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각종 극악무도한 범죄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나는 앤서니 버지스의 문제적인 텍스트인 '시계태엽 오렌지'가 생각난다. 단순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조합의 제목에 끌려서 보게 된 이 영화의 매력은 나로 하여금 되풀이 하여 5번이나 보게 했으며 결국 원작소설까지 읽게 했다.
제목에서 말하는 태엽달린 오렌지는 주인공인 알렉스를 상징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알렉스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교도소에서’,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오고 나서’ 이렇게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좋아하는 알렉스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약물을 탄 우유를 마시며 강도, 폭행, 살인, 강간을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저지르고 다니는 10대 청소년이다. 알렉스와 친구들은 노숙자를 폭행하기도 하고 알렉산더(아이러니 하게도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라는 작가의 집에 들어가 그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고 강간한다. 어느 중년의 여자 집에 들어가서 그 여자를 죽이던 날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14년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 된다. 그는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흥분을 느끼는 사디스트이다.
교도소에서 2년이 지난 후 새 정부가 ‘루드비코 치료법’이라는 것을 만든다. 알렉스는 이 프로그램의 실험자로 자원하고 2주간의 치료를 받은 후 석방된다. ‘루드비코 치료법’은 역겨움을 유발하는 약물을 투여한 후 폭행, 강도, 살인, 강간 등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영화를 보여주는 것인데, 나중에는 약물 없이 그러한 생각만 해도 심한 역겨움과 호흡곤란에 이르는 지경이 되는 치료법으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하지만 그가 본 영화들의 배경음악으로 9번 교향곡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 음악소리에도 심한 호흡곤란과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2주후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길을 떠돌던 중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한다. 그는 전혀 저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심한 호흡곤란과 구토증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9번 교향곡을 듣고 심한 구토 증세를 느끼고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는 다행히 구조되고 정부에 의해 ‘심층 수면 학습’을 받고 예전의 상태로 회복된다. 그 무렵 정부 내무장관은 알렉스의 병실에 방문하여 정부에 대해 유리한 진술을 해줄 것을 약속받고 좋은 직장을 줄 것을 약속한다.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 나온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순종의 시금석으로 자유의지를 선악과와 함께 주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금단의 나무인 선악과에 손을 대지 못하게 붙드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독재적 율법이라는 사단의 비난이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알렉스처럼 하나의 태엽달린 오렌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큐브릭은 영화에서 알렉스의 범죄행위와 ‘루드비코 치료법’을 각각 양쪽의 극단으로 표현하여 대조한다. 이런 극단적인 묘사는 우리에게 딜레마를 제공한다.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반대편에서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는 선악과를 선택할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루드비코 요법’이 진정으로 알렉스를 선한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우리의 이런 순진한 물음에 루드비코 치료법을 만든 브로드스키 박사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동기라든가 고차원적인 윤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범죄를 줄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요.”
그리고 알렉스는 괴로워서 태엽감이 감긴 오렌지처럼 말한다. “저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아요. 그건 잘못이죠, 그건 사회라는 것에 반항하는 일이니까요.” 그는 노숙자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폭력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고 고통과 메스꺼움을 피하기 위해 “제발 댁을 위해 뭐라도 하게 해주세요. 제발.” 이라고 사정 한다. 그는 왼쪽 뺨을 맞았을 때 오른쪽 뺨을 때려달라고 사정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것은 선한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선악과가 없는 에덴동산은 진정한 선이 아닌 것이다. 알렉스는 루드비코 치료를 받은 후에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지만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은 아니었다.
최근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성 범죄자들의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화학적 거세를 도입하는 법안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그들에게 조차 선악과를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이고 윤리 철학적인 고민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 진 후에 결정 되어야 할 사항이다. 다만 우리는 시계태엽이든 오렌지든 간에 파시즘적인 감정의 충동을 자제하고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개인적, 환경적인 차원에서 다각적인 관심으로 범죄자의 교화와 재발방지,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치료를 우선하여 생각해야 하겠다.
창세기의 선악과와 시계태엽 오렌지
요즘처럼 각종 극악무도한 범죄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나는 앤서니 버지스의 문제적인 텍스트인 '시계태엽 오렌지'가 생각난다. 단순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조합의 제목에 끌려서 보게 된 이 영화의 매력은 나로 하여금 되풀이 하여 5번이나 보게 했으며 결국 원작소설까지 읽게 했다.
제목에서 말하는 태엽달린 오렌지는 주인공인 알렉스를 상징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알렉스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교도소에서’,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오고 나서’ 이렇게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좋아하는 알렉스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약물을 탄 우유를 마시며 강도, 폭행, 살인, 강간을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저지르고 다니는 10대 청소년이다. 알렉스와 친구들은 노숙자를 폭행하기도 하고 알렉산더(아이러니 하게도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라는 작가의 집에 들어가 그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고 강간한다. 어느 중년의 여자 집에 들어가서 그 여자를 죽이던 날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14년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 된다. 그는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흥분을 느끼는 사디스트이다.
교도소에서 2년이 지난 후 새 정부가 ‘루드비코 치료법’이라는 것을 만든다. 알렉스는 이 프로그램의 실험자로 자원하고 2주간의 치료를 받은 후 석방된다. ‘루드비코 치료법’은 역겨움을 유발하는 약물을 투여한 후 폭행, 강도, 살인, 강간 등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영화를 보여주는 것인데, 나중에는 약물 없이 그러한 생각만 해도 심한 역겨움과 호흡곤란에 이르는 지경이 되는 치료법으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하지만 그가 본 영화들의 배경음악으로 9번 교향곡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 음악소리에도 심한 호흡곤란과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2주후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길을 떠돌던 중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한다. 그는 전혀 저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심한 호흡곤란과 구토증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9번 교향곡을 듣고 심한 구토 증세를 느끼고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는 다행히 구조되고 정부에 의해 ‘심층 수면 학습’을 받고 예전의 상태로 회복된다. 그 무렵 정부 내무장관은 알렉스의 병실에 방문하여 정부에 대해 유리한 진술을 해줄 것을 약속받고 좋은 직장을 줄 것을 약속한다.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 나온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순종의 시금석으로 자유의지를 선악과와 함께 주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금단의 나무인 선악과에 손을 대지 못하게 붙드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율법은 독재적 율법이라는 사단의 비난이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알렉스처럼 하나의 태엽달린 오렌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큐브릭은 영화에서 알렉스의 범죄행위와 ‘루드비코 치료법’을 각각 양쪽의 극단으로 표현하여 대조한다. 이런 극단적인 묘사는 우리에게 딜레마를 제공한다.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반대편에서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는 선악과를 선택할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루드비코 요법’이 진정으로 알렉스를 선한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우리의 이런 순진한 물음에 루드비코 치료법을 만든 브로드스키 박사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동기라든가 고차원적인 윤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범죄를 줄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요.”
그리고 알렉스는 괴로워서 태엽감이 감긴 오렌지처럼 말한다. “저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아요. 그건 잘못이죠, 그건 사회라는 것에 반항하는 일이니까요.” 그는 노숙자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폭력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고 고통과 메스꺼움을 피하기 위해 “제발 댁을 위해 뭐라도 하게 해주세요. 제발.” 이라고 사정 한다. 그는 왼쪽 뺨을 맞았을 때 오른쪽 뺨을 때려달라고 사정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것은 선한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선악과가 없는 에덴동산은 진정한 선이 아닌 것이다. 알렉스는 루드비코 치료를 받은 후에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지만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은 아니었다.
최근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성 범죄자들의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화학적 거세를 도입하는 법안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그들에게 조차 선악과를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이고 윤리 철학적인 고민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 진 후에 결정 되어야 할 사항이다. 다만 우리는 시계태엽이든 오렌지든 간에 파시즘적인 감정의 충동을 자제하고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개인적, 환경적인 차원에서 다각적인 관심으로 범죄자의 교화와 재발방지,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치료를 우선하여 생각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