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투쟁의 선도자 안중근 의사 <1>

조의선인201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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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두칠성(北斗七星)의 정기(正氣)

 

 

 

⑴ 망해가는 나라에 의열사(義烈士) 부르네



영웅(英雄)이 나타날 시대였다. 협객(俠客)이 필요한 시기였다. 사람들은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를 기다렸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폭정이 인륜을 가른 시대가 되었다. 삼천리강토가 ‘해변의 묘지’로 변해가고 민초들은 ‘자기네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의 신세가 되었다. 용자(勇者)는 칼을 갈고 인자(仁者)는 은거하고 덕자(德者)는 침을 뱉는 상황이었다. 인면(人面)의 야수(野獸)가 육신을 찢고 백귀(百鬼)가 혼을 빼앗아갔다.



4천년 조선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 숱한 외우내란을 치렀지만, 외적이 이처럼 백성을 토막치고 강토를 분탕하여 나라를 송두리째 배앗는 일은 없었다. 남쪽의 일본은 1876년 8척의 군함과 6백여명의 무장군인을 동원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한 이래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국권)을 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르기까지 온갖 협박(脅迫)과 무력(武力)으로 조선을 침략해왔다.



세계 역사상 전쟁 중이 아닌 때에 이웃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 침략 방침을 굳히고 가장 먼저 배일주의자(排日主義者)인 명성황후를 참살했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죽이고 사체마저 욕보였다. 을사늑약은 명칭 그대로 강압적으로 맺어진 괴조약이었다. 고종(高宗) 황제는 을사늑약에 조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부대신에게 조약체결의 전권을 위임한 적도 없었다. 어새(御璽)도 찍지 않았고 조약의 명칭도 없는 한갓 괴문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 측은 병력을 동원해 경운궁(慶運宮) 중명전(重明殿)을 겹겹이 포위하고 대신들을 위협해 가짜 조약을 맺도록 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보도하고,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이 을사늑약의 폐기를 상소하면서 자결하는 등 많은 애국지사의 저항이 있었지만 일제(日帝)는 침략의 야욕을 멈추지 않았다.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설치되고 3월 2일에 전임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대한제국은 허울만 남고 모든 실권은 이토 통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을사늑약은 형식상으로는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을 통감부가 행사하게 되는, 대한제국의 사망문건이었다. 한국통감부는 막강한 헌병·군사력을 동원해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짓밟고 권력을 빼앗았다.



이 해에 이항로(李恒老)의 제자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전라도 순창에서 을사늑약 반대와 일제 축출을 내걸고 의병항쟁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8월에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을사늑약 체결 뒤 많은 애국지사가 목숨을 끊자 “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겠는가?”라면서 노구를 이끌고 전라도 태인에서 봉기하였다.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1천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는데, 최익현은 6월 11일 일본군을 대신해 투입된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 전주진위대(全州鎭衛隊)에게 포위되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을 해산시키고 피체되어 일본 땅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가 단식 끝에 숨졌다.



1907년 3월,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이끄는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이 이완용(李完用)·이근택(李根澤)·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권중현(權重顯)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7월에는 황제의 친서를 가진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국제 열강의 비협조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이준 열사는 분사(憤死)했다. 



⑵ 이토 히로부미, 고종 황제 퇴위시켜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한 데 이어 신문지법을 제정해 신문발행의 허가제, 신문기사의 사전검열을 규정했다. 또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탄압할 목적으로 보안법을 만들어 집회·결사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7월 31일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인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이에 반대하여 자결했는데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봉기해 일본군과 충돌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은 수십명이 전사하고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다. 그 후 대한제국군 주력부대는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에 가세했다.



8월에는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 체결, 군대 해산 등에 맞서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군인들이 봉기하자 뒤이어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여주분견대(驪州分遣隊) 등이 민간인들과 함께 봉기하면서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해 12월 원주에서 활동하던 의병대장들은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하였다. 1908년에는 함경도의 홍범도(洪範圖)와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을 비롯해 전국의 의병대장이 241명, 의병 수는 3만여명에 이르렀다.



1908년 3월 23일에는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이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D.W.Stevens)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단하였다. 스티븐스는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 뒤 유익한 일을 많이 했다”는 따위의 망발을 하고 다녔던 인물이다. 먼저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쐈으나 불발되자 그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이 때 이 자리에 도착한 장인환이 스티븐스의 등뼈에 총탄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며칠 뒤 죽었다. 두 의사(義士)는 사전에 의거를 상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장인환은 2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0년만에 석방되었고, 전명운은 애국심에 감동한 재판관이 무죄를 선고해 풀려났다. 이 오클랜드의거(Oakland義擧)는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의 열혈 청년들에게 많은 의분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1909년 7월 일본각의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해 한국병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 사무일체를 빼앗았다. 그리고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저항하고 있는 의병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할 목적으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벌였다. 의병학살작전(義兵虐殺作戰)이었다. 당시 전라도 지방에서는 수많은 의병 소부대와 2백여명이 넘는 의병 대부대들이 일본군을 대적하여 치열한 유격전(遊擊戰)을 벌이고 있었다.



일제는 이들을 소탕하고자 2천여명의 정예병력을 파견하고 현지 경찰과 밀정들을 동원해 의병학살작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마을 외곽에 포위망을 치고 점차 좁혀 들어가서 마을 주민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 마을을 불태우고 양곡과 가축을 탈취하거나 소각했다. 살상·방화·약탈·폭행이 난무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작전이 진행된 2개월 동안 수많은 의병들이 현장에서 총살되거나 사로잡혔다. 이후 국내의 의병항쟁은 차츰 수그러들었고 남은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나 연해주로 건너갔다.



당시 충북 제천에서 의병학살작전을 취재한 캐나다 출신 신문기자 맥켄지는 “온전한 벽도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그릇도 하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면서 끔찍한 초토화 현장을 보도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哈爾濱]에서 처단한 사건은, 이처럼 조선의 국맥이 끊어지고 민중이 사지에서 참담하게 신음할 때 일어났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尹東柱)의 이 시(詩)는 ‘풀 한 포기 없는’ 조국강산의 모습을 상징한다. 1941년에 발표된 시지만 일제가 남한의병학살작전인 ‘삼광작전’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조선은 ‘풀 한 포기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극한의 처지에서도 ‘잃은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열사가 그랬고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안중근도 있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