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에 눈 뜰때

권도윤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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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는 상대를 우쭐하게 하지만 애교는 상대를 녹인다.

애교는 우리를 천진한 아동기로 데려가서 웃음짓게 하고,

딱딱한 비즈니스 관계를 녹여주며, 남녀관계를 달콤하게 각색한다.

상대의 마음을 순하게 풀어서 내게로 그 향기가 넘어오도록 만드는것.

애교야 말로 사랑의 고급 기술이다.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애교'의 참맛을 알 것이다. 고양이는 필요한 순간에 완벽한 저자세가 된다.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내리까는 그 도도한 눈빛, 다리를 길게 뻗어 내딛는 거만한 attitude가 한순간에 슬픔이 그르렁거리는 눈빛과 제 몸을 부비부비 비벼대는 적극적 스킨쉽으로 바뀐다. 때로는 발라당 나동그라져서 배를 보이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갸르릉 웃는다. 확실히 개와 고양이는 다르다. 개는 보호받고 싶어 하고, 고양이는 사랑받고 싶어 한다. 주인이 귀가할 때 꼬리를 흔드는 무소불위의 아부를 실천하는 개는 스스로가 필수적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고, 고양이는 언제든 환영받는 자유로운 게스트가 되고 싶어한다. 비교해 보면 늘 약간 기가 죽은 채로 의존적인 을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개는 충성심에 기반한 아부를 하고, 건방지고 독립적인 갑의 지배력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는 자긍심에 기반한 애교를 떤다.

 

   나는 어떤 쪽인가 하면 보호에 기반한 아부와 사랑에 기반한 애교의 중간쯤에서 점점 애교의 기술 쪽으로 기웃거리는 중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애교는 사랑스러운 부탁과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의 역동적인 반응이다. 명령조의 언어와 가르치려는 욕구로 충만했던 내가 (오랜 세월 동안의 잡지사 조직 생활에서 얻은 '갑'의 직업병. 누군가가 내 조건과 기분을 맞춰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 상태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나의 파트너가 내게 처음 했던 말은 "나는 당신의 어시스트가 아니다"였다. 아무리 부드러운 척 연기를 하더라도 "이걸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너는 아웃이야!" 라는 벌칙이 숨어있는 부탁은 상대를 반항적이고 경직되게 만든다. 나의 사랑스러움과 우리의 행복감을 오버랩 시키는 "와! ~하면 참 좋겠다!"의 감탄사와 "너무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도 해주면 안 될까?" 라는 청유형 어휘를 왜 몰랐을까? 몰랐다기 보다는 잊어버렸따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페미니즘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애교'라는 건 약한 척하며 남자나 후리는 하위 기술로 터부시됐다. 나는 남자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술을 마셨고, 더 건들거리면서 담배를 피웠으며, 더 논리적으로 이야기했고, 더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너는 정말 대단해!'라는 헌사를 들으며 꽃다운 시절을 아방가르드한 정신 세계를 지닌 술 취한 싱글로 보냈다. 첫 직장 생활에서도 나의 목표는 여자보다 열등한 존재가 분명한 남자 동료들을 보란 듯이 추월하는 것이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홈리스 같은 워커홀릭이 되고 말았다. 야근이 끝난 어느 날, 나와 귀가길 방향이 같은 사진가가 나 대신 방향이 정반대인 여직원 (늘 생글생글 웃는 긴 머리의 비서)을 차에 태울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 톰보이라고 불렀다. 여자든 남자든 나를 만나면 "멋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땀 흘리며 인정받기 보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남보다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경쟁에서 승리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체로 사랑받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즈음 보았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이 김주혁에게 말한다. "내가 달을 따달래? 별을 따달래? 그냥 결혼만 한 번 더 하겠다는 거 아니야?" '말 안되는 말을 참 말되게 만들었던' 손예진의 애교로 그녀는 결국 남편을 둘씩이나 거느리게 된다. 그걸 애교가 혼성 교배된 현대판 페미니즘이라고 해야 할지.

 

   며칠 동안 인터넷 서점을 배회한 뒤에 찾은 책인 <사랑받는 기술─상대방을 끌어당기는 애교력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혼마 마사토는 이렇게 썼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상당히 피곤하고 부담스럽다. 이런 사람은 '취급주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상처 받을까 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에 견디는 내성도 애교력의 중요한 요소다." 오! 그렇다면 애교 있는 여자가 되기 위해선 스트레스 내성부터 키워야 한다는 말인가. 분명 애교가 코맹맹이 소리로 어리광을 피우는 하위 기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차라리 아부는 쉬웠다. 아부는 자기애와는 관계가 없다. 아부는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언어 트레이드 놀이의 규칙은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면, 나도 당신에게 기쁜 말을 해줄게'다. 내가 믿고 싶은 말이 나의 허영심을 향해 정확히 날아와 꽂히는 그 순간, 정신은 대마초라도 피운 것처럼 황홀해진다. 그렇게 아부가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라면, 애교는 내가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다. 그래서 아부는 상대를 우쭐하게 하지만 애교는 상대를 녹인다. 짧게 정리 하면, '아부는 당신이 훌륭하다'라는 수사적 표현이고 '애교는 당신 때문에 내가 기쁘고 행복하다'라는 감정의 표현이다.

 

   성별로 따지자면 아부는 의식적인 남자의 기술이고, 애고는 무의식적인 여자의 기술이다. 위계가 뚜렷한 조직 사회에서 오로지 자신이, 줄을 선 상사의 보호를 받아야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남자들은, 마치 조폭들이 "형님!"하며 보스에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듯 윗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아부를 한다. 조직에서 생존의 지휘자가 바뀌면 '충성'이 '배신'으로 뒤집히듯, '아부'도 '조롱'으로 얼굴을 바꾼다.

 

   애교의 결과론적인 본질은 상대의 마음을 순하게 풀어서 내게로 그 부드러운 향기가 넘어오도록 만드는 것. 어린아이야 말로 타고난 애교쟁이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는 선천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애교가 넘쳐 흘렀다. 퇴근하는 아빠에게 달려가 뽀뽀를 퍼붓고 무릎에 앉아 방긋방긋 웃거나, 엄마가 사다 준 원피스를 입고 나풀나풀 춤을 출 때 나의 부모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황홀해 하지 않았던가. 아! 저 아이가 오로지 내 존재 자체로 기뻐하는구나. 그 광경이야말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했던 그 말,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의 현현이다. 내가 애교로 원하는 물건을 쟁취할 수 있을까, 에 대해 '애교쟁이' 후배에게 자문을 구했을 대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사달라거나 해달라고 요구하기 보다, '갖고 싶다'는 감정만 전달해요. 그리고 그걸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애교쟁이인 제 남편은 갖고 싶어 하던 신발을 선물 받으면, 그걸 품에 꼭 안고 웃으면서 잠이 들어요. 시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내가 저 애교에 혹해서 많이 털렸다'구요."

 

   그렇다면 애교로 상대방의 그릇된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을까? '당신이 잘못됐다'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이런 방법은 어떨까?' 라고 구체적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애교는 그 유명한 인간 행동학의 최신 트렌드인 '넛지 이론'을 잉태하고 있다. 즉 남자들이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색하고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기 보다, 소변기 중앙에 축구 골대나 파리를 그려놓으면 해결된다는 것. 원래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으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인데, 요즘은 정부의 리더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하는, 일종의 국민을 향한 '애교술'이다.

 

   애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상대방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기술적으로 나를 '약자'로 상대를 '강자'로 '느끼도록' 연출하는 영리하고 천진한 역할놀이다. 내가 아는 한 사진가는 굉장히 와일드한 성격에 유명세를 누리면서도 종종 나에게 애교를 부린다. "하하하! 오늘 내가 긴장이 되네. 너한테 잘 보이고 싶은가 보다." 물론 그녀는 스타들에게도 그렇다. "원래 잘 하는 줄 알았지만, 정말 포즈가 좋네. 하하. 내가 떨리는걸.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거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자칫하면 상대방을 위축시킬 수 있는데, 애교력이 있는 사람을 그렇지 않다. 바로 '균형감'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강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이렇게 애교를 부릴 때, 우리는 무게중심이 좋은 시소를 탄 듯 관계에서 즐거운 탄력을 느낀다.

 

   아티스트 낸시 랭은 애교로 근엄한 미술계를 녹인 애교의 여왕이다. 그녀의 지론에 의하면 애교의 핵심은 선방이며, '난 니가 좋아'하고 먼저 표현하는 것. 물론 천진하고 진실되게. 내가 아는 한 스타일리스트는 애교의 달인이라 할 만한데, 그녀는 자신이 업계에서 만나는 패션 피플을 대략 모두 언니 오빠로 친근하게 부른다. 그리고 항상 눈을 반달로 만들고 웃으며 긍정적인 말을 건넨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고는 즉시 "대단해요!" "멋저요!" "역시!" 같은 말이 입버릇처럼 튀어나온다. 중요한 건 그녀가 진심으로 감격하고 기뻐한다는 게 느껴진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애교는 간교나 교태와는 다르다. 애교력이 있는 사람은 끈적이거나 치근대지 않는다. 담백하고 산뜻하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처럼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성을 숨기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간교는 머지않아 들통이 나게 되어 있으며, 성적 매력을 화두로 세운 교태는 '텐프로' 여성이 아니라면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다. 둘 다 들인 공과 노력에 비해 효율성도 성공률도 낮은 '감정 노동' 일 뿐이다.

 

   나는 어느 날 한 심리학자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애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관계에서 일종의 서비스를 받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 같은 거 있잖아요?" 그녀는 애교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글쎄요, 저는 요즘 딸아이의 애교에 푹 빠져 있어요. 관계에서 의식적으로 서비스를 한다기 보다는 그 아이는 관계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느낌이예요. 수영장에서 혼자 신나게 놀듯이 관계 속에 풍덩 빠져서 몰아의 상태에 있는 듯해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는 천진난만한 기쁨이 진짜 애교 아닐까요? 나이가 들어서도 애교를 부리면 전 좀 힘들어요. 성숙함이 필요한 순간에도 자신을 어린애 삼아 대충 넘어가려 들면 어이가 없죠. 공주병이야 말로 미성숙한 애교의 과다 표출로 얻게 되는 질병이에요. 그래서 징징대는 어리광을 무기로 삼은 공주병의 끝은 결국 '아! 어지러워'로 쓰러지는 식이죠." 나는 그녀에게 애교가 있는가를 물었다. "애교력은 없어요. 하지만 외교력은 있죠. 그게 종종 벼랑 끝 외교라서 그렇지요. 북한의 김정일 처럼요." 그녀는 큰 소리로 시니컬하게 웃었다.

 

 

에디터 김지수 VOGUE KOREA APRIL 2010

 

 

 

 

 

커피빈에 앉아 밀크티를 홀짝이며 오랜만에 Vogue의 페이지를 한장한장 넘기다 눈에 띄인 김지수 에디터의 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라고 외치면서 정작 페미니즘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만든.

 

'내 위에, 또는 앞에 누가 있는 것 따위 거슬려서 절대로 참을 수 없어'

남자/여자 관계없이, 라고 말해왔지만 실은 남자들따위에게 지는 것은 같은 여자들에게 뒤지는 것보다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너 따위 것보다 못할 건 없다는걸 언제나 보여주고, 증명하고, 그리고 비웃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이 무식한 PRIDE는 물리적인 측면에서도 적용되곤 했는데 (i.e. 힘으로 남자를 이기겠다는 초등학교때나 통하는 빌어먹을 생각)

어느 날 '아, 남자는 정말 남자구나...' 하고 느끼게 된 후로 조금 죽긴 했지만. 뭐 어찌됬건, 나는 자존심하나로 매 순간을 버텨왔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애교는 내세울게 없는 머리 빈 년들이 "약한 척하며 남자나 후리는 하위기술" 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도 있잖아, 고양이 같은 여자가 되고 싶어. 나도 자긍심에 기반을 둔 애교를 떨 줄 아는 사랑스런 여자가 되고싶어.

근데................ 내 자존심이 너무나도 크고아릅답구나.......

여태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기둥같은 것이라 여겼던 자존심의 실체는 내가 사랑스러울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인거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