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살이던 1990년..대추나무 집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나는 그네 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에 골절을 입었고, 걷고 목발을 짚을 수 없었기에 늘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한동안을 지내왔다. 내 기억 속 보라색 대문의 집으로 가는 길.. 처음 맞이한 곳은 청수의원이었다. 보라색 대문의 집에는 "복실이"라는 진돗개가 살았다. 당시에는 개가 무척 크다고 느껴졌는데, 지금보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 복실이는 옆집에서 놀러온 형의 팔목을 깨무는 바람에개장수에게 팔려가게 되었고, 이 때 우리 아버지는 참 많이 슬퍼했다그 때 형을 데리고 갔던 병원이 이 곳 청수의원이었다. 팔목이 한움쿰이나 물어 뜯겨?서... ㅠㅠ 잉...낑낑 거리면서 봉합 치료를 받던 형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 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오른쪽 길 건너편 큰 건물은 "역말 독서실 건물"이다!이게 아직도 있을 줄이야.. 쩝..여기는 지하였나? 지상이였나? 탁구장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 가서 형들과 함께 탁구를 치러갔던 기억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탁구장은 그리 세상에 많지 않았나싶다.다른 동네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탁구장은 없었고, 독서실만 남아있었다. "역촌"이라는 지명은 역참이 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라는데, "역말길"이라는 길의 이름도 그에 유래하지 않았나 싶다.이 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159번 버스정류장이미 그 버스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구나.가야의 생오리 집은 예전에 레코드가게였다. 내가 여기서 구입한 테이프와 CD들은 아직도 내 방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음악을 버리지 않고, 집안에 두는 이유는 왜일까? 언젠가는 듣지도 모를거라는 생각탓일까? 기억나는 테이프로는 "육각수 - 흥보가 기가막혀" 가 있다.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녹색지대 - 사랑을 할꺼야"서태지 전 앨범HOT, 젝스키스, SES당시 아이돌 대표주자의 음악을 나는 참 좋아했고, 우리 형은 이승환, 조관우, 패닉, 서지원의 음악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음악장르부터 엇갈렸다.나는 대체 그 음악을 왜 듣는지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와!!! 드디어 보라색 대문 집 골목길 초입이다..여기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알았고, 많은 친구들과 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세세하게 찍는 것이 뻘쭘해서, 얼렁뚱땅 찍었지만...그래도 기억 속에서는 풋풋하게 남아있다.. 히...예전 석유집이었던 가게는 지금 빨강색으로 성인용품을 팔고 있었다(흐미.... 진작 생기지..)도로도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보도블럭이 덕지덕지 깔려있던 그런 곳이었는데... 당시 이 단독주택을 우리집 소유였다. 세를 받곤 했는데, 아마 그 때 수입이 쏠쏠했을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집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우리 집만은우리 집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보라색 대문과 빨간 벽돌... 예나 지금이나 이 색깔을 가진 집은 이 동네에 많지 않다..그래서 마음 속에서 늘 특별하다.. 저기 3층이 우리집이다! '보라색 대문을 통과하면 반지하에는 누나네 집이 있었고, 2층에는 어머니가 아는 이모네집(보통 어머니 손님은 내게 이모가 된다)3층이 우리집이다. 옥상에는 옥탑방이 있어서, 한 동안 형의 방으로 쓰였다(이 때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원하던 형의 모습은 시작된다..) 문 옆에는 자전거 두대가 늘 놓여있었고, 당시 우리집에는 접이식 자전거도 있었다그 생김새가 이상해서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난 그 자전거가 좋았다우리집 이쁘다... 우리집이야.. 히히.. 대문 안으로 살짝 들어와봤다. 내가 자전거가 있던 자리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른편 아래 쓸모없이 보이는 화분에는누나가 기르던 화분들이 항상 푸르름을 띄고 있었다. 담장 아래 있는 돌과 흙에는 나무도 있었고, 나는 그 흙 아래에 기르던 병아리가 죽었을 때, 나무젓가락으로 관을 만들어서 묻어주곤했다. 우리 병아리가 죽었을 때 나는 마음이 참 아팠다. 비록 밤마다 삐약삐약 거리는 소리 때문에 부모님께 왜 사왔냐고 핀잔도 많이 받았지만,죽었을 때 그거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힝..늘 그렇듯 죽음은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살던 1989년부터 1999년 이라는 10년의 시간동안 병아리는 하늘나라에 갔고,집에서 기르던 "나비"라는 똥개는 가출을 했다. 집에서 기르던 "복실이"는 개장수에게 팔려갔고, 아저씨가 주워온 "치와와"(아직 이름도 못 붙여줬는데..) 강아지는 단 하루만에내가 학교에 간 사이 누나가 어딘가로 팔아버렸다...이 때 내가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그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그리고.. 1998년 12월 12일 내 생일 다음 날... 오랫 동안 치매를 알아 고생하시고, 고생시켰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그리고 몇 달 뒤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하셨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왔다가 떠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태어나는데는 순서가 있으나 죽는데는 순서가 없음인게다 대식이와 유진이네 집이다. 골목길 안에는 내 또래는 거의 없었고, 나보다 어린 애들이 많았다졸지에 골목대장 노릇을 잠깐 했지만, 그건 내 해석일 뿐...나는 거의 매일 이 꼬맹이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팬티가 줄무늬 팬티"라는 유행가사를 나에게 접목시켜 놀리던 대식이란 아이가 생각이 난다. 그 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골목길을 쫌 들어가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다. 새로지은 단독주택 입주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는데,어른들이 출근한 이후에는 어린이들의 공차기 공터가 되었다. 여기서 피구도 하고, 탱탱볼로 축구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마음 속에 있던 보라색 대문집이 있던 골목길은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너무나도 좁고, 작게만 느껴졌다. 그 때는 정말 크기만 했던 그곳.. 지금은...너무너무 작다.. 기억으론 그냥 자동차로 지나치기만 했을 뿐이지걸어서 와본 적은 한번도 없지 않나 싶다. 내 어린시절 10년의 몫을 담당했던 그곳이다..
[과거여행#5] 우리집 보라색 대문
내가 7살이던 1990년..
대추나무 집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나는 그네 사고로 인해 왼쪽 다리에 골절을 입었고,
걷고 목발을 짚을 수 없었기에 늘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한동안을 지내왔다.
내 기억 속 보라색 대문의 집으로 가는 길..
처음 맞이한 곳은 청수의원이었다.
보라색 대문의 집에는 "복실이"라는 진돗개가 살았다.
당시에는 개가 무척 크다고 느껴졌는데, 지금보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 복실이는 옆집에서 놀러온 형의 팔목을 깨무는 바람에
개장수에게 팔려가게 되었고, 이 때 우리 아버지는 참 많이 슬퍼했다
그 때 형을 데리고 갔던 병원이 이 곳 청수의원이었다.
팔목이 한움쿰이나 물어 뜯겨?서... ㅠㅠ 잉...
낑낑 거리면서 봉합 치료를 받던 형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 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오른쪽 길 건너편 큰 건물은 "역말 독서실 건물"이다!
이게 아직도 있을 줄이야.. 쩝..
여기는 지하였나? 지상이였나? 탁구장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 가서 형들과 함께 탁구를 치러갔던 기억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탁구장은 그리 세상에 많지 않았나싶다.
다른 동네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탁구장은 없었고, 독서실만 남아있었다.
"역촌"이라는 지명은 역참이 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라는데,
"역말길"이라는 길의 이름도 그에 유래하지 않았나 싶다.
이 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159번 버스정류장
이미 그 버스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구나.
가야의 생오리 집은 예전에 레코드가게였다.
내가 여기서 구입한 테이프와 CD들은 아직도 내 방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음악을 버리지 않고, 집안에 두는 이유는 왜일까?
언젠가는 듣지도 모를거라는 생각탓일까?
기억나는 테이프로는 "육각수 - 흥보가 기가막혀" 가 있다.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녹색지대 - 사랑을 할꺼야"
서태지 전 앨범
HOT, 젝스키스, SES
당시 아이돌 대표주자의 음악을 나는 참 좋아했고,
우리 형은 이승환, 조관우, 패닉, 서지원의 음악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음악장르부터 엇갈렸다.
나는 대체 그 음악을 왜 듣는지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와!!! 드디어 보라색 대문 집 골목길 초입이다..
여기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알았고, 많은 친구들과 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세세하게 찍는 것이 뻘쭘해서, 얼렁뚱땅 찍었지만...
그래도 기억 속에서는 풋풋하게 남아있다.. 히...
예전 석유집이었던 가게는 지금 빨강색으로 성인용품을 팔고 있었다(흐미.... 진작 생기지..)
도로도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보도블럭이 덕지덕지 깔려있던 그런 곳이었는데...
당시 이 단독주택을 우리집 소유였다.
세를 받곤 했는데, 아마 그 때 수입이 쏠쏠했을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집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우리 집만은
우리 집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보라색 대문과 빨간 벽돌...
예나 지금이나 이 색깔을 가진 집은 이 동네에 많지 않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 늘 특별하다..
저기 3층이 우리집이다! '
보라색 대문을 통과하면 반지하에는 누나네 집이 있었고,
2층에는 어머니가 아는 이모네집(보통 어머니 손님은 내게 이모가 된다)
3층이 우리집이다.
옥상에는 옥탑방이 있어서, 한 동안 형의 방으로 쓰였다
(이 때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원하던 형의 모습은 시작된다..)
문 옆에는 자전거 두대가 늘 놓여있었고,
당시 우리집에는 접이식 자전거도 있었다
그 생김새가 이상해서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난 그 자전거가 좋았다
우리집 이쁘다... 우리집이야.. 히히..
대문 안으로 살짝 들어와봤다.
내가 자전거가 있던 자리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른편 아래 쓸모없이 보이는 화분에는
누나가 기르던 화분들이 항상 푸르름을 띄고 있었다.
담장 아래 있는 돌과 흙에는 나무도 있었고,
나는 그 흙 아래에 기르던 병아리가 죽었을 때, 나무젓가락으로 관을 만들어서 묻어주곤했다.
우리 병아리가 죽었을 때 나는 마음이 참 아팠다.
비록 밤마다 삐약삐약 거리는 소리 때문에 부모님께 왜 사왔냐고 핀잔도 많이 받았지만,
죽었을 때 그거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힝..
늘 그렇듯 죽음은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살던 1989년부터 1999년 이라는 10년의 시간동안
병아리는 하늘나라에 갔고,
집에서 기르던 "나비"라는 똥개는 가출을 했다.
집에서 기르던 "복실이"는 개장수에게 팔려갔고,
아저씨가 주워온 "치와와"(아직 이름도 못 붙여줬는데..) 강아지는 단 하루만에
내가 학교에 간 사이 누나가 어딘가로 팔아버렸다...
이 때 내가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그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1998년 12월 12일 내 생일 다음 날...
오랫 동안 치매를 알아 고생하시고, 고생시켰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하셨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왔다가 떠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태어나는데는 순서가 있으나 죽는데는 순서가 없음인게다
대식이와 유진이네 집이다.
골목길 안에는 내 또래는 거의 없었고, 나보다 어린 애들이 많았다
졸지에 골목대장 노릇을 잠깐 했지만,
그건 내 해석일 뿐...
나는 거의 매일 이 꼬맹이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팬티가 줄무늬 팬티"라는 유행가사를 나에게 접목시켜 놀리던
대식이란 아이가 생각이 난다.
그 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골목길을 쫌 들어가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다.
새로지은 단독주택 입주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어른들이 출근한 이후에는 어린이들의 공차기 공터가 되었다.
여기서 피구도 하고, 탱탱볼로 축구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마음 속에 있던 보라색 대문집이 있던 골목길은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너무나도 좁고, 작게만 느껴졌다.
그 때는 정말 크기만 했던 그곳.. 지금은...
너무너무 작다..
기억으론 그냥 자동차로 지나치기만 했을 뿐이지
걸어서 와본 적은 한번도 없지 않나 싶다.
내 어린시절 10년의 몫을 담당했던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