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을 함께 누볐던 동무 철웅에게서, 거사를 도모했던 조선비에게서, 그리고 조카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봉림대군에게서)
그럼에도, 충격적일 정도로 일관되고 있는 그의‘인간에 대한 신뢰’때문일 것입니다.
삶이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듯
인간이란 그리 고상하지 않은 생물이지요.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가슴이 짓이겨져 핏빛 숨을 토해내면서도
태하의 눈은 증오도 공격도 없는 절대적 순수의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는 눈!이었습니다.
(철웅의 안타까운‘증오’의 눈. 열등감과 공포감의 자백, 상대처럼 되고 싶은 열망의 슬픈 동의어..가 증오의 정의겠지요. 상대를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는 자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태하가 피가 튄 혜원의 눈같이 하얀 치마(소복 같은 차림은 혜원의 마음에서 대길을 떠나보내는 의도적인 상징이었다고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그러셨더군요)
에 매화를 그려 넣을 때 알았습니다.
작가님이 태하는‘선비’임을 말해주고자 했던 것을요.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의‘선비’란
문(文) 사(史) 철(哲), 시(詩)서(書) 화(畵)를 두루 교육받고 익혔습니다.
그러니까 태하는 이성(고전,역사,철학)과 감성(시,서,화)까지 함께 갖춘 인물임을
그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아닐까요.(조선 최고의 무장이니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칼을 다루는 것은 기본이요, 시도 읊고 난도 쳤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시,서,화를 모르는 사람이
난 한 번도 우리 백성을 죽인 적 없다.
라고 말할 리 없겠지요.
또한 옥죄어드는 자신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위험에 처한 생면부지의 여인(혜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구해줄 리 없구요.
훈련원에서 같이 지낸 노비들의 탈출을 도와줄 리 없겠지요.
(물론, 그저 남녀간의‘낭만’의 한 순간을 나타낸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
그가 노예로 전락한 뒤 자신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이후 청나라로 도피(?)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맹렬하게 타박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노예관’
(그는 노예들이 항상 힘이 세고 장대하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노예란 자연의 산물이며‘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다. 따라서 노예제는 수단인 동시에 올바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야만인-비(非)그리스인-과 그리스인의 관계와 같다고도 했지요.)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위대한 힘은 무엇일까요? 지식도, 열정도, 용기도 아닌 바로 이‘측은지심’아닐런지요.)
또한, 하늘이 우그러지고 산야가 다 사라져도 순백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칼은 더 격정적이고 더 깊어졌습니다.
참, 우리의 미소를 오~래도록 펄럭이게 만들었던
태하의 절대적인 순진성도 잊지 말아야겠군요.
(사랑이 아닌‘의리’라니요.^^ 물론 그만큼 상처받기 쉬웠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인간의 역사는 오래 됐습니다.
삶에 대한 이 자문(自問) 속의 이상과 현실의 갈등,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인간의 영원한 숙제일 테지요.
태하는 이상과 현실의 이 끝없는 진자운동 속에서
비탄과 절망에 침윤되지 않고‘순결한 의지’로‘충실히’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한계가 있었습니다.(태하 자신의 한계라기보다 그가 처한 시대적 한계라고 생각합니다만)
생에 대한 그의 연금술은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조선시대 태하만의 한계였을까요?
21세기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 역시
권력욕망과 화폐욕망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조건 속에 갇혀 있지 않나요?
오히려 현대의 우리는 태하와 달리,
사회적 제도나 정의보다 기존 체제 속에서 우리의 실존은 거세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보고,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만 반응하는 지극히‘개인적 감성’만을
우위에 놓고 있지 않나요?
일상의 압도적인 힘에 눌려 구체적인 경험과 활동은 멀리한 채
속물적 타협에 속히 이르는 유약함을, 오히려‘순리’로 믿으며
운.신.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를 논하기 전에
굴욕적인 정의만을 제공하는 세상일지라도 그 단단한 미로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퍼덕이는 열정과 기백을 안고 치열하게 방.황.했.던. 태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와 진실은 정치적이라 화려하게 성토하면서도
실천의 허약함 속에 똑같은 통속의 메커니즘 속으로 매번 반복적으로 회귀할 뿐인 우리가,
태하의 한계에 대한 냉소와 무례는 차라리,,,
우리의 낯뜨거운‘허영’ 아닐런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앞서간 태하의 발자국은 얼마나 든든한 위안인지요.)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를 완비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운용하는‘인간의 품성’이 뒷받침 되어주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과 사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어렵습니다.
단 한사람과의 약속을 위해
(고작 약속, 때문이냐고 봉림대군은 얘기했지만 약속이라는 말의 정의는‘지키기 위함’이라는 전제가 먼저 아닌지요. 소현세자와의 약속은 애국적 대의명분이라기보다는 지켜야만 하는 약속의‘진정성’에 태하는 더 무게를 두었다고 여겨집니다. 완벽하게 진공 포장된 그 내면적 결의가 참 아프게 가슴에 꽂힙니다...)
정신도 육체도 모두 피폐한 최악의 지점에서도
위대한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끌어안고 갔던 사람,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배반당하지만
유정한 눈으로 끝까지 인간을 긍정하는 사람,
오직 실용! 오직 능률!만을 기갈이 든 듯 벌컥벌컥 탐식하는 이 시대,
우리는 이 폭풍 같은 사람, 송.태.하!가 필요합니다.
그 무엇에도 속박될 수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치열함의 소유자인 이 사람을!
인간은 제도를 만듭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제도’가 인간을 결정해 버리는 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오류이고 불완전한 통찰이며 어리석음이니까요.
그렇기에 인간은 현존하지 않는 것을 늘 갈망합니다.(가령 유토피아 같은 것이 되겠지요)
‘진정한 평등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고도의 사회는 지금까지 실현된 적도 없고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라고 얘기한다면 잔인한 일일까요?
이 지구상에 근본적으로 전쟁이 폐기되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인간은 체제의 지속을 위해 혹은 모순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에 의.존.해 오고 있으니까요.
다만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역사의 모든 미숙과 과오의 조각들을 끌어 모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 속의 제도와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추노]< 폭풍 같은 이 사람, 송태하!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난 3개월 동안 질주한 추노의‘태하’를 지켜보면서
늘 목이 따끔따끔하고 가슴이 저릿저릿했습니다.
아니, 떨어져나간 내 살점처럼 애끓이며 그를 아프게 보아왔다는 말이 더 맞을 겁니다...
무엇이 이토록 저를 뒤흔든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덕을 갖추었지만 철저히 배반당하는 슬픈 존재였기에,
(전장을 함께 누볐던 동무 철웅에게서, 거사를 도모했던 조선비에게서, 그리고 조카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봉림대군에게서)
그럼에도, 충격적일 정도로 일관되고 있는 그의‘인간에 대한 신뢰’때문일 것입니다.
삶이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듯
인간이란 그리 고상하지 않은 생물이지요.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가슴이 짓이겨져 핏빛 숨을 토해내면서도
태하의 눈은 증오도 공격도 없는 절대적 순수의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는 눈!이었습니다.
(철웅의 안타까운‘증오’의 눈. 열등감과 공포감의 자백, 상대처럼 되고 싶은 열망의 슬픈 동의어..가 증오의 정의겠지요. 상대를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는 자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태하가 피가 튄 혜원의 눈같이 하얀 치마(소복 같은 차림은 혜원의 마음에서 대길을 떠나보내는 의도적인 상징이었다고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그러셨더군요)
에 매화를 그려 넣을 때 알았습니다.
작가님이 태하는‘선비’임을 말해주고자 했던 것을요.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의‘선비’란
문(文) 사(史) 철(哲), 시(詩)서(書) 화(畵)를 두루 교육받고 익혔습니다.
그러니까 태하는 이성(고전,역사,철학)과 감성(시,서,화)까지 함께 갖춘 인물임을
그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아닐까요.(조선 최고의 무장이니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칼을 다루는 것은 기본이요, 시도 읊고 난도 쳤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시,서,화를 모르는 사람이
난 한 번도 우리 백성을 죽인 적 없다.
라고 말할 리 없겠지요.
또한 옥죄어드는 자신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위험에 처한 생면부지의 여인(혜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구해줄 리 없구요.
훈련원에서 같이 지낸 노비들의 탈출을 도와줄 리 없겠지요.
(물론, 그저 남녀간의‘낭만’의 한 순간을 나타낸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
그가 노예로 전락한 뒤 자신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이후 청나라로 도피(?)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맹렬하게 타박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노예관’
(그는 노예들이 항상 힘이 세고 장대하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노예란 자연의 산물이며‘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된다. 따라서 노예제는 수단인 동시에 올바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야만인-비(非)그리스인-과 그리스인의 관계와 같다고도 했지요.)
을 오늘날 21세기의 가치로 재단하며 매도할 수 없는 것처럼
양반 신분의 태하의 가치관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확실한 것은 태하는 스스로의 본성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지식인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성을 나서면 내 한 몸 잊었노라’
(上馬忘有家 出城忘有身) 양헌수/병인양요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는 옛말을 지독하게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편안해지면 무질서한 일상적인 삶에 묻혀서 나태해지고 타락하기 십상이지요.
수평의 인간은 안일이고 몰락이며 그것은 곧 죽음 아니겠는지요.
일상의 온전한 기쁨을 외면한 채 오직 가슴 속 깊이 뚜렷한 불꽃을 안고
그는 한결같이 무.일.했으며 불.편.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시대의 험난한 질곡과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비겁과 허약에 반기를 들고,
그 무간지옥 속에서도 고매한 긍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번뇌로 다가오는 자신의‘바닥’과 싸우면서도
벼랑 끝에 선 채 그는 꿈을 견디며 준엄한 자존을 지켰습니다.
무엇보다 태하의 그 검은 눈빛의 풍요로움 속엔
타인의 고통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과 인간에 대한 강한‘연민’이 있었지요.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위대한 힘은 무엇일까요? 지식도, 열정도, 용기도 아닌 바로 이‘측은지심’아닐런지요.)
또한, 하늘이 우그러지고 산야가 다 사라져도 순백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칼은 더 격정적이고 더 깊어졌습니다.
참, 우리의 미소를 오~래도록 펄럭이게 만들었던
태하의 절대적인 순진성도 잊지 말아야겠군요.
(사랑이 아닌‘의리’라니요.^^ 물론 그만큼 상처받기 쉬웠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인간의 역사는 오래 됐습니다.
삶에 대한 이 자문(自問) 속의 이상과 현실의 갈등,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인간의 영원한 숙제일 테지요.
태하는 이상과 현실의 이 끝없는 진자운동 속에서
비탄과 절망에 침윤되지 않고‘순결한 의지’로‘충실히’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한계가 있었습니다.(태하 자신의 한계라기보다 그가 처한 시대적 한계라고 생각합니다만)
생에 대한 그의 연금술은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조선시대 태하만의 한계였을까요?
21세기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 역시
권력욕망과 화폐욕망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조건 속에 갇혀 있지 않나요?
오히려 현대의 우리는 태하와 달리,
사회적 제도나 정의보다 기존 체제 속에서 우리의 실존은 거세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보고,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만 반응하는 지극히‘개인적 감성’만을
우위에 놓고 있지 않나요?
일상의 압도적인 힘에 눌려 구체적인 경험과 활동은 멀리한 채
속물적 타협에 속히 이르는 유약함을, 오히려‘순리’로 믿으며
운.신.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를 논하기 전에
굴욕적인 정의만을 제공하는 세상일지라도 그 단단한 미로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퍼덕이는 열정과 기백을 안고 치열하게 방.황.했.던. 태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와 진실은 정치적이라 화려하게 성토하면서도
실천의 허약함 속에 똑같은 통속의 메커니즘 속으로 매번 반복적으로 회귀할 뿐인 우리가,
태하의 한계에 대한 냉소와 무례는 차라리,,,
우리의 낯뜨거운‘허영’ 아닐런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앞서간 태하의 발자국은 얼마나 든든한 위안인지요.)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를 완비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운용하는‘인간의 품성’이 뒷받침 되어주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과 사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어렵습니다.
단 한사람과의 약속을 위해
(고작 약속, 때문이냐고 봉림대군은 얘기했지만 약속이라는 말의 정의는‘지키기 위함’이라는 전제가 먼저 아닌지요. 소현세자와의 약속은 애국적 대의명분이라기보다는 지켜야만 하는 약속의‘진정성’에 태하는 더 무게를 두었다고 여겨집니다. 완벽하게 진공 포장된 그 내면적 결의가 참 아프게 가슴에 꽂힙니다...)
정신도 육체도 모두 피폐한 최악의 지점에서도
위대한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끌어안고 갔던 사람,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배반당하지만
유정한 눈으로 끝까지 인간을 긍정하는 사람,
오직 실용! 오직 능률!만을 기갈이 든 듯 벌컥벌컥 탐식하는 이 시대,
우리는 이 폭풍 같은 사람, 송.태.하!가 필요합니다.
그 무엇에도 속박될 수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치열함의 소유자인 이 사람을!
인간은 제도를 만듭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제도’가 인간을 결정해 버리는 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오류이고 불완전한 통찰이며 어리석음이니까요.
그렇기에 인간은 현존하지 않는 것을 늘 갈망합니다.(가령 유토피아 같은 것이 되겠지요)
‘진정한 평등과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고도의 사회는 지금까지 실현된 적도 없고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라고 얘기한다면 잔인한 일일까요?
이 지구상에 근본적으로 전쟁이 폐기되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인간은 체제의 지속을 위해 혹은 모순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에 의.존.해 오고 있으니까요.
다만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역사의 모든 미숙과 과오의 조각들을 끌어 모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 속의 제도와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그저 부지런히 해부하고 해체하며 용해시켜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를 해독하고 읽으며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자문도 잊지 않고 간절히 살피며
스스로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이자 의무가 아닐까...합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추노는, 대단한 현재성을 갖는 드라마임에 틀림없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추노.
정말로, 아프게 행복했습니다, 추노!
-출처:선영아 사랑해(마이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