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닌거죠?

대낮에한이별2009.12.17
조회716

 

 

안녕하세요.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20세 건장한 청년입니다.

 

거의 판 눈팅만 2년 정도 된거 같네요.

감히 글을 올린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별 이야기 아닙니다.

 

단지 단지 뭐랄까.. 어린 나이에 어느정도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지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며 고통스러워하는 것 쯤은..

제 글을 읽고 어느정도 이겨내라는 그런 바램으로 올립니다.

 

 

저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주..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촌동네였습니다.

뭐 지금도 많이 시골이지만, 그래도 꽤나 발전한 듯 보이더군요.

 

저. 누님.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오순도순 살아갔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때 전 너무 어렸을때라.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어머니가 주시는 500원이란 용돈을 받으며 행복해했고,

집에 있는 레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란거.. 저와 누님만 행복했더군요.

 

알게모르게 아버지는 매일같이 친구들과 모여 약주를 하셨고,

잔뜩 취해 집에 들어와서는 저희가 알게 모르게 어머니를 때리셨더라구요.

그나마 그 당시에는 집안이 어느정도 여유가 있어,

아버지가 달라는 돈 정도는 어머니가 선뜻 드리셨는데..

나중에 되서는 아버지가 그 피같은 돈을 흥청망청 쓰시니 어머니도 지치셨나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참다 참다 결국 이혼을 결정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고, 누님은 어머니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생이별에 지금 같았으면 끝까지 반항하며, 오히려 아버지에게 대들었을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레고 장난감 사줄테니 따라오라는 말에 혹해서 따라갔습니다.

 

어머니는 경기도 어느 곳에 잠적하셨고, 저와 아버지는 천안으로 내려갔습니다.

천안에서 아버지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레고 장난감 사줄테니까, 지금 오는 아줌마한테 엄마라고 해라.'

 

하..

정말이지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습니다.

이윽고 어떤 뚱뚱한 아줌마가 조수석에 탔고, 저는 정말이지 너무 어린 탓에 가차없이 엄마라고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장난이 아니었던 겁니다.

천안에서 1년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줌마는 매일같이 어디로 놀러가고,

저는 홀로 집에 남아 학교를 빠지는 일도 부지기수 였고, 결국엔 동네 나쁜 친구와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 나쁜 친구는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줘패버리고 싶을 정도로.. 저에게 도벽을 가르쳤습니다.

 

그 친구에게 도벽을 배운 후.

아버지와 아줌마. 그리고 저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정말이지 그때가 가장 서럽고.. 고통스러웠던 때였을 겁니다. 고작.. 9살이었으니까요.

 

어미없는 자식은 강가에 내버려둔 아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저는 항상 깨재재하게 다녔고, 동네 꼬마애한테 방부제도 먹이고, 소화기 던져서 학교에서 그다지 친하지 않는 친구의 머리통을 후려치기도 했고.. 화장품 가게의 어린 아들하고 거의 2개월간 친해진 다음. 화장품 가게 부부가 저에게 아들을 맡기고 외출한 사이에 금고에 있는 돈 만원 짜리 지폐만 모조리 들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화장품 가게 부부의 남편에게 혁띠로 목을 졸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맞기도 했구요.

 

허나 그럴수록 사람이 더욱 더 악독해지는 듯 싶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오기가 생겼는지, 절대로 굴하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저를 큰집에 맡기고 어디론가로 가셨고, 큰집에서 근 2년을 살았습니다. 사촌 형 누나들에게 구박도 많이 받고, 맞기도 많이 맞고, 놀림에 창피까지.. 정말 참고 또 참았습니다. 홀로 동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기도 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해서, 어머니 집으로 보내지게 됐습니다.

마치 짐짝같죠?ㅎㅎ..

하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쓴소리를 하시며 얼른 아버지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누님은 왜 그러냐고 되려 어머니에게 뭐라했지만, 어머니는 '나는 너를 키울만한 능력이 되지 않아. 어서 가!' 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때는 원망스러웠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결코 아니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아줌마는 헤어졌고, 저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나 도둑질 안할테니까. 아빠도 엄마랑 다시 살아.'

라고 말입니다.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만한 말인가요 이것이? ㅎㅎ..

 

결국 아버지는 그 뜻을 받아들이셨고,

거의 1년간을 어머니만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와 재혼하게 되셨고, 정말이지 두 분 다 돈이 없으셨던지, 카드로 조그마한 단칸방과 이것저것 가전제품 등을 사셨습니다. 그 당시 카드빚이 어마어마하게 나왔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성능 cpu 1.5에.. ram 256.. 그래픽 카드.. 2600? 정도 되는게 200만원이었으니..

 

물론 저는 몰랐습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집에 생전 처음보는 컴퓨터가 왔다는 것도 기뻤으며, 다시금 어머니와 누님과 산다는 것도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모으셔서 작은 공업사를 하나 차리셨고,

워낙 꼼꼼하신 성격이라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저 역시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 공업사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도와주기 일수였고, 워낙 말썽쟁이라서 친구들이 많은 탓에 친구들도 데려와 그 여리디 여린 손을 보태 아버지를 도와드렸습니다.

뭐 시골 마을이라 친구들 아버지와 저희 아버지가 친구인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거의 대부분이 아는 분들이라 수입은 일정했습니다.

 

 

 

허나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일까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3월달. 저는 결국 가출 한번으로 부모님에게 환심을 사 자퇴를 결정지었고, 곧바로 주유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떄 생전 처음으로 120만원이란 큰 돈을 손에 쥐었고, 개인 스쿠터와 옷들을 사고도 돈이 남아 남은 돈은 어머니 보태라고 돈을 드렸습니다.

 

주유소와 호프집. 피시방. 식당 등 한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꾸준히 일을 했고, 결국 그해 12월 쯤 광주로 올라왔습니다.

 

광주에 누님이 대학 때문에 자취를 할 상황이라, 때마침 저도 그곳에 내려간 것입니다.

 

광주에서는 롯데마트 카트 및 주차를 비롯해서, 레스토랑, 카페, 배달, 전단지, 호프집, 식당, 세차장, 찌라시.. 아시죠? 등.. 정말이지 셀수도 없을 정도로 ..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종류의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경험이 정말이지 엄청난 보탬이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재학중이며, 내년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부모님께서는 매우 건강하시며, 정말이지 행복합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제껏 제가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도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닌게 맞는거죠?

 

저보다 더욱 더 고생하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만 굳게 다잡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상 하나쯤은 두십시요.

저의 우상은 가수 비 입니다.

춤을 잘해서? 노래를 잘해서? 잘생겨서? 결코 아닙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폭주열차와도 같은 그 근성을 저는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