숙연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양나라를 건국했으며 양나라 이전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은 백제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령왕릉에 출토된 벽돌문화가 양나라 문화가 아닌 백제 문화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중국 25사를 연구하여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제는 당시 막강한 경제대국이었습니다.
백제는 방대한 해외식민지를 차지하여 그 곳에 담로를 설치했는데 담로를 통해 국제무역이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제는 왕도 매지권을 사야 묘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발달되었으며 담로제도를 통하여 국제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백제가 동아시아 해상을 움켜쥐어 동아시아의 국제교역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흔히들 백제에게 "내세울것은 문화밖에 없는 외소한 나라" 라고 말한다.그러나 199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된 백제사는 이제 학계에서 인정받는당당한 제국이 되었다.한반도 백제사란 그저 반토막 백제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대륙백제』에 대하여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정설로 들어난지가 꽤 지났는데도.. 말이다.『대륙백제』에 대해 말하려면 너무 많은 글이 필요하기에 간단히 설명만 하겠다. 백제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국제무대를 누비는 해상제국이었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일치하는점을 찾을수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비슷하게보고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워 여러번 이긴것처럼 백제군 또한북위와 5차례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한것이 중국 사서에 분명히 기록 되어있다. 무적 기질은 고구려에 비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국세(國勢) 또한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구당서(舊唐書)에 『西渡모모모, 比渡海모高모, 南渡海모모』라고 하 여 백제의 강통가 중국 산동절강(山東浙江) 일대까지 이르고 일본을 속국 으로 두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남제서(南濟書)에는 기원 490년에 위 (魏)가 두번이나 기병, 보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범하였다가 모두 격 퇴된 사실을 적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의 10만 이상의 군대를 쳐부 순 것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때가 처음으로 당시 백제의 강력한 무력 을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은『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 다고 하였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나라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고 하여 백제인이 날래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뛰어난건 더욱히 사실이나 백제 또한 고구려에 비해 뒤지지 않았음을.. 중국에서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대륙백제에 대한 시기와 반발이 오가지만 이미 학계에서 대륙백제를 인정했으며 대규모 사서들과 일치하는 대목을 봐서는증거가 너무나도 정확하다. 신라를 찬양하는 사람에겐 백제란 작은 국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게 된다면, 실제로 신라는 백제에 비하여 외소한 국가임을 깨닫게 되는게 사실이다. 당대 중국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높게 평가 헀지만 신라 라는 나라는 매우 낮게평가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다. 위 그림을 보면 알수 있듯이 교과서에서 나온 백제와는 전혀 틀리다. 그렇지만이것이 진정한 백제이다. 아니 이것보다 훨씬 클수도 있다. 박영규 교수님은 백제를 쇄족에 묶인 거인이라 표현하였고이도학 교수님은 백제를 동방로마제국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이외에 여러 학자들이 백제를 크기를 알수없는 거인이라 표현하였다. 이 찬란한 영광과 문명.. 이 모든것들이 하루아침에 역사가 왜곡 되어, 영광스런 제국이 잊혀져 갈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대륙백제』에 대하여 알아보라, 놀라움을 금치못해 경악을 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신라의 배신으로 축소되고 소멸된 제국.. 백제 해상제국의 영광을 이제 드러내야할때다. 이 음악이 백제의 비운과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영광스런 제국이 사료들의 제거와 왜곡되어버린 비운.. 백제는 정말 안타까운 국가이다. 때문에 백제는 잃어버린 제국이다..
<EMBED src=http://home.hanmir.com/~kris4/c.asf hidden=true loop="true" autostart="true">이의제기 내용추가 (2006-05-10 14:01 추가) 이의제기 내용보기
사실 백제의 제후국이 일본이었다는것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 백제 지방제도 명칭이었던 22담로, 담로의 지명은 중국~일본 해안가를 포함해 동남아시아 지대까지 '담로'지명이 발견이 되는것이 가장 큰 증거.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백제흔적에 비해 일본열도 내에서 백제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는다는것. 흑치국인 필리핀의 출생인 흑치상지가 백제인인데다 필리핀지대에도 "담로"지명이 발견되는것으로 보아 그곳도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중국남부에 '백제허'라는 지명이 발견되는데 그곳에서는 한국에서만 볼수 있다는 '맷돌'이 발견되었다는것. 이외에 수많은 중국사서에서 백제의 국력,백제의 영역,백제의 인구수가 76만호에 육박하는것으로 보아<고구려는 69만호, 신라는 약 20만호 추정> 등을 서술하는것으로 보아 백제는 이미 중국,동남아시아,일본을 장악한 대 제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짓입니다. 때문에 한국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일본을 백제의 영역이라고 직접적으로 서술 할 수 없이구요.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증거를 놔두고도 백제의 역사를 축소시키려는 국사계의 의도가 이해가 안가는건 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그리고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신라 또한 우리나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미워도 우리 조상이고.. 역사를 배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배운다는것에 따라.. 분명 신라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미워 할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말을 돌리자면,
현재 우리나라는 신라위주의 역사와 일본의 침략역사가 결합한 어리석은 역사임이 틀림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응당 수정,보완 하지 않는것으로 보아 국사계의 윗쪽이 썩어있으이라 짐작됩니다. 이는 분명히 우리나라에 주어진 과제이지만 우리나라는 물질주의에 만연하여 역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몇백년이 지난다 해도, 역사혁명이 일어나지 않는한 제대로 된 역사는 결국 아는 사람만 아는 가설이 되어버리고 말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