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유통기한이 있는 작가다.1세기가 지나면 빛이 바랠 작가라는 소리다. 일본문학이 전무했던 우리나라에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 숲)'는 착륙하자 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나는 이 현상의 이유가 작품성 보다는그의 건조하고 센치한 문체가 20대 전 후반, 정확히는 그 시대 청춘 남녀들의 정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그렇다면 하루키의 열풍이 그때로 부터 지금에 까지 식지 않는 이유를 묻고싶을지도 모르겠다.나는 이것을 단순한 전염성이라 간주한다. 그의 최루성 강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일단 커버를 열면 무엇에 붙들린 사람처럼 밤을 새워 마지막 페이지를 닫게 만든다.그러므로 하루키의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다. 하루키 작품의 중독성은 영화 007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와 견줄만큼 강하다.하루키를 평가절하하는 나조차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빠른 발걸음으로 서점을 찾게되는 게 사실이니까.그러나 이것은 권양숙 여사가 남편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논조가 궁금해서라도 조선일보의 구독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한다면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루키 소설은 재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루키를 높이 보지 않는 이유는그의 소설 속에서 한 번도 깊은 삶의 통찰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기교는 뛰어나지만 성찰은 없는 작가의 생명이 오래 갈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키의 노련함이 싫다.이는 독자가 무엇을 읽고 자극받는지 매우 잘 알고 있는 노련함이지만 독자가 뭘 알고 싶어하는지 이해하는 노련함이 아니며따라서 스포트라이트에 반응하는 스타성 강한 작가로서의 노련함일 뿐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나는 이런 노련함을 작가적 자질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하루키의 글은 내 원천의 매마른 정서를 해갈 시켜주지 않았다.다만 한 동안 최면술사의 주술에 걸린듯 하루키 효과에 빠져있다가도어느덧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뿐이었다.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안 기분과 흡사했다. 하루키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처럼 가장 흉한 것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반추해 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경지에 오른 작가가 아닌 것이다. 소설은 캐릭터의 창조로 완미에 이른다고 생각한다.그런데 하루키가 만들어낸 캐릭터 중 <해변의 카프카>의 나카타상 말고는 이렇다할 인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드라마틱하기만 해서 대중의 흔한 공감만 사모할 뿐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려운 삶이 주는 질긴 고삐의 맛을 보여주진 못한다. 영어권에서 공부했다는 그의 전적을 감안하더라도 하루키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아메리칸 지향적 사고는그의 정체성이 일본인지 미국인지 의심하게 만들며한 두번도 아니고 왕왕 등장하는 기괴한 섹스의 표현은 아무리 열린 마인드로 바라보려 해도그것이 작가라면 누구나 작품을 쓸때 애용하게 되는 단골 아이템인지 아니면 사생활의 투사현상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나에겐 작가의 타계나 시대의 전환으로 재평가된 작품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지론이 있다.그래서인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하루키야 말로(노벨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지만)후세에서 냉혹하게 재평가 받아야 될 작가 1순위로 지목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의 신작 <IQ84>를 읽기 전의 내 성급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둔다.내가 <IQ84>를 읽고 난 후에는 그를 대신해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 사죄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 폄하론
무라카미 하루키는 유통기한이 있는 작가다.
1세기가 지나면 빛이 바랠 작가라는 소리다.
일본문학이 전무했던 우리나라에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 숲)'는 착륙하자 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나는 이 현상의 이유가 작품성 보다는
그의 건조하고 센치한 문체가
20대 전 후반, 정확히는 그 시대 청춘 남녀들의 정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열풍이 그때로 부터 지금에 까지 식지 않는 이유를 묻고싶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전염성이라 간주한다.
그의 최루성 강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일단 커버를 열면 무엇에 붙들린 사람처럼 밤을 새워 마지막 페이지를 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루키의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다.
하루키 작품의 중독성은 영화 007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와 견줄만큼 강하다.
하루키를 평가절하하는 나조차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빠른 발걸음으로 서점을 찾게되는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권양숙 여사가 남편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논조가 궁금해서라도 조선일보의 구독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한다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루키 소설은 재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루키를 높이 보지 않는 이유는
그의 소설 속에서 한 번도 깊은 삶의 통찰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교는 뛰어나지만 성찰은 없는 작가의 생명이 오래 갈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키의 노련함이 싫다.
이는 독자가 무엇을 읽고 자극받는지 매우 잘 알고 있는 노련함이지만
독자가 뭘 알고 싶어하는지 이해하는 노련함이 아니며
따라서 스포트라이트에 반응하는 스타성 강한 작가로서의 노련함일 뿐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나는 이런 노련함을 작가적 자질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하루키의 글은 내 원천의 매마른 정서를 해갈 시켜주지 않았다.
다만 한 동안 최면술사의 주술에 걸린듯 하루키 효과에 빠져있다가도
어느덧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안 기분과 흡사했다.
하루키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처럼
가장 흉한 것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반추해 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경지에 오른 작가가 아닌 것이다.
소설은 캐릭터의 창조로 완미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루키가 만들어낸 캐릭터 중 <해변의 카프카>의 나카타상 말고는 이렇다할 인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드라마틱하기만 해서 대중의 흔한 공감만 사모할 뿐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려운 삶이 주는 질긴 고삐의 맛을 보여주진 못한다.
영어권에서 공부했다는 그의 전적을 감안하더라도 하루키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아메리칸 지향적 사고는
그의 정체성이 일본인지 미국인지 의심하게 만들며
한 두번도 아니고 왕왕 등장하는 기괴한 섹스의 표현은 아무리 열린 마인드로 바라보려 해도
그것이 작가라면 누구나 작품을 쓸때 애용하게 되는 단골 아이템인지
아니면 사생활의 투사현상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나에겐 작가의 타계나 시대의 전환으로 재평가된 작품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지론이 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하루키야 말로
(노벨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지만)
후세에서 냉혹하게 재평가 받아야 될 작가 1순위로 지목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의 신작 <IQ84>를 읽기 전의 내 성급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둔다.
내가 <IQ84>를 읽고 난 후에는
그를 대신해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 사죄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