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투쟁의 선도자 안중근 의사〈7〉

조의선인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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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상무정신(尙武精神)

 

 

 

⑸ 순흥(順興) 안씨(安氏) 가문에 밀려든 첫번째 위기



안태훈의 집안에 위기가 닥쳤다. 뒷날 안중근은 이를 두고 자서전에서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마저 잡아먹으려 하고, 내를 건너갈 때에 요긴하게 쓴 지팡이도 건너와서는 팽개친다고 하더니…’ 라고 분개한 사건이었다.



안태훈(安泰勳) 일가가 ‘갑오의려(甲午義旅)’를 조직하여 어렵사리 동학농민군을 무찌르고 지역의 평정을 회복한 이듬해 여름이었다. 느닷없이 안태훈 일가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용건인 즉 지난해 동학군에게서 노획한 양곡 1천여 포대가 동학당의 것이 아니고 절반은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사두었던 것이며, 나머지는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閔泳駿)이 농장에서 추수해 들인 곡식이니 지체없이 전량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양곡은 군사들의 식량으로 대부분 소비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양곡은 황해도의 동학도접주 원용일이 관아에서 탈취한 것을 안태훈 부대가 압수한 노획물이었다. 따라서 ‘주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명성황후의 일가인 민영준은 당대의 실력자이고 권력의 실세였다. 그들의 양곡인 것이 사실이라면, 농민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 혁명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들은 한 지역에 양곡 500석이나 쌓아두었다는 말이 된다. 바꿔 말하면, 이런 이유에서 농민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안태훈이나 안중근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안태훈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후환이 뒤따랐다. 어윤중과 민영준은 고종 군왕에게 “안모가 막중한 국고금과 무역을 들인 쌀 천여 포대를 까닭없이 도둑질해 먹었기에 알아본 즉, 그 쌀로 병정 수천 명을 기르며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에 큰 환난이 닥칠 것입니다.” 라고 고변을 했다.



당시에 ‘음모’사건은 곧 ‘반역’을 의미했다. 안태훈은 지체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교우관계이던 전 판결사 김종한을 통해 어윤중에게 억울함을 밝혔지만 재물에 눈이 먼 그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사이에 하늘의 징벌이었다고 할까? 어윤중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향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용인에서 난민들의 폭행에 의해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어윤중의 일은 이렇게 끝났지만, 그보다 권세가 더 강한 민영준의 위세는 실로 가관이었다. 그는 안태훈을 역모로 몰고자 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서울에 있던 안태훈은 서양 신부들의 도움으로 천주교 종현성당(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종교적 열정과 현실적 고뇌의 결과였다. 그곳에 몇 달 동안 은신하는 동안 정국이 변하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안태훈은 종현성당에 머무는 동안 신부의 강론을 듣고 김종한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주교의 질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수의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교리에 밝은 이종래와 함께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태훈의 천주교 입교 시기가 이보다 다소 앞선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안태훈 집안의 천주교 입교 시기는 안중근의 사상형성과 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안태훈은 그 시대에 ‘정의(正義)’를 가훈으로 내걸 만큼 대단히 심지가 굳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정통 유학자이면서도 열린 개화 정신의 소유자였다. 수십 명의 산포수를 불러들여 유사시에 대비한 일이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며 의병대장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과는 동문으로서 당시 해서 지방의 대학자로 추앙받은 고능선(高能善)을 초빙해 교유하며 자제들의 교육을 맡긴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고능선은 안태훈의 초청으로 청계동에서 살면서 안태훈 형제들과 자주 시회(詩會)를 열고, 시국을 담론하며 거의(擧義)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안태훈이 개화파에 속했다면 고능선은 척사유림(斥邪儒林)의 학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함께 어울렸다. 이것은 안태훈이 특정 사상이나 논리, 주장에 편향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안태훈의 호방한 기품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이러한 기질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것 같다.



‘안태훈의 기질은 안중근에게 이어졌고, 안중근의 인격형성에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것이었다. 안중근이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가장 소중히 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은 물론, 후일 안중근이 구국운동에 투신할 때 계몽운동의 방식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을 받은 바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안중근이지만, 아버지 안태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태훈이 선비의 모습을 간직한 문사적(文士的) 인사였다면 안중근은 무사적(武士的) 성품이 넘쳤던 점일 것이다.’



⑹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초청하다



고능선이 청계동의 안태훈 집에 머물고 있을 무렵에 백범 김구가 청계동에 나타났다. 여기서 ‘나타났다’라는 표현은 다소 어폐가 있는 것 같고, 안태훈이 밀사를 보내 그를 불러왔다고 해야 타당할 것 같다. 당시 김구는 ‘소년접주’로서 동학혁명군의 황해 지역 수장이었다. 안태훈과 김구의 만남, 김구와 고능선의 만남, 김구가 이때 지켜본 안중근의 모습, 이후 안중근 가문과 김구와의 관계는 파란만장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의 정맥(正脈)을 이루게 되는 대목이다.



김구가 청계동을 찾아오게 된 사연부터가 기구하다면 기구하다. 김구는 18세 때인 1893년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고 동학혁명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팔봉접주로 해주성 공략 작전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김구의《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이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장동군(長洞郡) 몽금포 근처의 마을로 피신하여 석달을 숨어 살았다. 동쪽에서 전해오는 풍문을 들으니 이동엽은 벌써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고, 해주 각 고을의 동학은 거의 소탕되었다는 얘기였다.

정씨와 함께 텃골 본집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매우 불안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병들이 죽천장(竹川場)에 진을 치고, 부근 동학당을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양친께서도 내게 먼 땅으로 가서 화를 피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정씨는 청계동 안 진사(안태훈을 지칭함)을 찾아가 보자고 하셨다.

나는 주저했다. 안씨가 받아들여준다 하더라도 패군지장인 나에게 포로와 같은 취급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나 정씨는 "안진사가 그때 밀사를 보냈던 진의는 무슨 책략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형의 연소 담대한 재기를 아껴서 그랬던 것이오, 염려말고 같이 갑시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토록 힘써 권하는 바람에 나는 정씨와 함께 그날 천봉산을 넘어서 청계동 동구까지 갔다.(중략)

우리의 명함을 본 안진사는 정당(正堂)에서 우리를 친절히 맞아들였다. 수인사 후 안진사의 맨 첫말이 이러했다.


"김 석사(金碩士 : 김구를 지칭함)가 폐엽사에서 위험을 벗어난 뒤에 심히 우려되어 계신 곳을 탐색하였은 즉 계신 곳을 모르던 터에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들으니 구경하(具慶下 : 두 어버이 시하) 라시던데 양위 두 분은 어디 안접(安接) 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며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노라고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 오일선(吳日善)에게 총멘 군사 30명을 붙여주면서, "당장 텃골에 가서 김석사 부모님을 모시고 이웃 근동의 우마를 빙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옮겨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집 한 채를 사서 그날로 청계동에 살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살게 되니 내 나이 스무살 되던 을미년 2월이었다.

안 진사의 후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날마다 사랑에 와서 그가 없는 사이라도 자기 동생들과 놀고, 사랑에 모인 친구들과 얘기를 하든지 책을 보든지 마음대로 해가며 아무 상관 말고 안심하고 지내라는 것이다.(중략)

안 진사의 6형제는 모두가 장사체격으로 허약하게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중 안진사는 특히 안광이 찌를 듯하여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대관들 중에도 필단(筆端)이나 면담으로 항변을 당하면, 그 당장에는 안 진사를 나쁘게 평하더라도 직접 면대하면 자연 경의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지만, 그러나 품성이 퍽 소탈하여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고 친절하여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은 매우 청수했으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는 율(律)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잘된 율시들이 많이 전송되었다. 안 진사 자신도 때때로 나에게 득의의 작을 읊어주곤 했다. 그리고 안 진사는 친필로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 : 三略素書)를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는 주흥이 날 때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⑺ 안중근 가문과 김구의 인연



백범 김구가 청계동에서 지낸 기간은 4~5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 김구는 평생을 두고 삶의 지표가 되는 훈도를 받게 되었다. 유학자 안태훈에게 의리와 호방한 기질을, 선비 고능선에게서는 대장부의 기개를 배운 것이다.



일찍부터 김구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던 안태훈은 동학농민혁명군과 '갑오의려'가 치열하게 싸울 때에 김구에게 밀사를 보냈다. 김구의 측근인 정덕현은 밀사를 만난 뒤 다음과 같이 김구에게 보고하였다. “안 진사는 안목이 높은 사람으로 인재를 아낄 줄 알며 전부터 김 접주(김구)님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 그런데 화학동(김구의 진지)와 청계동 사이의 거리가 20리 밖에 안되니 만약 김 접주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실패하면 김 접주의 생명과 성명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그리되면 아까운 인재를 하나 잃게 될 것인즉 거동을 신중히 하라는 호의의 충고를 전하더라”는 것이다. 정덕현은 이어서 김구에게 “안 진사는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안진사의 됨됨이가 보통이 아니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하였다.



김구는 참모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이편을 치지 아니하면 이쪽도 저쪽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데에 합의하였다. 밀약이 성립된 것이다. 이런 사유로 하여 김구가 청계동에 머물게 되었다.



안중근 가문과 김구의 관계는 ‘운명적’이라 할 만큼 질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물됨을 아껴 청계동으로 초청한 데서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관계는 김구가 안태훈에게 ‘의병기의(義兵起義)’를 제의했다가 뜻이 맞지 않아 청계동을 떠나면서 한때 단절되었다. 김구는 동학혁명운동이 좌절되면서 중국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강계에서 의병항쟁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였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김구는 1895년 말경에 이번에는 스스로 청계동으로 안태훈을 찾아갔다.



김구는 청계동에서 안태훈과 고능선을 만나 자신이 직접 돌아보고온 저간의 내외 사정을 전하고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안태훈은 “아무 승산이 없이 일어났다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기의할 생각이 없고, 천주교를 믿다가 후일 기회를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일로 김구는 청계동을 떠나고, 그동안 안태훈의 후의로 청계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고 있던 김구의 부모도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두번째의 단절이었다.



김구와 안중근 일가가 다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때문이었다. 하얼빈의거 뒤 김구는 청계동 시절의 인연으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해주감옥에서 한 달여 넘게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나왔다. 이후 “백범에게 있어 안중근의 의거는 독립운동의 의리를 상징하는 좌표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안중근 유족에 대한 김구의 관심은 각별했다.



1937년 일본군의 공세로 상해가 위태로워지자, 백범은 안중근의 부인 김씨의 구출 문제를 ‘대사건’으로 기술하면서 “양반집에 불이 나면 사당의 신주부터 옮겨 내온다고 하는데, 우리가 혁명가로서 의사 부인을 적치구역에서 구출하는 것 이상으로 긴급한 일은 없다”고 했다. 김씨 부인 구출 임무를 끝내 완수하지 못한 안공근(安恭根)의 잘못을 크게 꾸짖던 백범의 모습은 곧 안중근이 실천해간 독립운동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일본군이 상해를 장악한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씨 구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홍콩으로 찾아가 안정근(安定根)과 공근 형제를 다그쳤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범과 안중근 집안의 관계를 놓고 볼 때, 백범이 안태훈으로부터 근대적 가치관을 배웠다고 한다면, 안중근과의 인연은 직접 맞닿은 것이 적다 하더라도, 바로 독립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의리’의 결합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면서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하얼빈의거 이후 안중근 집안은 대부분 중국으로 망명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살아가기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안중근 의사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안정근은 김구가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국내외 청년들을 모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안공근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 과정에서부터 15년 이상 김구의 최측근 동지로서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 특히 윤봉길 의사가 1932년에 성공시켰던 홍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 뒤 김구가 일본 경찰대에 쫓겨 가흥으로 피신했을 때 안공근은 가흥과 상해를 오가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총괄하였다. 김구의 장남인 김인과 안정근의 딸 안미생이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혈연관계로 발전할 만큼 사이가 돈독해졌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백범과 안중근 집안의 직접적 결합은 안중근의 동생과 사촌, 조카들에 의해 계승되어 갔다. 특히 안공근과 안경근은 백범의 1930년대 독립운동에서 가장 측근으로 활약했고, 그 밑의 항렬인 생자(生字) 대에서는 안우생, 안원생, 안춘생, 안낙생 등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백범의 독립운동에 동참해갔다. 그리고 백범의 큰 아들 김인과 안정근의 딸 안미생의 결혼은 양자의 관계를 혈연관계로 발전시켜 갔으며,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백범 독립운동의 버팀목으로 자리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