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투병수기 『의지의 청년 새봄이야기』

. 20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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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투병수기

 

 

『의지의 청년 새봄 이야기』

 

 

 

 

 

 

 

 

 

 

무명 댄스가수에서 벤처회사 부사장이 되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했던 10대와 20대 시절.

(1997년 ~ 2007년)

 

 

스물아홉 살 운영이가 꾸었던 꿈.

 

뒤돌아 보면 무명의 신인가수부터 조그마한 벤처회사의 부사장이 되기까지

모질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었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호하고, 남들보다 좀더 빨리 정상에 오르고 싶어

검증되지 않은 지름길만을 찾다 보니 수많은 좌절과 실패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 막았고, 난 내 앞에 있는 난관에 힘이 겨워 결국은 이리저리 도망

만을 다녔다. 그 결과 불필요한 경력들이 나를 대변 해는 듯 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술은 나를 위로해주기 보다는 타락에 늪으로 이끌었으며,

결국 책임감 없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낙인 찍힌 채 소중한 20대를 떠나 보내야만

했다.

20대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바닥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친척 형이 있는 인천의 영흥도로 향했다.

건설현장에서 건설장비를 운영하고 있는 친척 형의 도움으로 장비기사 보조로

일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건설 현장에서 숙식을 하며, 한 달에 2박3일밖에 쉬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열심히 기술을 습득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내 기반을 다지겠다고 굳건히

다짐을 한 나였었다.

현장에 도착하고 첫 아침이 밝았다.

2007년 12월의 인천의 아침바람은 엄청나게 매섭고 얼얼했다. 바다 바람에 몸

이 날라갈 정도였지만 그 정도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정신은 이미 번쩍였

다.

내가 배웠던 일은 바다 위에 다리를 건설하는데, 다리 기둥을 바다 바닥에 심기

위해서 구멍을 내는 작업이었다. 한겨울에 바다 위에 임시 작업대를 설치하고

일을 했어야 했다.

매서운 바다 바람에 얼굴은 갈라지고 손발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훗날 내게 펼

쳐질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힘든 하루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고된 삶도 잠시였다….     

 

 

 

 

 

 

 

 

 

 

 

                                

 

급격히 불어난 체중과 침침해진 시력.

결국 몸 밖으로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2007년 12월)

 

내게 찾아온 참혹한 불행.

 

체중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고, 1.5의 시력을 가지고 있던 나의 시력은 0.4까

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한 달에 한번 있는 휴가 때 집 근처의 안과에 들리게 되었는데,,,,,

포도막염. 자칫 실명이 될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라고 했다. 그리고 젊은 사람에

게서 양쪽의 망막이 출혈되기는 흔치 않은 일이라며 몸의 면역성이 무너졌을 것

이라며 다른 질환을 의심하였다. 그 질환은 바로 에이즈였다.

의사는 바로 상위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으며, 난 바로 다음날

영등포의 김 안과를 찾아가게 되었다. 조형제를 투입하여 망막검사를 하고 이어진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등등.

일단 그곳에서도 의심은 여전히 에이즈를 의심했는데, 혈액검사 결과 에이즈는

아니라고 나왔다.

난 속으로 안심을 했지만, 병원 측에서는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추후 진료

일자를 예약했지만, 난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간단한 안약만 처방을

받고 다시 고된 현장 속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난 안약을 처방 받기 위해 처음 진료를 받았던 집 근처의 안과로 향했는데, 뜻밖

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곳의

추천으로 김 안과에서 검사를 받았던 것인데, 그곳으로부터 회신이 왔다고 한다.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역시 망막검사와 혈액검사를 했고, 혈액검사는 응급실에서 했는데, 정

확한 결과는 다음날이나 나온다는 것이었다. 대략 4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난 상

태였는데, 다행히 그때까지는 검사결과가 정상이라고 일간 귀가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 최종 결과는 외래진료를 잡아서 받아보자고 한다. 그래서 짧은 휴가로

찾은 나는 다시 일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집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술자리

(2008년 1월)

 

 

급성 골수구성 백혈병  M3.

 

내 혈액 속에 암세포가 검사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는 나를 돌려보낼 수 없다고,,,,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골수검사까지 해야 한다고 한다. 그날부터 나의

기나긴 병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주말이었던 그때 월요일 아침에 골수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난 이틀 밤을 응

급실에서 보내야 했는데, 응급실애는 어찌나 환자들이 많은지 나와 가족들은 병

원 복도의 의자에서 이틀을 보내야만 했다.

이틀을 기다리는 동안 문득 먹고 싶어지는 음식들이 있었다. 직감이었을까? 앞

으로는 이런 음식들을 먹이 못할것

같은 불길한 기분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고 부모님과 누나는 음식을 가지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아 허겁지겁 먹어댔다. 그리고 담배가 생각이 났다. 하루

에 두 갑씩 담배를 폈던 골초였던 나였기에 ,,,,하지만 담배만큼은 필수가 없었

다.

그저 눈물만이 담배 갑 위로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드디어 월요일이 찾아왔다.

검사직전 응급실에 자리가 나왔고, 처음으로 환자복을 입어본 나였다. 역시 응

급실은 다급했다. 여기저기서 의사와 간호사를 찾는 소리들과 환자들은 거친 숨

소리들,,,, 나 역시 사뭇 두려움이 들여워져 왔다. 그렇게 두려움도 잠시 하얀 가

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왔다. 간단하게 골수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는 바로

시작을 하려는 듯 했다.

옆에 계신 아버지가 보인다.

“저 선생님,,,아버지 나가시면 할께요…”

비록 내 몸에는 주사바늘이 꼽히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에는 대못

이 박히는 고통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받는 골수검사였고, 이후로 난 총 5번의 골수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항암치료를  앞둔 모습.

(2008년 7월)

 

3번의 항암치료와 조혈모 세포이식.

 

M3…가장 예우가 좋은 분류이기 때문에 약물치료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은 쉽게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를 않았다. 1차 항암의 실패. 70

~80%는 1차 항암치료(관해유도 - 암세포를 제거하는 항암치료법)만으로 효

과를 본다는데, 나는 위험 군에 속한다는 의료진의 대답이었다.

결국 절망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친구들이 건네준 몇 권의 책들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는 문구가 있었다.

바로 “ 절실히 상상하라! 그러면 어느덧 현실이 되어있을 것이다.”

바로 긍정의 법칙이라는 방법이었다. 매일을 절실히 생생하게 꿈을 꾸고 상상한

다면 현실이 된다는 뜻이었다.

매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날 저녁부터 매일 밤을 절실히 상상했고, 다짐했다.

“내 몸의 암세포는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다 없어진다…”

주문이었을까? 그렇게 몇 일 지나고 두번째 항암치료를 했다. 두번째 항암치료

는 항암에 대한 부작용도 심하지 않았고, 열이 심하게 나고 두통이 매우 심했던

첫번째 항암치료보다 수월하게 끝낼 수가 있었다. 이윽고 의료진으로

부터 희소식이 들려왔다. 암세포 제거율 0%. 관해 유도가 정석대로 이루어 졌다

는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나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골수 공여자들이 국내에 200

여명이나 넘게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고요법만 끝나고 바로 이식

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식 기간이 길러질수록 입원 기간도 길어지고, 상태를 유지하는 항암치료도 계

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난 이식을 받는  기간 동안에도 절실히 상상했다.

뚜벅뚜벅 병원을 걸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건강한 나의 모습을,,,

결국 그 어렵다는 조혈모세포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고, 절실한 상상을 한지

몇 일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 인생에서 흘릴 모든 눈물일 정

도였으니,,,  

 

 

 

 

 

 

 

 

 

 

 

 

 

 

                                                                     

 

조혈모 세포 이식 후 모습.

(2008년 10월)

 

조혈모 세포 이식 후

 

집에 도착하자 마자 너무나 배가 고팠던 나는 우동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누나

가 인스턴트 우동을 사와서 끓여 줬는데, 그리 매운맛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

무나 매워서 먹지를 못했다. 배는 고픈데 매워서 먹지를 못한 나는 괜시리 가족

들에게 짜증만 부리고 다시 어머님이 닭 백숙을 해주셨는데, 얼마 먹지도 못했

다.

항암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식 전에 받은 항암은 이전의 항암보다 무려 7배나 독한 항암이었다. 결국 부

작용으로 입안이 헐고 위장이 뒤집

어진 것이었다. 병원에서도 밥이나 죽도 넘길 수가 없어서 음료로 대체된 영양

식만 먹으며 버텨왔었다. 난 집으로 돌아오면 밥을 먹울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

지만, 여전히 식사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매일 아침을 물에 밥을 말거나 국에 밥을 말아먹어야만 했다. 밥 냄새 때문에 구

역질이 나고 속이 거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달 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나는 조금씩 밥을 씹어서 삼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식한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면역억제제의 복용과 이식편

대 숙주반응이다. 다른 사람의 세포를 내 몸에 강제적으로 주입 시켰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면역억제제를 복용을 해야 하는 것이고,

타인의 세포가 내 몸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내 장기등을 공격하는 현상을 이

식편대 숙주반응 이라고 한다. 이 이식편대 숙주반응이 가장 위험한 고비인 것

이다.

나 역시 이식을 받고 두달이 지나고 갑자기 호흡곤란이 온 적이 있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서 그 자리에 선채로 숨을 고르고 다시 걸어야만 했었다.

병원에서 심폐기능을 검사한 결과 정상 수치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 원

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식편대 숙주반을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흡입하는 스테로이드를 처방 받고 착실히 약을 복용했다. 그렇게 한달

정도가 지나자 조금씩 좋아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병원 측에서는 아주 살짝 숙주반응이 왔다가 지나가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바

로 네게 그런 행운이 있었나 보다.   

 

 

 

 

 

 

 

 

 

 

 

                                                              

운동으로 회복하는 모습.

(2008년 11월 ~ 2009년 2월)

걷기에서 부터 등산까지

 

 식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지자 조금씩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5분 정도만 걸어도 발목과 무릎 등이 쑤시고 아파왔다. 그래서 혹시나 이상이

있는지 병원을 갔는데, 한번 어디가 이상이 있어서 병원을 갈 때마다 난 각종 검

사를 다 해야만 했다. 그렇다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검사를 마치고 나면 내 몸은 지극히 정상

이었다.

결국 오랜 병원생활이 나에게 남기고 간 흔적들이었다.

그래서 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운동을 했다. 처음에는 안방

과 내방을 오가며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5분, 그 다음날에는 10분 이렇게 해서 매일 매일 조금씩 운동시간을

늘려나갔다. 매일 집에서만 돌아다니니 지겹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서 운동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는 나는 완전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니 원래는 나가면 안됐지만 난 완전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 걷기를 시작했

다. 감염의 위험을 있기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서 걷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있는 산책로를 사람들이 제일 한적한 시간을 골라 30분씩 걷다가 결

국 1시간씩 걸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관절이 튼튼해진 나는 산으로 장소를 옮

겼다.

아무래도 좋은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산책로에

서 산으로 장소를 바꾼 것이다. 산도 처음에는 15분 거리를 올라가고, 조금씩

거리를 늘려서 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좋은 공기를 마셔가며 등산을 하니 몸이 한결 더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

이었고, 조용한 약수터에 앉아 나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그곳에서 앞

으로의 계획과 다짐을 하고 기분 좋은 상상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등산

을 시작한지 3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덧 항암부작용으로 대머리였던 내 머

리는 검은 머리로 색깔을 달리 하고 있었고, 다리에도 조금씩 근육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회복하는 모습.

(2009년 3월 ~ 2009년 7월)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걷기부터 시작해서 등산까지 자신감이 생긴 나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나의 의지를 표출하고 싶었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제 2의 인생

을 살게 된 나의 모습과 나의 의지를,,,,

운동에 탄력을 받은 나는 일반인들이 꿈꾸는 몸짱을 목표로 열심히 운동에 매진

했다. 정기 외래를 다니면서 수치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담당 교수님께

운동 허락을 받자마자 나는 바로 집 근처 헬스장을 끊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체지방 검사를 하니 무려 체지방율이 35%나 나왔다. 체중은 키에 비해 정

상이지만 체지방율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바로 마른 비만의 체질이라고 한다.

난 그때부터 식이요법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해 나가면서 체지방율을 줄여나가

기 시작했다.

이식 후 1년 정도는 회복의 기간으로 잡아야 했었다. 그래서 회복하는 기간 동

안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하던 나는 이침 운동 후 공인중개사 공부, 점심을

먹고 오후 운동 후 공부, 또 저녁을 먹고 저녁 운동 후 공부, 이렇게 꽉찬 스케줄

을 만들어서 매일 매일 내가 상상하는 밝은 미래에 한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생활했다.

그렇게 무려 5개월여 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나의 모습은,,,, 일반인들도 만들기 힘들다는 몸짱에 가까운 몸을 만

들었고, 공인 중개사 시험도 알차게 준비를 해왔다. 2009년 10월이면 나의 노

력에 대한 검증을 받는 시간이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3개월 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있다. 앞으로도 지금 해온 것처

럼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절실히 상상하면 이루질것이다…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상상한다.

아직도 내겐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으며, 나의 인생은 내가 만

들어가야 하기 떄문이다.

오늘의 설레임과 기분 좋은 상상이 나의 밝은 미래를 만든다…

 

 

 

 

 

 

 

 

 

 

 

 

 

 

                                                            

 

 

현재 모습.

(2010년 1월)

 

나의 바램.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공부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선배들에게 끌려가 이유 없이 맞으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이등병으로 돌아가 80명의 고참의 심부름을 들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먼지 나는 공사판 현장으로 돌아가 쇳가루를 마셔가며,

일당을 받아 하루 하루를 살아가라고 하면, 무조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남들보다 더 늦게 자고,

남들보다 더 적게 먹으라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머리 벗겨지고, 아랫배 뚱뚱한 X같은 직장상사의 드럽게 튀기는 침을 맞아가며,

결재를 받으라고 하면 매일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들이 곤드레 만드레 취하고 있을 때도,열심히 일만 하라 하면 그렇게 하겠습

니다.

평생을 수습사원으로만 살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이며,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는 지하 단칸방이 보금자리라면, 평생을 그곳에서 살겠습

니다.

절대로 월급이 적다고, 직장상사가 엿 같다고, 애인하고 싸웠다고, 옆 사람이 짜

증난다고, 음식이 맛없다고,

못생겼다고, 못살겠다고, 내가 못났다고, 니가 못났다고,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

고, 투덜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젠

건강하게만 해주세요.....

 

 

 

 

 

 

 

 

 

 

저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긍정의 마인드로

불가능에 도전을 해서

세상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전달해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