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정과 정서 완화를 위하여 찾게 되는 교회. 교회는 우리에게 인생을 관철하는 철학이자 정신적 지지대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정화와 안정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교회가 도리어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바로 헌금이다. 현재 교회에서 지정한 각종 명목의 헌금의 가짓수는 무려 70여종에 달한다. 이름도 생소한 헌금들이 많고 그 명목으로 교인들은 헌금을, 아니 세금을 내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헌금을 교회 측에서는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교인의 헌금을 자기들만의 잔치에 충당한다던가, 목회자 개인의 사익의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헌금의 상당수는 교회행사나 각종 교육, 선교활동을 위해 지출한다고 하지만 그건 엄연한 명목상의 일이다. 수많은 종류의 이름으로 헌금을 내는데 이 엄청난 액수의 돈이 개신교를 망치고 있다. 순수한 사명감으로 예수님의 뜻을 이어 가고자 하였던 목회자도 넘치게 들어오는 헌금으로 인하여 권세화 되어 초심을 모두 다 잃어 버리고 돈을 위한 목자가 되어 버린다. 넘치게 들어오는 헌금에 눈과 마음이 타락하여 버리게 된다. 즉, 성도들의 지나치게 많은 헌금이 목회자를 타락시키고 개신기독교를 타락의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나친 헌금의 액수를 줄임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헌금을 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는 헌금의 액수만 해도 엄청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글로벌리서치'의 조사에 의하면 가구당 한 해 평균 헌금액이 344.8만원 이상이며 그 중에서 십일조 헌금이 교회 수입 금액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성인 1인 평균은 110만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헌금은 위에서도 보듯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어떻게 이런, 교인에게 부담이 되어버린,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일어난 것일까. 이를 위해서 헌금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 헌금액 중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십일조의 경우, 고대 로마시대에는 세금의 형식으로 바쳐지던 것이었고, 다른 감사헌금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개인의 의향에 따라 바쳐졌었다. 그러나 1500여년이 지난 지금, 국가에는 합법적인 세금을 납세하고 있기 때문에, 세금격의 십일조는 사실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헌금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표시가 아닌가. 이것은 자원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헌금은 자신의 능력이 되는만큼, 자신의 소신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지 강요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성경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자 폐단이다. 이러한 폐단이 심해지자 카톨릭에서는 십일조를 폐지하고 자발적인 정성에 의한 헌금을 바치기로 하였다.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헌금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도적 장치나 비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헌금을 과도하게 내고 있다는 근거로 '헌금상한제'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다. 개별 교인의 헌금 상한가를 정하여 경제요건을 고려치 않은 한정 없는 액수의 헌금납부를 예방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버는 돈의 1/10을 헌금으로 내는 것으로 정한다. 성경 레위기 27장 30절을 보면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에 맞게 헌금을 냄으로써 교인에게 부담이 덜 되고, 과도한 헌금으로 인한 폐단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상한제 제도를 위반할 시, 교회에 대한 징계나, 헌금 조장관련 목회인의 파면 등을 통해 강력하지만, 자발적 행위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로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로 인하여 더 이상 과도한 헌금에 대한 폐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친 개독교의 헌금착취. 어떡해야 합니까?
주객전도.
갈수록 대형화 되고 세분화 되는 현재의 교회풍토를 나타내는 말이다.
마음의 안정과 정서 완화를 위하여 찾게 되는 교회. 교회는 우리에게 인생을 관철하는 철학이자 정신적 지지대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정화와 안정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교회가 도리어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바로 헌금이다. 현재 교회에서 지정한 각종 명목의 헌금의 가짓수는 무려 70여종에 달한다. 이름도 생소한 헌금들이 많고 그 명목으로 교인들은 헌금을, 아니 세금을 내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헌금을 교회 측에서는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교인의 헌금을 자기들만의 잔치에 충당한다던가, 목회자 개인의 사익의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헌금의 상당수는 교회행사나 각종 교육, 선교활동을 위해 지출한다고 하지만 그건 엄연한 명목상의 일이다. 수많은 종류의 이름으로 헌금을 내는데 이 엄청난 액수의 돈이 개신교를 망치고 있다. 순수한 사명감으로 예수님의 뜻을 이어 가고자 하였던 목회자도 넘치게 들어오는 헌금으로 인하여 권세화 되어 초심을 모두 다 잃어 버리고 돈을 위한 목자가 되어 버린다. 넘치게 들어오는 헌금에 눈과 마음이 타락하여 버리게 된다. 즉, 성도들의 지나치게 많은 헌금이 목회자를 타락시키고 개신기독교를 타락의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나친 헌금의 액수를 줄임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헌금을 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는 헌금의 액수만 해도 엄청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글로벌리서치'의 조사에 의하면 가구당 한 해 평균 헌금액이 344.8만원 이상이며 그 중에서 십일조 헌금이 교회 수입 금액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성인 1인 평균은 110만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헌금은 위에서도 보듯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어떻게 이런, 교인에게 부담이 되어버린,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일어난 것일까. 이를 위해서 헌금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 헌금액 중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십일조의 경우, 고대 로마시대에는 세금의 형식으로 바쳐지던 것이었고, 다른 감사헌금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개인의 의향에 따라 바쳐졌었다. 그러나 1500여년이 지난 지금, 국가에는 합법적인 세금을 납세하고 있기 때문에, 세금격의 십일조는 사실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헌금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표시가 아닌가. 이것은 자원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헌금은 자신의 능력이 되는만큼, 자신의 소신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지 강요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성경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자 폐단이다. 이러한 폐단이 심해지자 카톨릭에서는 십일조를 폐지하고 자발적인 정성에 의한 헌금을 바치기로 하였다.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헌금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도적 장치나 비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헌금을 과도하게 내고 있다는 근거로 '헌금상한제'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다. 개별 교인의 헌금 상한가를 정하여 경제요건을 고려치 않은 한정 없는 액수의 헌금납부를 예방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버는 돈의 1/10을 헌금으로 내는 것으로 정한다. 성경 레위기 27장 30절을 보면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에 맞게 헌금을 냄으로써 교인에게 부담이 덜 되고, 과도한 헌금으로 인한 폐단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상한제 제도를 위반할 시, 교회에 대한 징계나, 헌금 조장관련 목회인의 파면 등을 통해 강력하지만, 자발적 행위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로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로 인하여 더 이상 과도한 헌금에 대한 폐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