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 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서까래이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소쇄원도의 고암정사
고암정사는「소쇄원도」에만 그려져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 건물이다.
내원에서 담으로 구획된 영역의 바깥쪽에 있는 정면 3칸의 건물로서 담으로 구획된 영역의 바깥쪽에 있는 정면 3칸의 건물로서 건물 이름으로 보아 양산보의 아들인 고암공 양자징이 세운 것 이라 생각된다. 48영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소쇄원 조영초기에는 없었고, 양자징이 거창현감을 제수받은 1570년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쇄원도」에는 담장안 뿐만 아니라 밖에도 여러 시설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이 소쇄원의 직접적인 구성요소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관계가 있었음을 분명할 것이다. 흔히 소쇄원의 영역을 담장 안으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넓은 범위까지 확대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몰리진 않았지만 간간히 관광객들이 들어온다
사람피해서 찍으려고 이러저리 돌아다녔다는......
소쇄원 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소쇄원의 내원에 있는 요소들은 「무이구곡」에서 소재로 삼았을 법한 것들이 많은데, 즉 「무이구곡」에서 비롯되어 무이정사를 경영하였던 예와 같이 제월당은 4~5곡 간에 정사를 둔 것으로 구곡경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겠다.
그 건축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 팔작지붕의 한식기와 건물이다. 광풍각의 배면에 여러개의 단을 올려 주거형식으로 건축하여 전면에 마당을 두었다. 좌측 1칸은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중앙칸과 우측 1칸은 장귀틀과 동귀틀을 갖춘 우물마루구조인데, 전면과 좌측면은 개방되어 있는 반면에 뒷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한 높이 1.3m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도리와 장혀, 보아지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한 형태로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에는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며 추녀 끝에는 팔각의 활주를 세우고 합각부분에서 우미량 형태의 충량이 보와 연결된다. 제월당은 소당, 고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소쇄원을 둘러본후 찾아간 곳이 옥정호다
옥정호에 도착해 국사봉으로 자리를 옮기자니 국사봉에 도착했을쯤이면
어두워져 내려올때 고생을 할것같아 옥정호는 다음에 오기를 기약하고
핸드폰으로 사진한장 달랑찍고
대전으로 핸들을 돌린다
내려오면서 대청댐이나 식장산을 들러 야경좀 찍어볼까란 생각도 했었는데
운전을 너무 많이 한탓인가 살짝 피곤하고 귀찮기도 하다
대청댐이나 식장산은 언제든지 갈수 있는 곳이기에 전라남북도를 돌아다닌 것을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전라도 담양 소쇄원을 다녀오다~~~~~~~
담양 소쇄원
바로 어제 다녀온 곳이다
원래는 옥정호 국사봉을 찾아가려했으나 국사봉은 해뜨기전에 가야지만
참된 아름다움과 경관을 볼수가 있다
전 날 낚시를 다녀와서 그런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허탈하게 앉아있느니 딴 곳으로 돌려보자하고 찾아간 곳이 창평에 있는 슬로시티를 찾아간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들른곳 이기도하다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여기는 봄 가을로 찾아갈 것을 추천한다
주차장에 2000원을 내고 차량을 주차를 시킨후 눈에 익숙한 길을 걷는다
천막 다음에 있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건물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개인은 1000원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대나무향내음에 머리가 상쾌해진다
원래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대나무를 이용한 공예품과 맛깔스런 음식들로 유명한 곳이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메타쉐케이어길과 대나무 테마공원도 모두 하루 코스로 돌아볼수있는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열손가락안에 꼽힐수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할수있다
개인적으로 금산 적벽강 다음으로 담양을 선호하는 여행지기도 하다
소쇄원을 돌아보는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허비되질않는다
소쇄원도에 나와있는 많은 건축물들이 소실되있기 때문일것이다
초입을 지나서 반겨주는 대나무숲에서 방목해서 키우는 닭들과 오리들이다
어제 낚시터에서 백숙을 해먹었는데 이놈의 닭들을 보고있자니 튼실한게 맛깔나게 생각하니
나도 닭이란놈을 무지하게 좋아하나부다
바로 내뒤에서 여행을 온듯한 여인네3명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돌아다닌다
어찌하다보니 한명을 카메라에 담고말았다
고의로 찍은건 아니다
릴리즈 꽂아두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친구놈이 전화하는 바람에 통화하면서 릴리즈를 눌렀는데
집에와서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이 사진이있다
여긴 벌써 봄인가부다
바람만 그리불지 않았다면 꽤좋은 여행이 될수도 있었는데
초봄의 냉풍은 겨울점퍼를 옷장에도 모두 집어넣고 간단한 복장으로 나온 나에게는
어깨를 움추리게 만든다
광풍각
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 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서까래이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소쇄원도의 고암정사
고암정사는「소쇄원도」에만 그려져 있을 뿐 현존하지 않는 건물이다.
내원에서 담으로 구획된 영역의 바깥쪽에 있는 정면 3칸의 건물로서 담으로 구획된 영역의 바깥쪽에 있는 정면 3칸의 건물로서 건물 이름으로 보아 양산보의 아들인 고암공 양자징이 세운 것 이라 생각된다. 48영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소쇄원 조영초기에는 없었고, 양자징이 거창현감을 제수받은 1570년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쇄원도」에는 담장안 뿐만 아니라 밖에도 여러 시설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이 소쇄원의 직접적인 구성요소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관계가 있었음을 분명할 것이다. 흔히 소쇄원의 영역을 담장 안으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넓은 범위까지 확대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몰리진 않았지만 간간히 관광객들이 들어온다
사람피해서 찍으려고 이러저리 돌아다녔다는......
소쇄원 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지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소쇄원의 내원에 있는 요소들은 「무이구곡」에서 소재로 삼았을 법한 것들이 많은데, 즉 「무이구곡」에서 비롯되어 무이정사를 경영하였던 예와 같이 제월당은 4~5곡 간에 정사를 둔 것으로 구곡경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겠다.
그 건축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 팔작지붕의 한식기와 건물이다.
광풍각의 배면에 여러개의 단을 올려 주거형식으로 건축하여 전면에 마당을 두었다. 좌측 1칸은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중앙칸과 우측 1칸은 장귀틀과 동귀틀을 갖춘 우물마루구조인데, 전면과 좌측면은 개방되어 있는 반면에 뒷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한 높이 1.3m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도리와 장혀, 보아지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한 형태로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에는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며 추녀 끝에는 팔각의 활주를 세우고 합각부분에서 우미량 형태의 충량이 보와 연결된다. 제월당은 소당, 고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소쇄원을 둘러본후 찾아간 곳이 옥정호다
옥정호에 도착해 국사봉으로 자리를 옮기자니 국사봉에 도착했을쯤이면
어두워져 내려올때 고생을 할것같아 옥정호는 다음에 오기를 기약하고
핸드폰으로 사진한장 달랑찍고
대전으로 핸들을 돌린다
내려오면서 대청댐이나 식장산을 들러 야경좀 찍어볼까란 생각도 했었는데
운전을 너무 많이 한탓인가 살짝 피곤하고 귀찮기도 하다
대청댐이나 식장산은 언제든지 갈수 있는 곳이기에 전라남북도를 돌아다닌 것을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