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 정신교육에서 긍정의 힘이란 구절을 읽었다. 요즘 지속적으로 많이들 하는 말이다. 힘든 업무로 일상마저 어두워져 버린 것이 아닐까 고심하던 내게 그 구절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전 메신저로 애정문제로 힘들어하는 후배 놈과 대화를 하는데 그 구절이 생각나서 나 요즘 긍정적으로 살려고 한다. 너도 긍정적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라 나름대로 조언해주었다. 그러자 후배 놈이 그러더라.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는 결국엔 긍정적일 수 없는 것도 애써 긍정적으로 보려는 억지일 뿐이라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거하지 못한 체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결국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한 발버둥이 아닌가 되묻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부정적인 것이 더 많다. 어둡고 슬픈 기운이 감지되는 데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밝고 긍정적으로라도 생각해보자는 것이지. 이 녀석 형이 말하는데 따지는 게 많아. 그냥 알아 처먹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엔
밝고 긍정적으로 살자는 말들은 다 거짓이다. 어둡고 슬픈 것이 지천인 이 세상에 밝고 긍정적인 것만 보는 인생에 뒤탈은 없을까. 홍상수의 새 영화 하하하는 제목처럼 지속적인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지만, 그 뒷맛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홍상수 감독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거든. 밝고 긍정적으로만 산다는 것이 다 거짓일 수도 있다.
홍상수에게 현재란 무엇일까. 그가 보여준 현재의 모습은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흑백영화처럼 스러져가는 기억과도 같이 느껴진다. 문경과 중식은 그곳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과거에 푹 빠져 현재를 돌볼 여력이 없어 보인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 문경(김상경)은 선배 중식을 만나 청계산 자락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둘 다 얼마 전 통영에 각자 여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막걸리 한잔에 그 곳에서 좋았던 일들을 한 토막씩 얘기하기로 한다.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가 개봉했다. 그의 영화를 예매하고, 건대입구 멀티플레스 앞에서 기다리는 마음은 설렜다. 커피를 한잔 사서 들어선 영화관에서 자리를 잡고, 영화를 기다리면서 내 기대감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둡고 슬프고 구역질나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자꾸만 피하게 됐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내 기억에는 장난스런 줌인이 가득했던 극장전 때부터였다. 내가 거닐던 종로의 거리에서 펼쳐지는 기억놀음은 영화를 한층 더 밝게 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생각났다. 지식인의 폐부를 찌르는 그의 진실탐구는 여전히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날의 제천과 제주도를 비추는 영화의 밝은 분위기였다. 점점 더 유쾌해지는 홍상수의 변모는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를 찾게 했고, 나 역시 그의 영화를 원하게 되었다. 과거 우물에 빠진 얼굴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홍상수는 이제 모든 일을 하하하 웃어넘긴다. 날씨도 좋고, 난 잘난 놈이니 얼굴 구길 것 없다.
위부터 해변의 여인, 극장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의 변화가 감지된 작품들이다. 그는 점점 더 유쾌함의 끝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 듯 하다.
문경과 중식은 과거를 현재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재는 지워져버린 느낌이다. 그들은 술 먹기 전부터 약속한 대로 철저하게 통영에서 좋았었던 기억만 이야기하고. 그들의 대화에는 어둡고 슬픈 현재 없이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극중에서 문경의 꿈에 카메오로 출연한 이순신 장군이 천명한 것처럼 밝고 좋은 것만이 희망일 뿐이니까.
청계산에서 막걸리는 한잔 들이키는 현재 모습은 흑백사진과 내레이션으로 짧게 단편적으로 구성하고, 통영에서의 과거 여행기를 현실처럼 생생하고 평범하게 그린 것은 그의 지난 영화들을 볼 때 의도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영화적인 기법에 인색하고, 오로지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그가 잦은 플래시백과 흑백사진이라는 기법을 들고 나왔을 때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과거가 현재를 먹어버린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현재는 스러지는 잔재와 같은 것이다. 네이버 영화의 이동진 기자는 이를 두고 막걸리를 마시는 현재의 그들을 현실의 유령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지만, 내 생각에는 현재와 미래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브로큰 플라워의 돈은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지도 않은 미래도 아니고, 지나버린 과거도 아닌 현재라고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건데 현재 역시 붙잡을 수도 없이 흘러가는 과거를 통해 기억속에 축적될 뿐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에서 주인공 돈은 과거를 청산하는 여행을 하면서 어린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은 현재고 내가 말해줄 것은 이것밖엔 없어 라고.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우리에게 남은 건 현재 뿐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소유한 것은 지금도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를 마주하는 우리 자신일 뿐이다. 돈 역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현재를 소비하는 과거주의자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하하의 인물들은 사랑을 이루지도 못했고,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다. 문경은 혼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소주한잔을 하며 봐야했고, 호감 가는 여자를 지속적으로 쫒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얻은 건 잠자리 한번 뿐이었다. 중식은 가정 다 팽개치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여자에게 행복을 고했지만, 그는 그녀를 술기운 없이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처지다. 또한 그들을 둘러싼 여러 연인들은 저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어긋나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 덧난다. 하하하 웃으며 이야기 했던 두 사람의 통영 여행기는 그들의 말대로라면 정말 좋고 의미 있는 사건들이었지만, 현실을 곰곰이 뜯어보면 아무것도 행복할만한 것이 없다.
유준상의 연기는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될 수 있다. 생활의 발견과 극장전을 통해 익숙해진 김상경의 연기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엉까지마를 연발하는 교수로, 주변에 한명쯤은 있을법한 연기를 보여준 유준상의 영화평론가 중식으로 분한 연기가 '하하하'에서 가장 빛났다. 최근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주는 유준상은 로니를 찾아서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를 거쳐 앞으로 개봉할 강우석의 신작 '이끼'까지 기대되는 배우이다.
점점 더 밝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착각했던 홍상수 월드는 물론 웃기고 행복한 웃음이 끊이질 않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술 한잔 하며 고꾸라져 방구석에서 기분좋은 잠을 자지만, 다음 날의 숙취처럼 피곤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또 다시 술을 먹는다. 문경과 중식이 막걸리를 걸치는 것도, 통영에서 그 많은 술을 먹고 다디는 것도 결국엔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인생을 하하하 웃어 넘기기 위한 술수일 뿐이다. 술자리와 여관방의 미학이라고 불렸던 그의 영화는 이제 완전히 음지에서 양지로 탈출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득 찬 영화관의 관객들은 낄낄거리며 영화관을 나온다. 정말 웃기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와 다시 당신의 일상을 마주쳤을 때 그렇게 긍정적으로 웃을 수 있을까. 문경은 통영의 바다를 보며 이런 말을 한다. 캐나다도 서울도 가기 싫어졌어. 또 어디서든 잘살 것 같지도 않아. 당신이 그 모습을 보고 위안을 느낀다면 이 정도일 뿐이다. '저런 놈도 사는데 나는 더 잘난 인생을 살고 있어'라는 상대적인 만족.
내가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주문을 걸어봤자 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미화시켜 안주하는 인생이란 그래서 백해무익하다.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고민 끝에 얻는 결론이 없이 나아가는 인생이란 그래서 무의미하다. 결국 그들의 한 잔한 잔 넘기는 막걸리처럼 숙취와 섹스만이 가득 찬 인생을 마주할 뿐이다. 후회하더라도 선택하고 짚고 넘어감이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긍정적인 사상이 홍상수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작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김상중님의 고민하는 힘은 고민끝에 얻은 결론의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 영화에서 어둡고 슬픈 것을 피하려는 인간심리에 대한 해답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인용해봤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 김상중 선생은 '고민하는 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에 긍정적인 것만을 바라보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래서 애써 진지한 상황을 모면할때 꺼내드는 하하하라는 무기는 우리 인생의 결론을 미루고, 현재를 흑백화면의 암담함으로 빠져들게 한다.
하하하 웃음소리에는 긍정의 힘이 있을지도 모르나, 고통스런 고민 끝에 얻는 결론이 있는 삶은 그런 억지 웃음이란 애초부터 필요치 않다.
홍상수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점점 더 견고해진 연기를 보여준다. 유준상과 김상경, 문소를 비롯한 김규리, 김강우, 윤여정의 농익은 연기들이 하하하를 더욱 극적인 웃음창고로 만들어낸다. 좋은 감독과 좋은 배우들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5월의 첫 걸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이창동의 '시', 임상수의 '하녀'가 기다리고 있다.
<하하하> 긍정적인 삶의 실체.
하하하 <夏夏夏, 2009>
긍정적인 삶의 실체.
얼마 전 회사 정신교육에서 긍정의 힘이란 구절을 읽었다. 요즘 지속적으로 많이들 하는 말이다. 힘든 업무로 일상마저 어두워져 버린 것이 아닐까 고심하던 내게 그 구절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전 메신저로 애정문제로 힘들어하는 후배 놈과 대화를 하는데 그 구절이 생각나서 나 요즘 긍정적으로 살려고 한다. 너도 긍정적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라 나름대로 조언해주었다. 그러자 후배 놈이 그러더라.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긍정적인 마인드는 결국엔 긍정적일 수 없는 것도 애써 긍정적으로 보려는 억지일 뿐이라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거하지 못한 체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결국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한 발버둥이 아닌가 되묻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부정적인 것이 더 많다. 어둡고 슬픈 기운이 감지되는 데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밝고 긍정적으로라도 생각해보자는 것이지. 이 녀석 형이 말하는데 따지는 게 많아. 그냥 알아 처먹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엔
밝고 긍정적으로 살자는 말들은 다 거짓이다. 어둡고 슬픈 것이 지천인 이 세상에 밝고 긍정적인 것만 보는 인생에 뒤탈은 없을까. 홍상수의 새 영화 하하하는 제목처럼 지속적인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지만, 그 뒷맛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홍상수 감독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거든. 밝고 긍정적으로만 산다는 것이 다 거짓일 수도 있다.
홍상수에게 현재란 무엇일까. 그가 보여준 현재의 모습은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흑백영화처럼 스러져가는 기억과도 같이 느껴진다. 문경과 중식은 그곳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과거에 푹 빠져 현재를 돌볼 여력이 없어 보인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 문경(김상경)은 선배 중식을 만나 청계산 자락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둘 다 얼마 전 통영에 각자 여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막걸리 한잔에 그 곳에서 좋았던 일들을 한 토막씩 얘기하기로 한다.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가 개봉했다. 그의 영화를 예매하고, 건대입구 멀티플레스 앞에서 기다리는 마음은 설렜다. 커피를 한잔 사서 들어선 영화관에서 자리를 잡고, 영화를 기다리면서 내 기대감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둡고 슬프고 구역질나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자꾸만 피하게 됐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내 기억에는 장난스런 줌인이 가득했던 극장전 때부터였다. 내가 거닐던 종로의 거리에서 펼쳐지는 기억놀음은 영화를 한층 더 밝게 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생각났다. 지식인의 폐부를 찌르는 그의 진실탐구는 여전히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날의 제천과 제주도를 비추는 영화의 밝은 분위기였다. 점점 더 유쾌해지는 홍상수의 변모는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를 찾게 했고, 나 역시 그의 영화를 원하게 되었다. 과거 우물에 빠진 얼굴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홍상수는 이제 모든 일을 하하하 웃어넘긴다. 날씨도 좋고, 난 잘난 놈이니 얼굴 구길 것 없다.
위부터 해변의 여인, 극장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의 변화가 감지된 작품들이다. 그는 점점 더 유쾌함의 끝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 듯 하다.
문경과 중식은 과거를 현재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재는 지워져버린 느낌이다. 그들은 술 먹기 전부터 약속한 대로 철저하게 통영에서 좋았었던 기억만 이야기하고. 그들의 대화에는 어둡고 슬픈 현재 없이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극중에서 문경의 꿈에 카메오로 출연한 이순신 장군이 천명한 것처럼 밝고 좋은 것만이 희망일 뿐이니까.
청계산에서 막걸리는 한잔 들이키는 현재 모습은 흑백사진과 내레이션으로 짧게 단편적으로 구성하고, 통영에서의 과거 여행기를 현실처럼 생생하고 평범하게 그린 것은 그의 지난 영화들을 볼 때 의도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영화적인 기법에 인색하고, 오로지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그가 잦은 플래시백과 흑백사진이라는 기법을 들고 나왔을 때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과거가 현재를 먹어버린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현재는 스러지는 잔재와 같은 것이다. 네이버 영화의 이동진 기자는 이를 두고 막걸리를 마시는 현재의 그들을 현실의 유령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지만, 내 생각에는 현재와 미래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브로큰 플라워의 돈은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지도 않은 미래도 아니고, 지나버린 과거도 아닌 현재라고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건데 현재 역시 붙잡을 수도 없이 흘러가는 과거를 통해 기억속에 축적될 뿐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에서 주인공 돈은 과거를 청산하는 여행을 하면서 어린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은 현재고 내가 말해줄 것은 이것밖엔 없어 라고.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우리에게 남은 건 현재 뿐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소유한 것은 지금도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를 마주하는 우리 자신일 뿐이다. 돈 역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현재를 소비하는 과거주의자일 뿐이니까 말이다.
하하하의 인물들은 사랑을 이루지도 못했고,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다. 문경은 혼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소주한잔을 하며 봐야했고, 호감 가는 여자를 지속적으로 쫒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얻은 건 잠자리 한번 뿐이었다. 중식은 가정 다 팽개치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여자에게 행복을 고했지만, 그는 그녀를 술기운 없이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처지다. 또한 그들을 둘러싼 여러 연인들은 저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어긋나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 덧난다. 하하하 웃으며 이야기 했던 두 사람의 통영 여행기는 그들의 말대로라면 정말 좋고 의미 있는 사건들이었지만, 현실을 곰곰이 뜯어보면 아무것도 행복할만한 것이 없다.
유준상의 연기는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될 수 있다. 생활의 발견과 극장전을 통해 익숙해진 김상경의 연기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엉까지마를 연발하는 교수로, 주변에 한명쯤은 있을법한 연기를 보여준 유준상의 영화평론가 중식으로 분한 연기가 '하하하'에서 가장 빛났다. 최근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주는 유준상은 로니를 찾아서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를 거쳐 앞으로 개봉할 강우석의 신작 '이끼'까지 기대되는 배우이다.
점점 더 밝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착각했던 홍상수 월드는 물론 웃기고 행복한 웃음이 끊이질 않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술 한잔 하며 고꾸라져 방구석에서 기분좋은 잠을 자지만, 다음 날의 숙취처럼 피곤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또 다시 술을 먹는다. 문경과 중식이 막걸리를 걸치는 것도, 통영에서 그 많은 술을 먹고 다디는 것도 결국엔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인생을 하하하 웃어 넘기기 위한 술수일 뿐이다. 술자리와 여관방의 미학이라고 불렸던 그의 영화는 이제 완전히 음지에서 양지로 탈출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득 찬 영화관의 관객들은 낄낄거리며 영화관을 나온다. 정말 웃기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와 다시 당신의 일상을 마주쳤을 때 그렇게 긍정적으로 웃을 수 있을까. 문경은 통영의 바다를 보며 이런 말을 한다. 캐나다도 서울도 가기 싫어졌어. 또 어디서든 잘살 것 같지도 않아. 당신이 그 모습을 보고 위안을 느낀다면 이 정도일 뿐이다. '저런 놈도 사는데 나는 더 잘난 인생을 살고 있어'라는 상대적인 만족.
내가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주문을 걸어봤자 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미화시켜 안주하는 인생이란 그래서 백해무익하다.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고민 끝에 얻는 결론이 없이 나아가는 인생이란 그래서 무의미하다. 결국 그들의 한 잔한 잔 넘기는 막걸리처럼 숙취와 섹스만이 가득 찬 인생을 마주할 뿐이다. 후회하더라도 선택하고 짚고 넘어감이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긍정적인 사상이 홍상수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작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김상중님의 고민하는 힘은 고민끝에 얻은 결론의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 영화에서 어둡고 슬픈 것을 피하려는 인간심리에 대한 해답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인용해봤다.
재일교포 출신의 작가 김상중 선생은 '고민하는 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에 긍정적인 것만을 바라보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래서 애써 진지한 상황을 모면할때 꺼내드는 하하하라는 무기는 우리 인생의 결론을 미루고, 현재를 흑백화면의 암담함으로 빠져들게 한다.
하하하 웃음소리에는 긍정의 힘이 있을지도 모르나, 고통스런 고민 끝에 얻는 결론이 있는 삶은 그런 억지 웃음이란 애초부터 필요치 않다.
홍상수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점점 더 견고해진 연기를 보여준다. 유준상과 김상경, 문소를 비롯한 김규리, 김강우, 윤여정의 농익은 연기들이 하하하를 더욱 극적인 웃음창고로 만들어낸다. 좋은 감독과 좋은 배우들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5월의 첫 걸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이창동의 '시', 임상수의 '하녀'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