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수많은 전쟁사를 들춰보아도 사람의 탈을 쓰고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전쟁이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1592년-1598년)이었다. 얼굴 한복판에 있는 코를 끊었다. 일본인들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악행, ‘코 무덤’이라는 작태는 피를 거꾸로 치솟게 했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승전보로 갓 태어난 어린핏덩이로부터 남녀노소, 전사한 군인들의 코는 물론 살아있는 양민들의 코까지 베었다. 한 번도 모자라 우리 선조들을 두 번씩이나 죽이는 악행에 치를 떨게 했다. 괴물스런 전승기념물은 버젓이 일본에서 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 받들고 있는 실정은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코 무덤이 품고 있는 영혼들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400여 년 전의 참혹한 참상을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안일한 후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교토시 히가시쿠의 교토박물관 옆에 위치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에 있는 이총에 이어, 당시 오카야마 현 비젠시에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성주가 베어간 코의 무덤이 있었다. 부산에 있는 한 대학교수로부터 코 무덤의 실체를 알게 된 삼중스님은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선봉장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고갔다. 그래서 코 무덤 천인비총(千人鼻塚)은 일본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렵사리 고국의 품까지 안기는 것에 힘을 보탰으나 그 뒤는 잊혀졌다. 400년 동안 내팽개쳐 두었다가는 고국에 와서도 누구하나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 기막힌 사연에 삼중스님의 가슴은 피멍이 쌓여만 갔다.
코 무덤의 환국안장 후 천시
1993년 11월 26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胡伐峙) 유적지에 일본에서 환국한 코 무덤의 봉안식이 거행됐다. 삼중스님을 필두로 각계에서 2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천주교. 유교. 불교의식으로 안장식이 진행되었다. 일본 비젠시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왔다는 로고스게(임진왜란 당시 일본병사) 후손 등 일본스님을 비롯한 1백 10여 명도 참석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했다. 400년 만에 흰 도자기에 담겨진 흙으로 돌아온 조상들의 추도식은 어디 하나 손색이 없게 화려했다.거국적인 환국 안장식을 끝으로 전북 부안의 호벌치에는 묘비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았다. 일본 비젠시에서는 해마다 제사라도 지내주는 일본인들이라도 있었지만, 고국에서는 무슨 놈의 제사, 그냥 돌 박스에 처넣었다.1991년 겨울, 코 무덤의 안장할 자리는 처음부터 꼬인 채 문제가 되었다. 여수에서 유명했던 한 유지는 코 무덤의 이장 장소에 여수의 충민사를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수의 공보실장은 충민사의 안장식을 막았다. 패전의 슬픈 역사를 충무공이 남긴 승전의 도시 여수로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부에서는 코 무덤을 어찌 된 사유인지는 몰라도 패전의 슬픈 역사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부렸다. 그래서 코 무덤은 삼중스님의 조그만 암자, 자비사에 모셔두어야 했다.그러던 어느 날 부안 문화원에 있는 군수가 코 무덤의 안장식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안에는 허벌치의 유족지가 성역화 되여 있는 곳이었다. 허벌치의 유족지 옆에 코 무덤을 안장해서 곧 성역화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 연유에 1993년, 2천명이나 되는 거창한 추모행렬로 맞으면서 자비사에서 허벌치로 코 무덤은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허벌치의 코 무덤에는 표시판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 더욱이 부안군수와 문화원장이 바뀌면서 허벌치 유적지의 공보부 직원은 시비를 걸었다. “삼중스님! 5~6년 전쯤 뭘 가져다 놓았나요? 귀찮으니, 빨리 가져가시죠. 스님이 임시로 모셔다 놓고 이렇게 내쳐 놓으면 안 되죠”는 항의 전화에 삼중스님의 속은 시꺼멓게 탔다.
꿈에 나타 난 코 무덤 영혼
삼중스님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강조했다. “내가 일본에서 코 무덤을 모시고 온 일이니, 내 절에 모시고 싶다. 역사적 당의성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국가가 관리하지 않겠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제를 한번 지내지 않는 곳에서는 떠나야 한다. 모실 때 전송의식을 화려하게 할 것까지는 없지만 당당하게 모시고 싶다. 내가 마련한 경주의 5만평 대지에 절을 지을 예정이다. 경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코 무덤을 모실 좋은 장소이다. 임진왜란 때의 수치를 우리 후손들의 가슴에 남길 좋은 교육도량으로 만들고 싶다. 내가 모셔다가 잘 관리해 놓은 후에는 시 관리로 넘기고 싶다.”이런 염원으로 삼중스님은 지난해에 코 무덤을 이장했던 원적지를 찾았다. 오카야마 현 비젠시(備前市) 숲속, 야산 기슭에 조그만 신사가 그리웠다. 그 곳에 도착할 때가지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숲에 들어가려하는 시점에 다행히 비는 그쳤다. 그런데 누군가가 길목을 정돈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들어가는 길목의 잡초와 잡목들이 베어진 채, 수북이 오솔길 옆에 쌓아 놓았다. 마치 삼중스님이 신사에 잘 올라가도록 사전에 길목을 터놓은 것 같았다.비온 끝이지만 표시판 옆에는 원적지의 큰 돌이 지키고 있었다. 표시판에는 후손 로고스게의 선조 묘라는 설명에 이어서 400년 동안 함께 묻혀있던 조선인의 코 무덤은 고국으로 이장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코 무덤보다 먼저 고국에 건너 온 교토 시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에 묻혀있던 이총은 단지 영혼만을 이장했다. 문화유적지로 지정된 이총의 이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비겐시의 코 무덤, 천인비총은 100% 완벽하게 이장을 끝마친 연유로 표시판의 설명은 정확히 기록됐다.
삼중스님은 신사를 내려오는 길에 로고스게의 후손을 찾았다. 8년 전에 한두 번 만났던 인연이라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후손의 집을 묻기 위해서 신사의 밑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던 남자는 삼중스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도 로고스게의 후손이라면서 묻지도 않는 어제 밤의 꿈 이야기를 꺼냈다.“어제 밤 꿈에 코 무덤의 영혼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준 스님이 오시는데 길을 좀 깎아 놓아라. 꿈이 하도 이상한지라 영문도 모른 채 아침녘에 숲속 길을 치웠다. 그런데 다 치우고 한숨 돌리는 사이에 스님 한 분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장삼만 걸쳤지 스님 아니다
코 무덤의 이장식을 거행했던 8년 전에는 비젠시에 살지 않았다는 남자는 스님의 출현에 아연질색을 한 모습이었다. 귀신 까마귀 날아 간 말처럼 남자의 꿈 이야기에 같이 간 사람들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삼중스님 역시 영혼이야기에 소름이 돋았다.“언제 어디서나 힘든 일이 많다. 당뇨병 중증 환자라 법문하기가 힘들다. 강사료 를 벌려는 욕심에 근래에는 법문을 한다. 법문 뒤의 상업적인 진풍경은 나를 힘들게 한다.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법문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부리나케 뜬다. 그러다가 어제는 허리가 삐끗했다. 서서 강의 한다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서글펐다. 서서 그 짓을 하다니 뭐 그리 돈이 필요 하는지 추했다. 일도 좋지만 좀 쉬어야 된다고 내 자신에게 타일렀다.”삼중스님은 심한 당뇨로 인해 치아시술을 받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니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치아로 매끼 식사가 문제였다. 그러면서 법문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다시 말하면 스님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자신을 고백하는 스님의 말씨에서 진실이 묻어 나왔다.
“사실상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코 무덤은 마무리하고 싶다. 코 무덤뿐만 아니라 마무리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내가 힘이 들 때마다 기도한다. 누구한테 기도를 하느냐? 난 부처님한테 기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추하다는 마음에 기도를 올릴 수 없다. 내가 깨달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을 평탄하게 마무기 짓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항상 어느 곳에다 얼마의 돈을 주어야 하는데, 일을 하지 않으면 꾸려가지 못한다. 돈 쓸데는 많고 할 수 없어서 법문을 한다. 힘들 때가 많다. 이런 바탕은 스님으로 기도 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이총과 코 무덤의 영혼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나하고 인연이 있지 않느냐? 당신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았느냐? 정통 승려가 할 말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이총과 코 무덤의 영혼, 사형수 고금석의 영혼을 향해 염주를 굴리면서 기도를 한다. 기도만 하면 무슨 일이든 잘 풀린다. 이리 살다보니 내 자신에게 물었다. 니 삶이 뭐냐? 난 스님이 아니다. 난 안다. 스님이란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율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난 한 가지도 못 지킨다. 장삼만 걸쳤지 난 스님이 아니다. 신도가 절하면 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큰스님에게나 절을 하시오. 나 같은 중에게 무슨 절이요.’ 그런 양심은 있다. 다음 생에는 좋은 스님이 되고 싶다.”
왜 전라도 사람들의 코만?
임진왜란 때 전라도 사람들 상당수는 얼굴에 코가 없었다. 오래 붙어져 검게 된 천이 얼굴 복판에 있었다. 충무공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왜군들은 죽은 자의 코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코를 떼어갔다. 소금에 절여진 코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 선조들의 치욕이었다. 슬픈 역사인 귀 무덤에 이어 코 무덤이 있다는 간절한 편지 한 통이 삼중스님에게 날아들었다. 삼중스님은 편지를 받자마자 편지봉투의 주소지, 부산에 있는 대학교수에게 전화했다.“스님! 귀 무덤만 있는 게 아니라 오카야마 현에 있는 코 무덤도 있어요. 그것도 모시고 오세요.”그 시절은 삼중스님은 가진 게 없어서 그랬는지 지금보다 열정은 대단했다. 그래서 대학교수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오카야마 현 비젠시(備前市)에 또 다른 코 무덤 천인비총(千人鼻塚)은 꼭꼭 숨어있었다. 산골짜기 조그만 사당에는 조선인의 코 무덤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400년 만에 한국스님이 와서 과일을 올리고 막걸리를 부어놓고 목탁을 두들겼다. 코 무덤을 발견한 대학교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함께 했다. 우연하게 발견한 코 무덤에 한국인과 한국 스님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코 무덤 앞에 서서 염불을 올리니 눈물이 저절로 넘쳤다. 400여년 만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제를 지내는 모습에 함께한 일본인들도 거들었다.
이리 방문한 목적은 단지 코 무덤의 영혼들에게 인사를 올리려했다. 놀란 가슴에 코 무덤을 확인하러 왔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아무런 생각 없이 찾아왔으나 슬픈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코 무덤의 묘에 매년 제를 지내 준 일본인들이 있었다. 자신의 선조의 묘를 모신 후손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령으로 조선병사의 코를 끊은 후손들이었다. 부피가 나가는 머리를 대신하여 코를 끊어서 포상을 받으려 했던 선조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라는 지역을 지목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의병에게 당한 치욕스런 패배를 기억했다. 아예 해변에 진입을 하지 못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도 전라도의 저항의식은 철저했다. 당쟁의 피해자, 낙향자들의 후손들이었으니 피는 속이지 못했다. 그러니 미움을 샀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땅 호남놈들의 코를 끊어라”라는 명령에 따라 악행은 거침없었다.
14대 후손이 지키는 코 무덤
조선인의 코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도착해보니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은 뒤였다. 포상은 받지 못한 채 비젠시의 성주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소금에 절인 코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비젠시의 성주를 따라 임진왜란에 징벌되었던 로고스게는 영혼의 존재를 신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젠시 고향의 야산 숲속에 조선인의 코 무덤을 만들면서 조그만 사당까지 지었다.
로고스게는 슬프게 죽어가면서 저항했던 조선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전쟁의 망령들이 날뛰던 시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죄업을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후손들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코 무덤에다가 나를 같이 묻어 달라, 속죄를 하고 싶다. 전쟁터에서 내가 저질렀던 악행에 대해 코 무덤에 묻힌 영혼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표시판에는 천인비총(千人鼻塚))이라 적혀 있는 천개의 숫자는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2만개라고 적혀있다. 400년 동안 대대로 14대 후손은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14대 후손들은 입을 모아서 자신의 선조 묘는 영험이 있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감기가 들거나,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일본인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신앙과 같다. 지위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는 신사에 있는 영혼에게 기원한다.
삼중스님은 염불을 끝내고 나니 울분이 끓었다. 어느 새 코 무덤의 사당 주변에는 로고스게 후손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을 즉흥적으로 했다. 물론 통역자를 통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스님이다. 참으로 오늘은 슬픈 날이다. 4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과 막걸리로 내 선조들의 영혼에 첫 인사를 드렸다. 순국한 혼령들이 내 눈에는 보인다. 구천에서 통곡하는 모습이었다. 고맙다면서 간절한 부탁을 나한테 했다. 코를 잘려 이리 구천에 떠도는 것도 억울하지만, 400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이제 우리도 이총과 같이 조국으로 데려다달라고 애원했다.”
코(nose)무덤을 아시나요?
세계 수많은 전쟁사를 들춰보아도 사람의 탈을 쓰고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전쟁이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1592년-1598년)이었다. 얼굴 한복판에 있는 코를 끊었다. 일본인들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악행, ‘코 무덤’이라는 작태는 피를 거꾸로 치솟게 했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승전보로 갓 태어난 어린핏덩이로부터 남녀노소, 전사한 군인들의 코는 물론 살아있는 양민들의 코까지 베었다. 한 번도 모자라 우리 선조들을 두 번씩이나 죽이는 악행에 치를 떨게 했다. 괴물스런 전승기념물은 버젓이 일본에서 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 받들고 있는 실정은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코 무덤이 품고 있는 영혼들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400여 년 전의 참혹한 참상을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안일한 후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교토시 히가시쿠의 교토박물관 옆에 위치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에 있는 이총에 이어, 당시 오카야마 현 비젠시에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성주가 베어간 코의 무덤이 있었다. 부산에 있는 한 대학교수로부터 코 무덤의 실체를 알게 된 삼중스님은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선봉장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고갔다. 그래서 코 무덤 천인비총(千人鼻塚)은 일본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렵사리 고국의 품까지 안기는 것에 힘을 보탰으나 그 뒤는 잊혀졌다. 400년 동안 내팽개쳐 두었다가는 고국에 와서도 누구하나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 기막힌 사연에 삼중스님의 가슴은 피멍이 쌓여만 갔다.
코 무덤의 환국안장 후 천시
1993년 11월 26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胡伐峙) 유적지에 일본에서 환국한 코 무덤의 봉안식이 거행됐다. 삼중스님을 필두로 각계에서 2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천주교. 유교. 불교의식으로 안장식이 진행되었다. 일본 비젠시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제사를 지내왔다는 로고스게(임진왜란 당시 일본병사) 후손 등 일본스님을 비롯한 1백 10여 명도 참석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사죄했다. 400년 만에 흰 도자기에 담겨진 흙으로 돌아온 조상들의 추도식은 어디 하나 손색이 없게 화려했다.거국적인 환국 안장식을 끝으로 전북 부안의 호벌치에는 묘비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았다. 일본 비젠시에서는 해마다 제사라도 지내주는 일본인들이라도 있었지만, 고국에서는 무슨 놈의 제사, 그냥 돌 박스에 처넣었다.1991년 겨울, 코 무덤의 안장할 자리는 처음부터 꼬인 채 문제가 되었다. 여수에서 유명했던 한 유지는 코 무덤의 이장 장소에 여수의 충민사를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수의 공보실장은 충민사의 안장식을 막았다. 패전의 슬픈 역사를 충무공이 남긴 승전의 도시 여수로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 코무덤 환국 행사. ©브레이크뉴스
▲ 일본여성들은 과거의 코무덤을 만든 선조들의 죄과를 사죄했다. ©브레이크뉴스
▲ 코무덤 환국 행사. ©브레이크뉴스
정부에서는 코 무덤을 어찌 된 사유인지는 몰라도 패전의 슬픈 역사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부렸다. 그래서 코 무덤은 삼중스님의 조그만 암자, 자비사에 모셔두어야 했다.그러던 어느 날 부안 문화원에 있는 군수가 코 무덤의 안장식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안에는 허벌치의 유족지가 성역화 되여 있는 곳이었다. 허벌치의 유족지 옆에 코 무덤을 안장해서 곧 성역화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 연유에 1993년, 2천명이나 되는 거창한 추모행렬로 맞으면서 자비사에서 허벌치로 코 무덤은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허벌치의 코 무덤에는 표시판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 더욱이 부안군수와 문화원장이 바뀌면서 허벌치 유적지의 공보부 직원은 시비를 걸었다. “삼중스님! 5~6년 전쯤 뭘 가져다 놓았나요? 귀찮으니, 빨리 가져가시죠. 스님이 임시로 모셔다 놓고 이렇게 내쳐 놓으면 안 되죠”는 항의 전화에 삼중스님의 속은 시꺼멓게 탔다.
꿈에 나타 난 코 무덤 영혼
삼중스님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강조했다. “내가 일본에서 코 무덤을 모시고 온 일이니, 내 절에 모시고 싶다. 역사적 당의성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국가가 관리하지 않겠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제를 한번 지내지 않는 곳에서는 떠나야 한다. 모실 때 전송의식을 화려하게 할 것까지는 없지만 당당하게 모시고 싶다. 내가 마련한 경주의 5만평 대지에 절을 지을 예정이다. 경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코 무덤을 모실 좋은 장소이다. 임진왜란 때의 수치를 우리 후손들의 가슴에 남길 좋은 교육도량으로 만들고 싶다. 내가 모셔다가 잘 관리해 놓은 후에는 시 관리로 넘기고 싶다.”이런 염원으로 삼중스님은 지난해에 코 무덤을 이장했던 원적지를 찾았다. 오카야마 현 비젠시(備前市) 숲속, 야산 기슭에 조그만 신사가 그리웠다. 그 곳에 도착할 때가지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숲에 들어가려하는 시점에 다행히 비는 그쳤다. 그런데 누군가가 길목을 정돈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들어가는 길목의 잡초와 잡목들이 베어진 채, 수북이 오솔길 옆에 쌓아 놓았다. 마치 삼중스님이 신사에 잘 올라가도록 사전에 길목을 터놓은 것 같았다.비온 끝이지만 표시판 옆에는 원적지의 큰 돌이 지키고 있었다. 표시판에는 후손 로고스게의 선조 묘라는 설명에 이어서 400년 동안 함께 묻혀있던 조선인의 코 무덤은 고국으로 이장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코 무덤보다 먼저 고국에 건너 온 교토 시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에 묻혀있던 이총은 단지 영혼만을 이장했다. 문화유적지로 지정된 이총의 이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비겐시의 코 무덤, 천인비총은 100% 완벽하게 이장을 끝마친 연유로 표시판의 설명은 정확히 기록됐다.
삼중스님은 신사를 내려오는 길에 로고스게의 후손을 찾았다. 8년 전에 한두 번 만났던 인연이라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후손의 집을 묻기 위해서 신사의 밑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던 남자는 삼중스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도 로고스게의 후손이라면서 묻지도 않는 어제 밤의 꿈 이야기를 꺼냈다.“어제 밤 꿈에 코 무덤의 영혼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준 스님이 오시는데 길을 좀 깎아 놓아라. 꿈이 하도 이상한지라 영문도 모른 채 아침녘에 숲속 길을 치웠다. 그런데 다 치우고 한숨 돌리는 사이에 스님 한 분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장삼만 걸쳤지 스님 아니다
코 무덤의 이장식을 거행했던 8년 전에는 비젠시에 살지 않았다는 남자는 스님의 출현에 아연질색을 한 모습이었다. 귀신 까마귀 날아 간 말처럼 남자의 꿈 이야기에 같이 간 사람들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삼중스님 역시 영혼이야기에 소름이 돋았다.“언제 어디서나 힘든 일이 많다. 당뇨병 중증 환자라 법문하기가 힘들다. 강사료 를 벌려는 욕심에 근래에는 법문을 한다. 법문 뒤의 상업적인 진풍경은 나를 힘들게 한다.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법문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부리나케 뜬다. 그러다가 어제는 허리가 삐끗했다. 서서 강의 한다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서글펐다. 서서 그 짓을 하다니 뭐 그리 돈이 필요 하는지 추했다. 일도 좋지만 좀 쉬어야 된다고 내 자신에게 타일렀다.”삼중스님은 심한 당뇨로 인해 치아시술을 받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니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치아로 매끼 식사가 문제였다. 그러면서 법문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다시 말하면 스님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자신을 고백하는 스님의 말씨에서 진실이 묻어 나왔다.
“사실상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코 무덤은 마무리하고 싶다. 코 무덤뿐만 아니라 마무리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내가 힘이 들 때마다 기도한다. 누구한테 기도를 하느냐? 난 부처님한테 기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추하다는 마음에 기도를 올릴 수 없다. 내가 깨달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을 평탄하게 마무기 짓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항상 어느 곳에다 얼마의 돈을 주어야 하는데, 일을 하지 않으면 꾸려가지 못한다. 돈 쓸데는 많고 할 수 없어서 법문을 한다. 힘들 때가 많다. 이런 바탕은 스님으로 기도 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이총과 코 무덤의 영혼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나하고 인연이 있지 않느냐? 당신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았느냐? 정통 승려가 할 말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이총과 코 무덤의 영혼, 사형수 고금석의 영혼을 향해 염주를 굴리면서 기도를 한다. 기도만 하면 무슨 일이든 잘 풀린다. 이리 살다보니 내 자신에게 물었다. 니 삶이 뭐냐? 난 스님이 아니다. 난 안다. 스님이란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율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난 한 가지도 못 지킨다. 장삼만 걸쳤지 난 스님이 아니다. 신도가 절하면 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큰스님에게나 절을 하시오. 나 같은 중에게 무슨 절이요.’ 그런 양심은 있다. 다음 생에는 좋은 스님이 되고 싶다.”
왜 전라도 사람들의 코만?
임진왜란 때 전라도 사람들 상당수는 얼굴에 코가 없었다. 오래 붙어져 검게 된 천이 얼굴 복판에 있었다. 충무공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왜군들은 죽은 자의 코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코를 떼어갔다. 소금에 절여진 코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 선조들의 치욕이었다. 슬픈 역사인 귀 무덤에 이어 코 무덤이 있다는 간절한 편지 한 통이 삼중스님에게 날아들었다. 삼중스님은 편지를 받자마자 편지봉투의 주소지, 부산에 있는 대학교수에게 전화했다.“스님! 귀 무덤만 있는 게 아니라 오카야마 현에 있는 코 무덤도 있어요. 그것도 모시고 오세요.”그 시절은 삼중스님은 가진 게 없어서 그랬는지 지금보다 열정은 대단했다. 그래서 대학교수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오카야마 현 비젠시(備前市)에 또 다른 코 무덤 천인비총(千人鼻塚)은 꼭꼭 숨어있었다. 산골짜기 조그만 사당에는 조선인의 코 무덤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400년 만에 한국스님이 와서 과일을 올리고 막걸리를 부어놓고 목탁을 두들겼다. 코 무덤을 발견한 대학교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함께 했다. 우연하게 발견한 코 무덤에 한국인과 한국 스님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코 무덤 앞에 서서 염불을 올리니 눈물이 저절로 넘쳤다. 400여년 만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제를 지내는 모습에 함께한 일본인들도 거들었다.
이리 방문한 목적은 단지 코 무덤의 영혼들에게 인사를 올리려했다. 놀란 가슴에 코 무덤을 확인하러 왔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아무런 생각 없이 찾아왔으나 슬픈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코 무덤의 묘에 매년 제를 지내 준 일본인들이 있었다. 자신의 선조의 묘를 모신 후손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령으로 조선병사의 코를 끊은 후손들이었다. 부피가 나가는 머리를 대신하여 코를 끊어서 포상을 받으려 했던 선조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라는 지역을 지목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의병에게 당한 치욕스런 패배를 기억했다. 아예 해변에 진입을 하지 못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도 전라도의 저항의식은 철저했다. 당쟁의 피해자, 낙향자들의 후손들이었으니 피는 속이지 못했다. 그러니 미움을 샀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땅 호남놈들의 코를 끊어라”라는 명령에 따라 악행은 거침없었다.
14대 후손이 지키는 코 무덤
조선인의 코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도착해보니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은 뒤였다. 포상은 받지 못한 채 비젠시의 성주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소금에 절인 코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비젠시의 성주를 따라 임진왜란에 징벌되었던 로고스게는 영혼의 존재를 신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젠시 고향의 야산 숲속에 조선인의 코 무덤을 만들면서 조그만 사당까지 지었다.
로고스게는 슬프게 죽어가면서 저항했던 조선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전쟁의 망령들이 날뛰던 시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죄업을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후손들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코 무덤에다가 나를 같이 묻어 달라, 속죄를 하고 싶다. 전쟁터에서 내가 저질렀던 악행에 대해 코 무덤에 묻힌 영혼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표시판에는 천인비총(千人鼻塚))이라 적혀 있는 천개의 숫자는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2만개라고 적혀있다. 400년 동안 대대로 14대 후손은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14대 후손들은 입을 모아서 자신의 선조 묘는 영험이 있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감기가 들거나,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일본인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신앙과 같다. 지위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는 신사에 있는 영혼에게 기원한다.
삼중스님은 염불을 끝내고 나니 울분이 끓었다. 어느 새 코 무덤의 사당 주변에는 로고스게 후손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을 즉흥적으로 했다. 물론 통역자를 통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스님이다. 참으로 오늘은 슬픈 날이다. 4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과 막걸리로 내 선조들의 영혼에 첫 인사를 드렸다. 순국한 혼령들이 내 눈에는 보인다. 구천에서 통곡하는 모습이었다. 고맙다면서 간절한 부탁을 나한테 했다. 코를 잘려 이리 구천에 떠도는 것도 억울하지만, 400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이제 우리도 이총과 같이 조국으로 데려다달라고 애원했다.”
출처: 브레이크 뉴스
너무나 참혹해서 올려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