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상 태양과도 같은 존재이며 거대왕국 고구려(高句麗)를 4세기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 다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태왕의 휘(諱)는 담덕(談德)이며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372년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아우이며 384년에 고국양왕(故國壤王)으로 즉위하는 이련(伊連)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2세 때인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세 때에 부왕(父王)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라 391년 연호(年號)를 영락(永樂)으로 지정하였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392년 평양에 아홉군데의 절을 세워 불교를 국교(國敎)로 공인한 숙부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정책을 계승하였고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406년에는 궁궐을 증축하고 수리하였으며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로 427년 장수태왕(長壽太王)의 평양 천도에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내치(內治)에 대한 기록은 외치(外治)에 대한 기록보다 초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태왕의 외치에 따른 업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내치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이전에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불교의 국가적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내부 정비가 이미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충분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태왕은 바로 이러한 기틀 위에서 다져진 힘을 외부로 마음껏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外治)에 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강점기 때에 항일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태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는 그후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대외정책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진정책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진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서변과 동북변, 즉 중국과 북방민족에 대한 정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에 대해서는 이 양자를 계기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진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태왕의 업적도 이에 따라 어떤 왜곡이나 편향없이 평가될 것이다.
태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高句麗)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서진(西晉)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八王의 亂'이라는 제후국 왕들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져 결국 서진은 361년에 멸망하고 이후 중국 역사상 '5호 16국(五胡十六國)',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의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전연(前燕,337~370), 전진(前秦, 350~394), 후연(後燕, 384~470), 북연(北燕, 407~436) 등의 나라가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남연(南燕,398~410) 서연(西燕,384~394) 서연(前凉,317~376) 후양(後凉,386~403) 남양(南凉,397~414) 북양(北凉,401~414) 서양(西凉,400~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태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에서 영락(永樂) 5년[395년] 거란족(契丹族) 정벌과 영락(永樂) 17년 후연(後燕) 공략을 찾을수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수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남변정책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즉위 당시 주로 백제(百濟)를 상대로 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 왜(倭)와 신라(新羅)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정책의 주된 대상은 백제(百濟)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倭)와 신라(新羅)가 얽혀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은 371년에 정예병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했다. 고구려의 남변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에 든 가시와도 같았다. 비문에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하고, 왜(倭)를 왜구(倭寇)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했던 수모를 반드시 갚겠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한편 백제(百濟)는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도 왜(倭)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를 압박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왕은 5만 군사를 파견하여 왜구를 격퇴시키도록 했다. 396년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구를 크게 격퇴시켜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도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대에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蓋鹵王)이 살해되는 승전(勝戰)의 원동력이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세워질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마치 왜(倭)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호태왕비(好太王碑)는 고구려의 강성함과 태왕의 업적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왜(倭)의 공적비(功積碑)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倭)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정책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즉위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원정책(對中原政策)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간의 통합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쳐 항복하고 고구려에 귀순함으로써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태왕의 대외정책은 서변, 남변,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전쟁에서의 용병술과 정복지역에 대한 통치방법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제왕이었다. 병법에 의하면 장수가 선봉에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먼저 이르면 모든 병사는 더 없이 막강하여진다고 했지만 태왕이야말로 이러한 병법을 실천에 옮긴 명장이었다. 친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간 태왕은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렀을 때도 피하라는 부하 장수들의 권유도 물리치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해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수가 적은 정예병력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하곤 했는데, 그의 전격전(電擊戰) 모습은 구천지상(九天之上)에서 벼락치듯 했다고 한다. 솔선수범하여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지휘관의 참모습을 그는 실천에 옮긴 장수였던 것이다.
태왕이 주변 국가와 변방의 이민족을 정복한 후 피정복지역에 대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 신라는 복속을 맹세받은 후 신라 체제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新羅)는 고구려의 신국(臣國)으로 전락한 점만 제외하고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 동해안 분국의 백제 장군들과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眞)과 13명의 태수들은 종전의 직위와 직책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방식은 복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고구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쉽게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遼西)와 중국 동해안 지방을 번갈아 가며 영유한 것도 요서와 중국 동해안 지방에 있는 예전의 백제 장수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태왕은 재위 초년인 392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같은 해 9월에 훗날 후연(後燕)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거란(契丹)을 정벌했으며 395년에는 상장군 모두루(牟頭婁)를 보내어 숙신(肅愼)을 정벌하도록 했다. 396년에는 수륙양공작전(水陸兩攻作戰)으로 백제의 58개 성을 쳐부수고 아신왕(阿辛王)의 항복을 받아 백제 왕족과 대신 수십명을 불모로 삼았다. 398년 북위(北魏)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대군을 파견하여 토욕혼(吐谷渾)을 정복하고 북위의 진로를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차단하였다. 399년에 백제가 왜(倭)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태왕은 친히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구를 격파하고 가야마저 정벌하였다. 태왕은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야(伽倻), 왜(倭)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對馬島)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두고 이들 4개국을 통제하였다. 400년에 유성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眞)과 13군 태수들을 귀속시킴으로써 고구려가 요서지방과 유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402년에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의 후연 영역을 빼앗아 후연을 고립시켰고 407년에는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쿠데타로 무너진 후연에 이어 건국된 북연을 위성국(衛星國)으로 삼았다. 410년에 마지막으로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외정벌전(對外征伐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만주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장악한 태왕은 마지막으로 중원대륙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북위를 공격하기 위한 전쟁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고구려의 정복전쟁은 여기에서 종결되었다.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통치력으로 대륙을 풍미했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그는 프랑크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왕(Charlemagne 大王),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大王), 고대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Marcus U 皇帝)보다 더 위대한 통치자였으며 불세출(不世出)의 대지존(大至尊)으로 한민족사(韓民族史)에 영원히 남을 영웅이다.
고구려(高句麗)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대외정벌전(對外征伐戰)
우리 민족의 역사상 태양과도 같은 존재이며 거대왕국 고구려(高句麗)를 4세기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전시킨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 다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태왕의 휘(諱)는 담덕(談德)이며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372년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아우이며 384년에 고국양왕(故國壤王)으로 즉위하는 이련(伊連)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2세 때인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세 때에 부왕(父王)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라 391년 연호(年號)를 영락(永樂)으로 지정하였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392년 평양에 아홉군데의 절을 세워 불교를 국교(國敎)로 공인한 숙부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정책을 계승하였고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406년에는 궁궐을 증축하고 수리하였으며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로 427년 장수태왕(長壽太王)의 평양 천도에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내치(內治)에 대한 기록은 외치(外治)에 대한 기록보다 초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태왕의 외치에 따른 업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내치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이전에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불교의 국가적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내부 정비가 이미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충분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태왕은 바로 이러한 기틀 위에서 다져진 힘을 외부로 마음껏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外治)에 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강점기 때에 항일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태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는 그후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대외정책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진정책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진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서변과 동북변, 즉 중국과 북방민족에 대한 정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외치에 대해서는 이 양자를 계기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진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태왕의 업적도 이에 따라 어떤 왜곡이나 편향없이 평가될 것이다.
태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高句麗)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서진(西晉)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八王의 亂'이라는 제후국 왕들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져 결국 서진은 361년에 멸망하고 이후 중국 역사상 '5호 16국(五胡十六國)',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의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전연(前燕,337~370), 전진(前秦, 350~394), 후연(後燕, 384~470), 북연(北燕, 407~436) 등의 나라가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남연(南燕,398~410) 서연(西燕,384~394) 서연(前凉,317~376) 후양(後凉,386~403) 남양(南凉,397~414) 북양(北凉,401~414) 서양(西凉,400~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태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에서 영락(永樂) 5년[395년] 거란족(契丹族) 정벌과 영락(永樂) 17년 후연(後燕) 공략을 찾을수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수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남변정책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즉위 당시 주로 백제(百濟)를 상대로 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 왜(倭)와 신라(新羅)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정책의 주된 대상은 백제(百濟)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倭)와 신라(新羅)가 얽혀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은 371년에 정예병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했다. 고구려의 남변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에 든 가시와도 같았다. 비문에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하고, 왜(倭)를 왜구(倭寇)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했던 수모를 반드시 갚겠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한편 백제(百濟)는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도 왜(倭)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를 압박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왕은 5만 군사를 파견하여 왜구를 격퇴시키도록 했다. 396년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구를 크게 격퇴시켜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도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대에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蓋鹵王)이 살해되는 승전(勝戰)의 원동력이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세워질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마치 왜(倭)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호태왕비(好太王碑)는 고구려의 강성함과 태왕의 업적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왜(倭)의 공적비(功積碑)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倭)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정책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즉위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원정책(對中原政策)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간의 통합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쳐 항복하고 고구려에 귀순함으로써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태왕의 대외정책은 서변, 남변,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전쟁에서의 용병술과 정복지역에 대한 통치방법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제왕이었다. 병법에 의하면 장수가 선봉에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먼저 이르면 모든 병사는 더 없이 막강하여진다고 했지만 태왕이야말로 이러한 병법을 실천에 옮긴 명장이었다. 친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간 태왕은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렀을 때도 피하라는 부하 장수들의 권유도 물리치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해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수가 적은 정예병력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하곤 했는데, 그의 전격전(電擊戰) 모습은 구천지상(九天之上)에서 벼락치듯 했다고 한다. 솔선수범하여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지휘관의 참모습을 그는 실천에 옮긴 장수였던 것이다.
태왕이 주변 국가와 변방의 이민족을 정복한 후 피정복지역에 대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 신라는 복속을 맹세받은 후 신라 체제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新羅)는 고구려의 신국(臣國)으로 전락한 점만 제외하고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 동해안 분국의 백제 장군들과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眞)과 13명의 태수들은 종전의 직위와 직책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방식은 복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고구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쉽게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遼西)와 중국 동해안 지방을 번갈아 가며 영유한 것도 요서와 중국 동해안 지방에 있는 예전의 백제 장수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태왕은 재위 초년인 392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같은 해 9월에 훗날 후연(後燕)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거란(契丹)을 정벌했으며 395년에는 상장군 모두루(牟頭婁)를 보내어 숙신(肅愼)을 정벌하도록 했다. 396년에는 수륙양공작전(水陸兩攻作戰)으로 백제의 58개 성을 쳐부수고 아신왕(阿辛王)의 항복을 받아 백제 왕족과 대신 수십명을 불모로 삼았다. 398년 북위(北魏)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대군을 파견하여 토욕혼(吐谷渾)을 정복하고 북위의 진로를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차단하였다. 399년에 백제가 왜(倭)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태왕은 친히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구를 격파하고 가야마저 정벌하였다. 태왕은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야(伽倻), 왜(倭)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對馬島)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두고 이들 4개국을 통제하였다. 400년에 유성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眞)과 13군 태수들을 귀속시킴으로써 고구려가 요서지방과 유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402년에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의 후연 영역을 빼앗아 후연을 고립시켰고 407년에는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쿠데타로 무너진 후연에 이어 건국된 북연을 위성국(衛星國)으로 삼았다. 410년에 마지막으로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외정벌전(對外征伐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만주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장악한 태왕은 마지막으로 중원대륙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북위를 공격하기 위한 전쟁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고구려의 정복전쟁은 여기에서 종결되었다.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통치력으로 대륙을 풍미했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그는 프랑크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왕(Charlemagne 大王),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大王), 고대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Marcus U 皇帝)보다 더 위대한 통치자였으며 불세출(不世出)의 대지존(大至尊)으로 한민족사(韓民族史)에 영원히 남을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