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은 천 길 물속보다 더 깊고도 멀고 험해서, 그리고 그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고 지키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아질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휘몰아친다. 고통과 아픔은 잊혀지고 지워지지 않는다. 가슴에 깊이 남아 소리 없이 숨어 있다가 언제고 불현듯이 뒤통수를 내리갈기곤 한다. 신애는 신앙으로 아픔을 가슴에 묻는다. 잊고 지우고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사랑으로 모든 게 치유되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픔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한켠으로 밀어둔 채로 한발 한발 힘겨운 발걸음을 내밀 뿐이다. 신애의 불안한 발걸음을 밀양의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네의 친한 사람들도, 그 잘난 교회의 교양 있는 신도들도 신애의 붕 뜬 고백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신애라는 인물은 텅 빈 사람이다. 아프고 안타깝게도 그 모습은 신애와 밀양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한국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이다. 신애가 속물이라고 말하는 김사장 만큼이나 신애도 그에 다를 바가 없다. 바람핀 남편을 끝까지 사랑했지만 그를 잃은 상실감이 밀양으로 그의 발길을 이끌었을 때부터 신애의 삶을 비어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보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의 모습보다 남들에게 비취어진 자신으로 살아간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에게 있어 진심을 내비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아프고 쓰라리다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가두어 둔 채로 살아가는 일은 그녀에게 익숙하다.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발버둥치는 신애의 노력은 슬프게도 그녀의 아이를 죽음으로 이끈다.
눈물까지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숨도 내쉴 수 없는 신애는 하나님을 만난다. 신애의 슬픔은 치유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 슬픔을 피해간다. 아플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기쁨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도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 아픔은 드러내야 하고, 부딪혀서 깨져야 한다. 하지만 신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걸 피해간다. 넘어설 수 없는 힘듦을 구석진 곳에 밀어두고 또다시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신애로 살아간다. 신애의 상처는 깊어가기만 한다.
하지만 신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그저 타자일 뿐이다. 지켜보고만 있을 뿐, 길거리에 지나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러는 그녀에게 건방질 정도로 다가와서 아프냐고 힘드냐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슬픔을 삭히고 아픔을 억누르고 있는 신애에게 그들의 말은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소리이고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그들의 말은 상투적이고 피상적이기만 하다. 대화가 엇나가고 말들은 허공을 떠돈다. 그럼에도 그들의 따스한 말은 결국 하나님과 신애를 만나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신애를 위해 생일 축하를 해주고, 기도를 하고 감사를 표현하지만, 그들은 신애를 만져주지 못한다. 물론 사람이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카센타 김사장이 신애의 가족들에게 “다 이해하는데예”라는 말만큼이나 머나먼 ‘사랑’만이 떠돌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친한 듯이 보이지만 신애와 어색하고 서먹하다. 그들과 신애를 잇고 있는 가느다란 실은 단지 말뿐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결국 그 고통은, 그 슬픔은 터져 나온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은 하나님의 뜻을 반문하며 터져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너무나 커서 신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도 용서해주었다. 신애는 그와의 만남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애에게 처음 교회에 나가기를 제안했던 김집사 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왔다고 피상적인 말만 던질 뿐이다.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당신 때문에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도저히 당신을 용서할 수 없고 이 자리에 서기조차 힘들지만, 내가 이 자리에 왔다는 이야기를 내뱉지 못한다. 그러는 신애에게 살인범은 그녀를 보면서 너무 온화해서 비웃음으로 까지 보이는 미소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고. 신애는 무너진다. 화가 난다. 그리고 미친다.
용서라는 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는 힘들다. 자신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억눌린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가서 사랑을 전하다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애의 슬픔은 토해내졌어야 한다. 자신에게 진실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슬픔은 무시됐다. 신애가 무시했고, 주위의 사람들이 무시했다. "아프지예", "이해합니더" 교인들의 가식적인 위로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그 아픔은 터져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담담하고 살인자에게 자신의 기분을 다 토로하면서 그래도 당신을 용서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신애에게는 신애가 없었다. 억눌린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감춰져 있었다. 그런 신애를 향해 잘난 교인들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말 밖에는.
미쳐버린 신애에게 말을 걸고 기도해주지만 그를 미쳤다고, 귀신 들렸다고만 생각하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따스한 말 한마디보다 신애를 안아주는 것보다 기도만 할 뿐이다. 신애가 만났다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현신인 예수가 세상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예수는 살아있는 동안 목마르고 살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로 찾아갔다. 그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사랑을 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에게로 가서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같이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 사랑을 보일 방법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까지 말이다. 영화는 예수의 제자라고 살아가는 현재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질문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일 것이다. 젠 체하고 이해하는 척하면서 한발 더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질문이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역겹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신애라는 인물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신애가 있을까. 그리고 김집사와 그런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많을까. ‘밀양’은 신이 내린 형벌에 대한 논쟁이기보다 그 신을 믿는 이들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두 거짓말과 같은 신의 이야기, 암묵적으로 용서를 강요하는 종교. 그 기독교의 주인공이었던 예수는 언제나 그 이상의 사랑을 들려주었다.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가식이 아닌 진짜 사랑을 말이다. 주위에 목마른 사람이 없도록, 상처입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없도록 그의 사랑을 전하라고 했다. 말로만 끝나는 사랑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랑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사랑을 잃었다. 계속되는 기독교를 향한 그들은 비난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는 이 질문에 기독교인들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는 없다. 가식적이고 동떨어진 듯한 ‘밀양’의 사람들과 고상한 척하면서 자신들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떳떳한 듯 살아가는 ‘밀양’의 기독교인들은 과연 무엇이 달랐을까.
밀양 _ 기독교인에게 꼭 필요한 영화
사람 마음은 천 길 물속보다 더 깊고도 멀고 험해서, 그리고 그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고 지키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아질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휘몰아친다. 고통과 아픔은 잊혀지고 지워지지 않는다. 가슴에 깊이 남아 소리 없이 숨어 있다가 언제고 불현듯이 뒤통수를 내리갈기곤 한다. 신애는 신앙으로 아픔을 가슴에 묻는다. 잊고 지우고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사랑으로 모든 게 치유되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픔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한켠으로 밀어둔 채로 한발 한발 힘겨운 발걸음을 내밀 뿐이다. 신애의 불안한 발걸음을 밀양의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네의 친한 사람들도, 그 잘난 교회의 교양 있는 신도들도 신애의 붕 뜬 고백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신애라는 인물은 텅 빈 사람이다. 아프고 안타깝게도 그 모습은 신애와 밀양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한국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이다. 신애가 속물이라고 말하는 김사장 만큼이나 신애도 그에 다를 바가 없다. 바람핀 남편을 끝까지 사랑했지만 그를 잃은 상실감이 밀양으로 그의 발길을 이끌었을 때부터 신애의 삶을 비어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보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의 모습보다 남들에게 비취어진 자신으로 살아간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에게 있어 진심을 내비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아프고 쓰라리다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가두어 둔 채로 살아가는 일은 그녀에게 익숙하다.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발버둥치는 신애의 노력은 슬프게도 그녀의 아이를 죽음으로 이끈다.
눈물까지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숨도 내쉴 수 없는 신애는 하나님을 만난다. 신애의 슬픔은 치유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 슬픔을 피해간다. 아플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기쁨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도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 아픔은 드러내야 하고, 부딪혀서 깨져야 한다. 하지만 신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걸 피해간다. 넘어설 수 없는 힘듦을 구석진 곳에 밀어두고 또다시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신애로 살아간다. 신애의 상처는 깊어가기만 한다.
하지만 신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그저 타자일 뿐이다. 지켜보고만 있을 뿐, 길거리에 지나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러는 그녀에게 건방질 정도로 다가와서 아프냐고 힘드냐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슬픔을 삭히고 아픔을 억누르고 있는 신애에게 그들의 말은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소리이고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그들의 말은 상투적이고 피상적이기만 하다. 대화가 엇나가고 말들은 허공을 떠돈다. 그럼에도 그들의 따스한 말은 결국 하나님과 신애를 만나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신애를 위해 생일 축하를 해주고, 기도를 하고 감사를 표현하지만, 그들은 신애를 만져주지 못한다. 물론 사람이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카센타 김사장이 신애의 가족들에게 “다 이해하는데예”라는 말만큼이나 머나먼 ‘사랑’만이 떠돌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친한 듯이 보이지만 신애와 어색하고 서먹하다. 그들과 신애를 잇고 있는 가느다란 실은 단지 말뿐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결국 그 고통은, 그 슬픔은 터져 나온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은 하나님의 뜻을 반문하며 터져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너무나 커서 신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도 용서해주었다. 신애는 그와의 만남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애에게 처음 교회에 나가기를 제안했던 김집사 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왔다고 피상적인 말만 던질 뿐이다.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당신 때문에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도저히 당신을 용서할 수 없고 이 자리에 서기조차 힘들지만, 내가 이 자리에 왔다는 이야기를 내뱉지 못한다. 그러는 신애에게 살인범은 그녀를 보면서 너무 온화해서 비웃음으로 까지 보이는 미소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고. 신애는 무너진다. 화가 난다. 그리고 미친다.
용서라는 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는 힘들다. 자신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억눌린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가서 사랑을 전하다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애의 슬픔은 토해내졌어야 한다. 자신에게 진실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슬픔은 무시됐다. 신애가 무시했고, 주위의 사람들이 무시했다. "아프지예", "이해합니더" 교인들의 가식적인 위로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그 아픔은 터져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담담하고 살인자에게 자신의 기분을 다 토로하면서 그래도 당신을 용서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신애에게는 신애가 없었다. 억눌린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감춰져 있었다. 그런 신애를 향해 잘난 교인들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말 밖에는.
미쳐버린 신애에게 말을 걸고 기도해주지만 그를 미쳤다고, 귀신 들렸다고만 생각하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따스한 말 한마디보다 신애를 안아주는 것보다 기도만 할 뿐이다. 신애가 만났다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현신인 예수가 세상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예수는 살아있는 동안 목마르고 살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로 찾아갔다. 그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사랑을 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에게로 가서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같이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 사랑을 보일 방법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까지 말이다. 영화는 예수의 제자라고 살아가는 현재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질문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일 것이다. 젠 체하고 이해하는 척하면서 한발 더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질문이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역겹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신애라는 인물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신애가 있을까. 그리고 김집사와 그런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많을까. ‘밀양’은 신이 내린 형벌에 대한 논쟁이기보다 그 신을 믿는 이들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두 거짓말과 같은 신의 이야기, 암묵적으로 용서를 강요하는 종교. 그 기독교의 주인공이었던 예수는 언제나 그 이상의 사랑을 들려주었다.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가식이 아닌 진짜 사랑을 말이다. 주위에 목마른 사람이 없도록, 상처입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없도록 그의 사랑을 전하라고 했다. 말로만 끝나는 사랑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랑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사랑을 잃었다. 계속되는 기독교를 향한 그들은 비난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는 이 질문에 기독교인들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는 없다. 가식적이고 동떨어진 듯한 ‘밀양’의 사람들과 고상한 척하면서 자신들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떳떳한 듯 살아가는 ‘밀양’의 기독교인들은 과연 무엇이 달랐을까.
‘밀양’은 기독교인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