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머리에 수건을 덮어쓰고…, 나를 알던 사람을 만날까 겁이 났어요. 내 과거 정체를 알면 '여기서 못 살고 또 이사를 가야 한다'고 여겼죠. 남들은 광복절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때, 나는 방 속에서 울며불며 보냈어요."
눈물 대신, 길원옥(82)씨는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지난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900번째 열렸을 때, 모자와 목도리로 둘둘 감싼 채 시위의 맨 앞 열에 있었던 '할머니 투사'가 말이다.
"해방된 뒤로 나는 화장품을 사본 적이 없어요. 해방이 됐다고 남들은 '희망'이 어떻고 했지만 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날그날 숨 쉬며 살아가는 게 더 급했어요."
그녀는 왜소했고 얼굴과 목에는 검버섯이 많았다. 응접실 바닥에 마주앉아 있었다. 서울 충정로의 언덕배기 길에 있는 이 집은 '정신대(挺身隊)문제대책협의회'가 운영하는 쉼터다. 그녀 말고 두 명의 할머니가 더 숙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들이 알까 봐 감추고 살았는데 어떻게 알려진 거죠?
"십몇 년 전 어느 날 아들 부부와 텔레비전을 보니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나와요. '드러누워 제 얼굴에 침 뱉기지, 나이 들어서 저렇게 철없는 짓들을 하나, 정작 원통해 할 사람은 말 안 하고 있는데…' 혼자 중얼거렸지요. 우리 며느리가 좀 약거든요. 그 말을 듣고 눈치를 챘어요. 이제껏 살았으면 됐지 뭘 더 감추고 있겠나 싶어 말했어요. 말하는 저도 힘들었는데 듣는 아들은 더 놀랐겠죠. 내가 결혼을 못해 서른 무렵에 입양한 아들이었어요.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와 못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길거리에서 온갖 장사를 해 대학교·대학원을 다 보냈어요. 시방 그 아들이 쉰둘이고 인천에서 목사로 일하죠."
―가족끼리만 아는 걸 떠나 어쩌다가 '수요시위'에도 앞장서게 됐지요?
"며느리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우리 어머니가 이런데 지금껏 감추며 살고 계신다'고 알렸어요. 정대협에서 몇 번이나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위안부끼리는 서로 말이 통하니 한번 나와보라. 같이 놀면서 응어리도 풀어라.' 그렇게 시작된 거죠. 젊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나 했죠. 2002년부터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수요시위에 나갔지요."
―대중 앞에 자신의 과거와 얼굴을 내놓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닐 겁니다.
"팔십 구십을 먹어도 여자는 여잔데…, 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그런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고, 나라를 빼앗긴 한국 정부지, 결코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이제는 누가 나보고 '위안부'라고 해도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실상을 그대로 다 알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결코 우리처럼 당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주 건조하게 질문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녀는 씩씩하게 답변했다. "다 물어보세요. 역사의 사실을 그대로 알릴 수 있다면야 내가 고맙죠."
―어떻게 해서 '일본군 위안부'로 가게 됐나요?
"우리 나이로 열세살이었으니, 꼭 70년 전이죠. 평양에서 고물상 하던 아버지가 장물을 잘못 사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러니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웠죠. 내 위로 오빠 둘, 언니 하나, 밑으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죠. 그 시절 내가 학교를 다녔는지 기억이 안 나요. 입학했어도 오래 다닐 처지는 아니었겠죠. 하루는 친구집에 가니 여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떤 여자가 '저 사람(일본인)을 따라가면 공장에 가서 돈도 벌고 기술도 익힌다'고 했어요. 뒷전에서 듣던 내가 혹했어요. 하지만 나는 조그마했으니까 상대를 안 해줬어요. '넌 아직 어려서 안 돼.' 난 마음이 달아 '나도 가면 잘할 수 있어요. 나도 갈게요' 하며 그 길로 쫓아나섰나 봐요."
―집에도 말을 안 하고?
"막바로 간 거죠. 옷도 갈아입지 않고. (한숨 쉬며) 쫓아갈 때까진 좋았죠."
―어떻게 갔지요?
"세월이 너무 오래돼 모든 게 흐릿해요. 기차를 타고 간 것 같아요. 같은 동네 여자들 서넛 명과 함께 탔어요. 가다 보니까 한 명씩 한 명씩 빠졌어요. 소변 보러 갔나며 기다려도 안 왔어요. 나중에는 나 혼자가 됐어요."
―집에서 멀리 떨어져 기차 타고 가는데 겁이 안 났어요?
"겁이 났으니까 중간에 '나 집에 보내달라'고 했겠지요. 동행한 사람은 일본인이었지요. '너 떠들면 혼나. 좋은 데 가는데 가만히 있어야지.' 또 뭐라고 말했지만 일본말을 죄다 알아들을 리가 없었죠."
―도착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기차를 무척 오래 탔어요. 어디인지는 모르죠. 기차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들어갔는데, 일반 사람은 보려야 볼 수가 없었어요. 사실은 주위를 살피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서우니까 자꾸 '집에 보내달라'며 울기만 했어요. 어느 집으로 들어가니 여자들이 열명 남짓 옹기종기 앉아있었어요. '이 많은 여자들이 이 무서운 데를 왜 와 있었나'고 생각했어요. 그날 밤 똑똑히 기억나는 건, 내가 훌쩍거리고 있는데 시금칫국과 쌀밥을 줬다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는 쌀밥을 못 먹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무서워 그걸 먹지 못했어요."
―그 집은 일본 군부대 안에 있었습니까?
"모르겠어요.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국인 할머니가 관리자였어요. 말 안 들으면 머리끄덩이를 잡고서 사납게 팼지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일본군을 받았죠. 나는 안 벗으려고 속옷을 거머쥐고 버텼어요. 그 부위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죠. 그곳에 간 것은 첫 생리를 하기 전이었어요. 나중에 생리를 했을 때, 나쁜 군인들이 내 몸을 잘못 건드려 속이 고장나 피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무서워서 방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머리를 숙여 "시방도 정수리 쪽에 상처가 있을것" 이라고 말했다. 나는 흰머리 숱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한번은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려다가 내가 말을 안 듣자 칼집으로 때렸어요. 그때 죽었더라면 더 좋았죠. 얼마 안 돼 성병이 옮았어요. 약을 써도 안 나아 수술까지 받았는데, 나팔관을 건드려 아이를 못 낳게 할 줄 몰랐어요. 상처가 덧나 걸음을 잘 못 걸었죠. 그렇게 쓸모가 없으니까 일본인을 딸려 내보내줬어요. 우리 동네 근처까지 데려주고는 그 사람은 사라졌어요. 집에 와 큰오라버니한테 매를 많이 맞았죠. 엄마에게만 사정을 말했어요."
―그때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위안소'로부터 돈을 받았나요?
"전혀 없었어요. 집에 있으면서 '육백육'이라는 주사약을 맞고서 많이 회복됐어요. 그 뒤 평양 시내에 있는 일본 부대 안으로 청소 일을 하러 다녔어요. 아침 일찍 부대 앞에 줄을 서면 필요한 수만큼 안으로 들여보냈어요. 어느 날 등 뒤에서 누군가가 '하나코(花子)!' 하고 불렀어요, 위안소에서만 그렇게 불렀지, 동네에서는 이 이름을 알지 못해요. 돌아보고는 놀라 주저앉을 뻔했어요. 나를 데려다 준 그 일본 남자였어요. 내 팔꿈치를 끼고는 기차에 태워 중국 본토로 데려갔어요."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기차 안에서 압록강 철교를 넘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역에 내려 차를 타고 갔어요. 집은 일자(一字)였는데 방이 쭉 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우리는 각자 방에서 자면서 일본 군인을 받았어요. 밥 먹을 때만 한가운데 방에 함께 모여 먹었어요."
―같은 처지의 여인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요?
"눈 뜨면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서로 놀 사이가 있나요. 밥 먹을 때도 딴소리 하면 관리인이 야단을 쳤어요. 욕조에서 함께 씻을 때만 속에 있던 말을 한 것 같아요. 난 '울보'로 불렸어요. 겁 많고 잘 울었으니까요. 일본군 중에도 착한 사람은 착하잖아요. 내가 어리니까 불쌍하게 보고 일본글을 알려주고, 우리 집 주소로 내 편지를 부쳐주기도 했어요. 고향 집과 편지 왕래가 됐지만 '난 잘 있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라'고만 하고, 딴소리는 못 해봤죠."
―찾아와서 나를 구해달라고 왜 하지 않았죠?
"소용없는 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바보처럼 살자고 했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고, 그 뒤에 돌아가셨다는 통보가 왔죠."
―햇수 계산을 해보면 위안소에서 약 4년을 지낸 것 같은데, 바깥 외출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딱 두 번 노래자랑에 나간 것 같아요. 내가 노래를 잘 불렀어요. 차를 타고 가서 일본 노래를 불렀는데, 어디였는지 기억은 안 나요. 늘 방 속에서만 지냈던 것 같아요."
―위안소 내 마당이나 근처에는 나가봤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거기가 사람 사는 곳이었겠지요."
―어떻게 그 생활이 끝났나요?
"그때는 해방된 줄 몰랐어요. 일본 군인도 안 오고 관리인도 사라졌어요. 우리 여자들만 남았는데, 먹을 식량이 며칠 분밖에 없잖아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간 거예요. 언니들이 바깥에 나가 쌀을 구해와 먹었어요.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갈 줄도 몰랐어요.
어느 날 무력하게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데, 행인들이 '빨리 가야 해, 이 배 못 타면 고향에 못 가' 하는 우리 말이 들렸어요. 딴소리는 아무것도 안 들려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집 밖으로 나와 그 사람들 뒤를 쫓아갔어요. 그렇게 해서 줄서서 배를 탔어요. 표 검사도 안 했어요. 어느 항구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배는 인천에 도착했어요. 배에서 내리니 돈 300원인지 3000원인지 주고 주먹밥 하나를 줬어요. 그리고 모두 차에 태워 장충단공원에 내려줬어요. 거기서 흩어졌어요. 나는 입던 옷이 전부였으니,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죠. 평양 집으로 갈 자신이 없었어요. 이 주제로 가느니 좀 돈을 벌어서 옷을 갈아입고 노비를 마련해서 가야지 생각했죠, 처음에는 술집에서 노래 품을 파는 접대부로 살았죠. 그런데 38선이 가로막혔어요. 이런 얘기는 몇 달을 해도 다 못하고 책을 몇 권 써도 다 못하니, 그냥 그만 하세요."
하지만 나는 건조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그 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내게는 아무 피붙이가 없었죠. 접대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장사를 시작했죠. 과일·옷·계란·번데기…, 안 한 것 없이 다 했어요. 남에게 아쉬운 소릴 하지 않고 살아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남한테 피해를 끼치고 그걸 못 갚고 아파서 죽으면 안 된다 싶어 그날그날 열심히 했죠. 어떻든 당장 살아남는 게 중요했어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과거를 잊고서 좋은 남자를 만나 새 출발해 보자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내 몸은 안 아픈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성병의 뿌리도 안 빠졌죠. 아픈 몸을 갖고 무슨 결혼 생활을 해요. 상대를 망치는 거죠. 그럴 수는 없어요. 나만이 그런 게 아니고 위안부 열이면 아홉 사람은 다 그래요. 나는 이미 망가졌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와도 냉담했죠. 그러다가 서른 무렵에 우리 아들을 입양했어요."
―살아오면서 어떤 기억이 가장 생생합니까?
"내가 누굴 욕하고 미워하는 걸 싫어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잊혀지지 않아요. 13세 때 '공장에 가면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운다'고 말한 그 여자가 꿈에 가장 많이 나와요. 내가 죽어서도 무덤 안까지 갖고 가려나 봐요. 여태 그 여자는 살아있을까요."
'수요시위'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때 애도를 표하기 위해 한번 쉬고는 빠짐없이 열렸다. 햇수로 18년째 계속 되는 중이다. '등록'된 234명의 위안부 할머니 수는 87명으로 줄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해방 후 다들 ‘희망’을 얘기했지만, 난 화장품 한번 산 적 없어”
조선 닷컴 최보식 선임기자 에 글을 퍼온건데요... 한번쯤 읽어주세요...
"항상 머리에 수건을 덮어쓰고…, 나를 알던 사람을 만날까 겁이 났어요. 내 과거 정체를 알면 '여기서 못 살고 또 이사를 가야 한다'고 여겼죠. 남들은 광복절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때, 나는 방 속에서 울며불며 보냈어요."
눈물 대신, 길원옥(82)씨는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지난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900번째 열렸을 때, 모자와 목도리로 둘둘 감싼 채 시위의 맨 앞 열에 있었던 '할머니 투사'가 말이다.
"해방된 뒤로 나는 화장품을 사본 적이 없어요. 해방이 됐다고 남들은 '희망'이 어떻고 했지만 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날그날 숨 쉬며 살아가는 게 더 급했어요."
그녀는 왜소했고 얼굴과 목에는 검버섯이 많았다. 응접실 바닥에 마주앉아 있었다. 서울 충정로의 언덕배기 길에 있는 이 집은 '정신대(挺身隊)문제대책협의회'가 운영하는 쉼터다. 그녀 말고 두 명의 할머니가 더 숙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들이 알까 봐 감추고 살았는데 어떻게 알려진 거죠?
"십몇 년 전 어느 날 아들 부부와 텔레비전을 보니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나와요. '드러누워 제 얼굴에 침 뱉기지, 나이 들어서 저렇게 철없는 짓들을 하나, 정작 원통해 할 사람은 말 안 하고 있는데…' 혼자 중얼거렸지요. 우리 며느리가 좀 약거든요. 그 말을 듣고 눈치를 챘어요. 이제껏 살았으면 됐지 뭘 더 감추고 있겠나 싶어 말했어요. 말하는 저도 힘들었는데 듣는 아들은 더 놀랐겠죠. 내가 결혼을 못해 서른 무렵에 입양한 아들이었어요.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와 못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길거리에서 온갖 장사를 해 대학교·대학원을 다 보냈어요. 시방 그 아들이 쉰둘이고 인천에서 목사로 일하죠."
―가족끼리만 아는 걸 떠나 어쩌다가 '수요시위'에도 앞장서게 됐지요?
"며느리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우리 어머니가 이런데 지금껏 감추며 살고 계신다'고 알렸어요. 정대협에서 몇 번이나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위안부끼리는 서로 말이 통하니 한번 나와보라. 같이 놀면서 응어리도 풀어라.' 그렇게 시작된 거죠. 젊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나 했죠. 2002년부터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수요시위에 나갔지요."
―대중 앞에 자신의 과거와 얼굴을 내놓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닐 겁니다.
"팔십 구십을 먹어도 여자는 여잔데…, 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그런 과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고, 나라를 빼앗긴 한국 정부지, 결코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이제는 누가 나보고 '위안부'라고 해도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실상을 그대로 다 알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결코 우리처럼 당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주 건조하게 질문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녀는 씩씩하게 답변했다. "다 물어보세요. 역사의 사실을 그대로 알릴 수 있다면야 내가 고맙죠."
―어떻게 해서 '일본군 위안부'로 가게 됐나요?
"우리 나이로 열세살이었으니, 꼭 70년 전이죠. 평양에서 고물상 하던 아버지가 장물을 잘못 사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러니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웠죠. 내 위로 오빠 둘, 언니 하나, 밑으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죠. 그 시절 내가 학교를 다녔는지 기억이 안 나요. 입학했어도 오래 다닐 처지는 아니었겠죠. 하루는 친구집에 가니 여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떤 여자가 '저 사람(일본인)을 따라가면 공장에 가서 돈도 벌고 기술도 익힌다'고 했어요. 뒷전에서 듣던 내가 혹했어요. 하지만 나는 조그마했으니까 상대를 안 해줬어요. '넌 아직 어려서 안 돼.' 난 마음이 달아 '나도 가면 잘할 수 있어요. 나도 갈게요' 하며 그 길로 쫓아나섰나 봐요."
―집에도 말을 안 하고?
"막바로 간 거죠. 옷도 갈아입지 않고. (한숨 쉬며) 쫓아갈 때까진 좋았죠."
―어떻게 갔지요?
"세월이 너무 오래돼 모든 게 흐릿해요. 기차를 타고 간 것 같아요. 같은 동네 여자들 서넛 명과 함께 탔어요. 가다 보니까 한 명씩 한 명씩 빠졌어요. 소변 보러 갔나며 기다려도 안 왔어요. 나중에는 나 혼자가 됐어요."
―집에서 멀리 떨어져 기차 타고 가는데 겁이 안 났어요?
"겁이 났으니까 중간에 '나 집에 보내달라'고 했겠지요. 동행한 사람은 일본인이었지요. '너 떠들면 혼나. 좋은 데 가는데 가만히 있어야지.' 또 뭐라고 말했지만 일본말을 죄다 알아들을 리가 없었죠."
―도착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기차를 무척 오래 탔어요. 어디인지는 모르죠. 기차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들어갔는데, 일반 사람은 보려야 볼 수가 없었어요. 사실은 주위를 살피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서우니까 자꾸 '집에 보내달라'며 울기만 했어요. 어느 집으로 들어가니 여자들이 열명 남짓 옹기종기 앉아있었어요. '이 많은 여자들이 이 무서운 데를 왜 와 있었나'고 생각했어요. 그날 밤 똑똑히 기억나는 건, 내가 훌쩍거리고 있는데 시금칫국과 쌀밥을 줬다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는 쌀밥을 못 먹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무서워 그걸 먹지 못했어요."
―그 집은 일본 군부대 안에 있었습니까?
"모르겠어요.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국인 할머니가 관리자였어요. 말 안 들으면 머리끄덩이를 잡고서 사납게 팼지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일본군을 받았죠. 나는 안 벗으려고 속옷을 거머쥐고 버텼어요. 그 부위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죠. 그곳에 간 것은 첫 생리를 하기 전이었어요. 나중에 생리를 했을 때, 나쁜 군인들이 내 몸을 잘못 건드려 속이 고장나 피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무서워서 방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머리를 숙여 "시방도 정수리 쪽에 상처가 있을것" 이라고 말했다. 나는 흰머리 숱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한번은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려다가 내가 말을 안 듣자 칼집으로 때렸어요. 그때 죽었더라면 더 좋았죠. 얼마 안 돼 성병이 옮았어요. 약을 써도 안 나아 수술까지 받았는데, 나팔관을 건드려 아이를 못 낳게 할 줄 몰랐어요. 상처가 덧나 걸음을 잘 못 걸었죠. 그렇게 쓸모가 없으니까 일본인을 딸려 내보내줬어요. 우리 동네 근처까지 데려주고는 그 사람은 사라졌어요. 집에 와 큰오라버니한테 매를 많이 맞았죠. 엄마에게만 사정을 말했어요."
―그때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위안소'로부터 돈을 받았나요?
"전혀 없었어요. 집에 있으면서 '육백육'이라는 주사약을 맞고서 많이 회복됐어요. 그 뒤 평양 시내에 있는 일본 부대 안으로 청소 일을 하러 다녔어요. 아침 일찍 부대 앞에 줄을 서면 필요한 수만큼 안으로 들여보냈어요. 어느 날 등 뒤에서 누군가가 '하나코(花子)!' 하고 불렀어요, 위안소에서만 그렇게 불렀지, 동네에서는 이 이름을 알지 못해요. 돌아보고는 놀라 주저앉을 뻔했어요. 나를 데려다 준 그 일본 남자였어요. 내 팔꿈치를 끼고는 기차에 태워 중국 본토로 데려갔어요."
―중국 본토 어디였나요?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기차 안에서 압록강 철교를 넘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역에 내려 차를 타고 갔어요. 집은 일자(一字)였는데 방이 쭉 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우리는 각자 방에서 자면서 일본 군인을 받았어요. 밥 먹을 때만 한가운데 방에 함께 모여 먹었어요."
―같은 처지의 여인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요?
"눈 뜨면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서로 놀 사이가 있나요. 밥 먹을 때도 딴소리 하면 관리인이 야단을 쳤어요. 욕조에서 함께 씻을 때만 속에 있던 말을 한 것 같아요. 난 '울보'로 불렸어요. 겁 많고 잘 울었으니까요. 일본군 중에도 착한 사람은 착하잖아요. 내가 어리니까 불쌍하게 보고 일본글을 알려주고, 우리 집 주소로 내 편지를 부쳐주기도 했어요. 고향 집과 편지 왕래가 됐지만 '난 잘 있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라'고만 하고, 딴소리는 못 해봤죠."
―찾아와서 나를 구해달라고 왜 하지 않았죠?
"소용없는 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바보처럼 살자고 했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고, 그 뒤에 돌아가셨다는 통보가 왔죠."
―햇수 계산을 해보면 위안소에서 약 4년을 지낸 것 같은데, 바깥 외출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딱 두 번 노래자랑에 나간 것 같아요. 내가 노래를 잘 불렀어요. 차를 타고 가서 일본 노래를 불렀는데, 어디였는지 기억은 안 나요. 늘 방 속에서만 지냈던 것 같아요."
―위안소 내 마당이나 근처에는 나가봤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거기가 사람 사는 곳이었겠지요."
―어떻게 그 생활이 끝났나요?
"그때는 해방된 줄 몰랐어요. 일본 군인도 안 오고 관리인도 사라졌어요. 우리 여자들만 남았는데, 먹을 식량이 며칠 분밖에 없잖아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간 거예요. 언니들이 바깥에 나가 쌀을 구해와 먹었어요.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갈 줄도 몰랐어요.
어느 날 무력하게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데, 행인들이 '빨리 가야 해, 이 배 못 타면 고향에 못 가' 하는 우리 말이 들렸어요. 딴소리는 아무것도 안 들려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집 밖으로 나와 그 사람들 뒤를 쫓아갔어요. 그렇게 해서 줄서서 배를 탔어요. 표 검사도 안 했어요. 어느 항구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배는 인천에 도착했어요. 배에서 내리니 돈 300원인지 3000원인지 주고 주먹밥 하나를 줬어요. 그리고 모두 차에 태워 장충단공원에 내려줬어요. 거기서 흩어졌어요. 나는 입던 옷이 전부였으니,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죠. 평양 집으로 갈 자신이 없었어요. 이 주제로 가느니 좀 돈을 벌어서 옷을 갈아입고 노비를 마련해서 가야지 생각했죠, 처음에는 술집에서 노래 품을 파는 접대부로 살았죠. 그런데 38선이 가로막혔어요. 이런 얘기는 몇 달을 해도 다 못하고 책을 몇 권 써도 다 못하니, 그냥 그만 하세요."
하지만 나는 건조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그 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내게는 아무 피붙이가 없었죠. 접대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장사를 시작했죠. 과일·옷·계란·번데기…, 안 한 것 없이 다 했어요. 남에게 아쉬운 소릴 하지 않고 살아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남한테 피해를 끼치고 그걸 못 갚고 아파서 죽으면 안 된다 싶어 그날그날 열심히 했죠. 어떻든 당장 살아남는 게 중요했어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과거를 잊고서 좋은 남자를 만나 새 출발해 보자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내 몸은 안 아픈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성병의 뿌리도 안 빠졌죠. 아픈 몸을 갖고 무슨 결혼 생활을 해요. 상대를 망치는 거죠. 그럴 수는 없어요. 나만이 그런 게 아니고 위안부 열이면 아홉 사람은 다 그래요. 나는 이미 망가졌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와도 냉담했죠. 그러다가 서른 무렵에 우리 아들을 입양했어요."
―살아오면서 어떤 기억이 가장 생생합니까?
"내가 누굴 욕하고 미워하는 걸 싫어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잊혀지지 않아요. 13세 때 '공장에 가면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운다'고 말한 그 여자가 꿈에 가장 많이 나와요. 내가 죽어서도 무덤 안까지 갖고 가려나 봐요. 여태 그 여자는 살아있을까요."
'수요시위'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 때 애도를 표하기 위해 한번 쉬고는 빠짐없이 열렸다. 햇수로 18년째 계속 되는 중이다. '등록'된 234명의 위안부 할머니 수는 87명으로 줄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이상.. 퍼온글... 위안부 위안부.. 말만 들었죠... 그냥 일제시대에 있었던일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혹 안그런사람두 있겠지만요... )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겠죠..??
그런데.. 이렇게 기사나 독도 관련된일을 보면서... 느끼는것많지만... 금방 잊어 버리는거 같아요.. 저두 그러는데.. 정말.. 이런거 볼떄마다 느끼는건데...
일본은 과거 일에 대해 인정하고 한번쯤 그일에 대해 정리를 해야 한다구 봅니다. 과거는 과거일뿐 앞으로 좋은 관계로 지속되고 문화교류도 할수 있지만...
과거에 잘못한점은 인정하고 정리를 하고 넘어 가는게 맞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에서 과거 일에 대해 조용한것은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을 자기
발밑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도일만 해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