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저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져서 쓰게됐습니다. 일기용으로 (개인적으로) 먼저 쓰기 시작한거라 맞춤법도 다 틀리고, 낮춤말을 썻습니다. 그 점은 양해를 구해주십사~ 저 혼자만 재밌을 수도 있지만, 매일 눈팅하다 처음 쓰는 판이니 예쁘게 봐주시어용~
뉴스를 보니 졸업식 시즌이 곧 시작인가보다. 3월이 오면 내가 한국을 떠난지 9년이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여기에 도착했다. 사실 잘 알던 친구, 동네, 학교등 친근함을 벗고 낯선 곳에 산다는 두려움보단 내 안의 모험가 기질이 발동했는지 즐거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도착한 이 땅. 3월 어떤날의 늦은 밤... 하얗게 보이는 입김...소복히 쌓이는 눈... 3월이였다!!! 그날 눈 드럽게 많이 왔다 -_- 아 놔... 그때부터 이 삭막한 땅에 대한 무시무시함이 온 몸으로 느껴지더니 아까부터 아프던 고막이 아주 찢어질꺼 같더라. 진상을 떨었다. 우리 어무니 아부지 나 쥐어 패고 싶었을꺼다.
아부지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 우리 셋만 남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 엄마 깡이 너무 쎄다. 아무리 그때의 엄마가 젊었다지만, 참... 대단한 분이셔. 강한 엄마 밑에서 강하게 키워 주신 점 눈물나게 고맙수다!! (a touch of sarcasm here :D) 사실 한국에서 전화 올때마다 엄마의 눈물 보는거 그거 정말 못볼짓이다. 우리 모르게 하려고 방에서 전화 받으시는데, 나나 내 동생이나 그 꼬딱지만한 곳에서 엄마 우는 거 어찌 모르겠냐. 다 들리고 다 보였다. 진짜 그때 너무 비참했다.
비참한걸로 치면 3월 중순-말에 있었던 내 생일도 손꼽힌다. 학교 들어간지 일주일만에 봄방학이라고 문닫아 (아마 이때 뭔 말 했는지 못알아 듣고 학교 문닫힌거 보고 그냥 집에 돌아왔을꺼다), 처음으로 친구 하나 없이 생일을 보냈다. 인기가 많다고 할순 없어도, 한국에서 친구가 없는것도 아니였고, 나름 붙임성도 많아 사람 사귀는게 어려운적은 없었는데, 이때 생일이 정말 쇼크였다. 그때는 차도 없어서 전철역으로 한정거장 떨어진 영화관가서 (말이 한 정거장이지, 한국하고 스케일이 달라 도착지에 닿을 즈음이면 힘 쪽빠진다), 엄마, 나, 동생 셋이 피자 시켜먹었다. 그때 환율이 800원 정도였나? 지금하고 비교하면 엄청 싼건데 간덩어리가 작을때라 피자 가격보고 놀랐다. 췟, 나도 나름 강남 (한강의 남쪽)출신이였는데 -_- 나나 동생이나 오랫만에 먹는 피자에 환장하며 서러움따위는 금새 잊었지만, 엄마는 얼마나 맘이 않좋았을까? 한해씩 온다는 생일이지만, 이 해는 정말 잊을 수 없다. 그때의 외로움과 엄마의 서러움이 생각나 사실은 지금도 생일만 오면 부담부터 제일 먼저 든다.
첫 학교의 흑인짝궁!! 그 써글넘! 아 놔! 그 새리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오르네! 나는 처음에 나 좋아해서 괴롭힌줄 알았다. 그때는 공주병도 심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는건데 그 놈 내가 우습고 만만해서 괴롭히지 않았나 싶다. 옆에 쪼꼬만 노란 원숭이는 말도 못하지, 누가 말만 걸면 쫄아서 버벅대질 않나, 그래도 뭐 가지고 다니는거 보면 신기한 물것들 (i.e.영어 발음 들려주는 전자사전) 많지... 아오!!! 때리면 정학 당한다고 어무니가 잔뜩 겁을 줘서 갈기지도 못했다. 주먹이 운다 울어! 뭐, 내가 때려도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한국에서와 여기서 오는 전화 벨소리가 다르다. 한국에서 소리가 좀 더 길었던가? 지금은 핸드폰 링톤만 들어서 생각도 않난다. 한국에서 오면 나나 동생이 달려가 받았는데, 여기서 오면 다들 전화 받기를 꺼려했던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엄마가 받았다. 우리가 학교 다니고 말을 조금씩 트이면서 엄마가 도저히 못알아듣겠으면 나한테 넘기는데 (나름 첫째라고 -_-), 그럴때마다 짜증을 확 냈다 ... 영어가 많이 딸렸거든... 엄마 미안! 요즘도 엄마가 잡다한 집안일부터 딴 집 도와준답시고 생판 남인 꼬꼬마 유학 문제까지 나보고 전화하라 시킨다. -_- 아 놔-_- 나 아직도 영어 못한다고 -_- 내 발음 완전 구졌다고 -_- 버터 혀를 가지고 있는 동생 시키라고 -_- 그리고 내 전화비도 않내주면서 -_-
또 뭐 있더라... 아! 알렉산드라! 이 친구 정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정말 많이 도와줬었다. 특히 여기는 과제같은게 많아 반앞에서 presentation을 해야 하는데 이거 꽤 손 많이 간다. 알렉산드라가 아이디어 뱅크라 정말 즐겁게 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prime minister이름을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음을 따라 부른다던지... 뭐 그런거... 아쉽게도 내가 전학가고 걔도 가면서 연락이 끝겼지만, 지금쯤 멋진 숙녀가 됐을거라 백퍼 장담!
걔 집이 처음으로 놀러간 집이기도 했다. 한국도 그러겠지만, 여기선 특히 어정쩡한 친구 집 초대하는 일 많이 없다. 걔나 나나 반에서 아무래도 왕따여서 그런지 어정쩡에서 쪼오끔 벗어난 사이였....겠지? 내 첫학교는 카톨릭 학교여서 (불어기도문때문에 환장하는줄 알았다. 지금은 물론 불어 뿐만 아니라 한국어 기도문도 다 까먹었다), 학교 근처에 사는 얘들이 많이 없었다. 아무튼 걔네 어무니 차타고 좀 달려서 집에 도착. 머리 커지면서 안건데, 걔가 살던 동네 부자동네였더라 -_- 세상에 -_- 난 4층짜리 집 그때 처음보고 지금도 못보고 있다. 부잔거 알았으면 딱 달라붙는거였는데, 그때는 그래도 순진했나보다. 아오!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부자인거 같다. 아니, 어떤 꼬마에서 점심으로 스시를 사먹어!!!! 아무튼 걔네 집가서 뒷마당에 있는 담벼락 올라타며 놀았다 -_- 내가 미쳤나 보다 -_-
옆 불어반 여자애 생일파티 간 기억도 있다. 7학년/8학년이면 이성 호기심에 훨훨 불이 붙을때다. 꽤 큰 파티라 많이들 왔고, 어른 흉내낸다고 저녁 즈음에 시작됐다. 싸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춘들이 광란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ㅋㅋㅋㅋㅋ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다들 수줍어 했다....아마.. 그때 spin the bottle이라는 게임이 가장 생각이 난다. 콜라병같은걸 돌려 병입구가 가리키는 사람과 돌린 사람이 뽀뽀하는 야시꾸리한 게임이다. 알레산드라도 걸렸는데 돌린 남자얘가 싫어하는 티를 팍팍내 거의 울려고 했다 ㅋㅋㅋㅋㅋ 나? 나 이래봬도 양반집안에서 곱게 자란 규수다. 얌전떨면서 게임 안한다고 뒤로 빠지고 아주우우우우 (과하게) 즐겁게 관람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찌 어찌하다 사람들 틈사이로 나에게 콜라병이 수줍게 나를 향하고 있던게 아니냐!! 나 그거 돌린놈 아직도 기억한다. 크리스. 캬야! 이름부터 죽이지 않냐? 금발에 퍼런 눈에 멋진... 음? 정정: 컷으면 멋었을듯한, 그때는 젖살이 덜 빠진 그래도 나름 인기 있었던 크리스군. 하여간 그 순간에 기억나는건 크리스의 쭉 내민 입술. 입술이 다가오는걸 멍하니 보다 이만큼 왔을때 소리 지르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 잠그고 반쯤 빠져나간 혼을 겨우 붙들고 있을때, 밖에서는 웃느랴 난리났다. 크리스는 자존심이 조금 상한거 같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니. 아무튼 훈훈하게 허그로 마무리 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말해주니 완전 식겁하셨다. "여기 얘들은 조숙하게 노는구나. 큰일 날뻔 했다". 그렇다. 뽀뽀는 내 시대에 굉장히 조숙한 아이들만 하는 거다. 그리고 하면 큰일난다. 요즘 얘들은 발랑 까져가지고 에잉~ ㅉㅉ ㅋㅋㅋㅋ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때 미친척하고 할껄 그랫다. 크리스도 나름 훈남이였고, 그때 안한 덕택에 내 첫키스는 내 주변 또래 친구에 비해 평균보다 훠얼씬 늦은 때에 하게됐다 ㅠㅠㅠ 아 놔 ㅠㅠㅠㅠ 그렇다.. 나도 하긴했다. 믿어달라고오!!!
끝이 허무 OTL...너무 길게 쓰다보니 생각해내기도 귀찮아져서... 아무튼 교포라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은 항상 있으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번 여름 한국에 처음 돌아갔을때 교포에 대한 않좋은 소리를 들어서 살짝 소심해 졌습니다 ㅠㅠ). 해외에서 한국을 빛내는 다른 교포분들 & 유학생들 다들 힘내세요! 다가오는 구정 Chinese New Year가 아닌 Lunar New Year (아님 Korean New Year ㅋㅋㅋㅋ)라고 주변 사람에게 정정해 주시어요~
이민 초기때 겪었던 나의 몇가지 에피소드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저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져서 쓰게됐습니다. 일기용으로 (개인적으로) 먼저 쓰기 시작한거라 맞춤법도 다 틀리고, 낮춤말을 썻습니다. 그 점은 양해를 구해주십사~ 저 혼자만 재밌을 수도 있지만, 매일 눈팅하다 처음 쓰는 판이니 예쁘게 봐주시어용~
뉴스를 보니 졸업식 시즌이 곧 시작인가보다. 3월이 오면 내가 한국을 떠난지 9년이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여기에 도착했다. 사실 잘 알던 친구, 동네, 학교등 친근함을 벗고 낯선 곳에 산다는 두려움보단 내 안의 모험가 기질이 발동했는지 즐거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도착한 이 땅. 3월 어떤날의 늦은 밤... 하얗게 보이는 입김...소복히 쌓이는 눈... 3월이였다!!! 그날 눈 드럽게 많이 왔다 -_- 아 놔... 그때부터 이 삭막한 땅에 대한 무시무시함이 온 몸으로 느껴지더니 아까부터 아프던 고막이 아주 찢어질꺼 같더라. 진상을 떨었다. 우리 어무니 아부지 나 쥐어 패고 싶었을꺼다.
아부지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 우리 셋만 남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 엄마 깡이 너무 쎄다. 아무리 그때의 엄마가 젊었다지만, 참... 대단한 분이셔. 강한 엄마 밑에서 강하게 키워 주신 점 눈물나게 고맙수다!! (a touch of sarcasm here :D) 사실 한국에서 전화 올때마다 엄마의 눈물 보는거 그거 정말 못볼짓이다. 우리 모르게 하려고 방에서 전화 받으시는데, 나나 내 동생이나 그 꼬딱지만한 곳에서 엄마 우는 거 어찌 모르겠냐. 다 들리고 다 보였다. 진짜 그때 너무 비참했다.
비참한걸로 치면 3월 중순-말에 있었던 내 생일도 손꼽힌다. 학교 들어간지 일주일만에 봄방학이라고 문닫아 (아마 이때 뭔 말 했는지 못알아 듣고 학교 문닫힌거 보고 그냥 집에 돌아왔을꺼다), 처음으로 친구 하나 없이 생일을 보냈다. 인기가 많다고 할순 없어도, 한국에서 친구가 없는것도 아니였고, 나름 붙임성도 많아 사람 사귀는게 어려운적은 없었는데, 이때 생일이 정말 쇼크였다. 그때는 차도 없어서 전철역으로 한정거장 떨어진 영화관가서 (말이 한 정거장이지, 한국하고 스케일이 달라 도착지에 닿을 즈음이면 힘 쪽빠진다), 엄마, 나, 동생 셋이 피자 시켜먹었다. 그때 환율이 800원 정도였나? 지금하고 비교하면 엄청 싼건데 간덩어리가 작을때라 피자 가격보고 놀랐다. 췟, 나도 나름 강남 (한강의 남쪽)출신이였는데 -_- 나나 동생이나 오랫만에 먹는 피자에 환장하며 서러움따위는 금새 잊었지만, 엄마는 얼마나 맘이 않좋았을까? 한해씩 온다는 생일이지만, 이 해는 정말 잊을 수 없다. 그때의 외로움과 엄마의 서러움이 생각나 사실은 지금도 생일만 오면 부담부터 제일 먼저 든다.
첫 학교의 흑인짝궁!! 그 써글넘! 아 놔! 그 새리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오르네! 나는 처음에 나 좋아해서 괴롭힌줄 알았다. 그때는 공주병도 심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는건데 그 놈 내가 우습고 만만해서 괴롭히지 않았나 싶다. 옆에 쪼꼬만 노란 원숭이는 말도 못하지, 누가 말만 걸면 쫄아서 버벅대질 않나, 그래도 뭐 가지고 다니는거 보면 신기한 물것들 (i.e.영어 발음 들려주는 전자사전) 많지... 아오!!! 때리면 정학 당한다고 어무니가 잔뜩 겁을 줘서 갈기지도 못했다. 주먹이 운다 울어! 뭐, 내가 때려도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한국에서와 여기서 오는 전화 벨소리가 다르다. 한국에서 소리가 좀 더 길었던가? 지금은 핸드폰 링톤만 들어서 생각도 않난다. 한국에서 오면 나나 동생이 달려가 받았는데, 여기서 오면 다들 전화 받기를 꺼려했던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엄마가 받았다. 우리가 학교 다니고 말을 조금씩 트이면서 엄마가 도저히 못알아듣겠으면 나한테 넘기는데 (나름 첫째라고 -_-), 그럴때마다 짜증을 확 냈다 ... 영어가 많이 딸렸거든... 엄마 미안! 요즘도 엄마가 잡다한 집안일부터 딴 집 도와준답시고 생판 남인 꼬꼬마 유학 문제까지 나보고 전화하라 시킨다. -_- 아 놔-_- 나 아직도 영어 못한다고 -_- 내 발음 완전 구졌다고 -_- 버터 혀를 가지고 있는 동생 시키라고 -_- 그리고 내 전화비도 않내주면서 -_-
또 뭐 있더라... 아! 알렉산드라! 이 친구 정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정말 많이 도와줬었다. 특히 여기는 과제같은게 많아 반앞에서 presentation을 해야 하는데 이거 꽤 손 많이 간다. 알렉산드라가 아이디어 뱅크라 정말 즐겁게 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prime minister이름을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음을 따라 부른다던지... 뭐 그런거... 아쉽게도 내가 전학가고 걔도 가면서 연락이 끝겼지만, 지금쯤 멋진 숙녀가 됐을거라 백퍼 장담!
걔 집이 처음으로 놀러간 집이기도 했다. 한국도 그러겠지만, 여기선 특히 어정쩡한 친구 집 초대하는 일 많이 없다. 걔나 나나 반에서 아무래도 왕따여서 그런지 어정쩡에서 쪼오끔 벗어난 사이였....겠지? 내 첫학교는 카톨릭 학교여서 (불어기도문때문에 환장하는줄 알았다. 지금은 물론 불어 뿐만 아니라 한국어 기도문도 다 까먹었다), 학교 근처에 사는 얘들이 많이 없었다. 아무튼 걔네 어무니 차타고 좀 달려서 집에 도착. 머리 커지면서 안건데, 걔가 살던 동네 부자동네였더라 -_- 세상에 -_- 난 4층짜리 집 그때 처음보고 지금도 못보고 있다. 부잔거 알았으면 딱 달라붙는거였는데, 그때는 그래도 순진했나보다. 아오!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부자인거 같다. 아니, 어떤 꼬마에서 점심으로 스시를 사먹어!!!! 아무튼 걔네 집가서 뒷마당에 있는 담벼락 올라타며 놀았다 -_- 내가 미쳤나 보다 -_-
옆 불어반 여자애 생일파티 간 기억도 있다. 7학년/8학년이면 이성 호기심에 훨훨 불이 붙을때다. 꽤 큰 파티라 많이들 왔고, 어른 흉내낸다고 저녁 즈음에 시작됐다. 싸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춘들이 광란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ㅋㅋㅋㅋㅋ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다들 수줍어 했다....아마.. 그때 spin the bottle이라는 게임이 가장 생각이 난다. 콜라병같은걸 돌려 병입구가 가리키는 사람과 돌린 사람이 뽀뽀하는 야시꾸리한 게임이다. 알레산드라도 걸렸는데 돌린 남자얘가 싫어하는 티를 팍팍내 거의 울려고 했다 ㅋㅋㅋㅋㅋ 나? 나 이래봬도 양반집안에서 곱게 자란 규수다. 얌전떨면서 게임 안한다고 뒤로 빠지고 아주우우우우 (과하게) 즐겁게 관람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찌 어찌하다 사람들 틈사이로 나에게 콜라병이 수줍게 나를 향하고 있던게 아니냐!! 나 그거 돌린놈 아직도 기억한다. 크리스. 캬야! 이름부터 죽이지 않냐? 금발에 퍼런 눈에 멋진... 음? 정정: 컷으면 멋었을듯한, 그때는 젖살이 덜 빠진 그래도 나름 인기 있었던 크리스군. 하여간 그 순간에 기억나는건 크리스의 쭉 내민 입술. 입술이 다가오는걸 멍하니 보다 이만큼 왔을때 소리 지르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 잠그고 반쯤 빠져나간 혼을 겨우 붙들고 있을때, 밖에서는 웃느랴 난리났다. 크리스는 자존심이 조금 상한거 같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니. 아무튼 훈훈하게 허그로 마무리 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말해주니 완전 식겁하셨다. "여기 얘들은 조숙하게 노는구나. 큰일 날뻔 했다". 그렇다. 뽀뽀는 내 시대에 굉장히 조숙한 아이들만 하는 거다. 그리고 하면 큰일난다. 요즘 얘들은 발랑 까져가지고 에잉~ ㅉㅉ ㅋㅋㅋㅋ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때 미친척하고 할껄 그랫다. 크리스도 나름 훈남이였고, 그때 안한 덕택에 내 첫키스는 내 주변 또래 친구에 비해 평균보다 훠얼씬 늦은 때에 하게됐다 ㅠㅠㅠ 아 놔 ㅠㅠㅠㅠ 그렇다.. 나도 하긴했다. 믿어달라고오!!!
끝이 허무 OTL...너무 길게 쓰다보니 생각해내기도 귀찮아져서... 아무튼 교포라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은 항상 있으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번 여름 한국에 처음 돌아갔을때 교포에 대한 않좋은 소리를 들어서 살짝 소심해 졌습니다 ㅠㅠ). 해외에서 한국을 빛내는 다른 교포분들 & 유학생들 다들 힘내세요! 다가오는 구정 Chinese New Year가 아닌 Lunar New Year (아님 Korean New Year ㅋㅋㅋㅋ)라고 주변 사람에게 정정해 주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