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투쟁의 선도자 안중근 의사 <11>

조의선인2010.05.19
조회300

 

4. 구국운동에 나서다

 

 

⑶ 상해의 한국인 재산가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전광석화(電光石火)식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고 한국병탄(韓國倂呑)의 수순을 밟아갔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 1905년 을사(乙巳)년이 되었다.


인천 항만에서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의 대포 소리가 크게 울리며 동양에 일대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홍 신부가 한국의 장래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탄식하기에 내가 왜 그렇게 되느냐고 물으니 홍 신부가 말했다.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요, 일본이 한국을 관할하려 들테니 어찌 위태롭지 않은가?"


그때 나는 날마다 신문과 잡지와 각국 역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가 있었다.



러일전쟁이 강화하여 끝난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으로 건너와서 정부를 위협하여 5개 조약을 체결하니 3천리 강산과 2천만 인심이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안했다. 이런 일을 당하자 아버님께서는 마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더욱 깊어졌다. 나는 아버님과 은밀히 상의를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당시에 일본의 선전포고문 가운데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그 같은 신의를 져버리고 야심적인 책략만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이토의 정략때문입니다. 먼저 강제로 조약을 맺고, 다음에는 뜻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없앤 다음, 강토를 삼키려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지금의 새 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을 때만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그러나 지금 의거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에 반대한다한들 일본과 우리의 힘에 차이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음만 당할 뿐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청나라 산동(山東)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 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후, 앞뒤 방책을 꾀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살펴 본 뒤에 돌아올 테니 아버님께서는 그동안에 은밀히 짐을 꾸려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 온 다음에 다시 의논해서 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부자 사이에 계획이 정해졌다.’



이렇게《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의 기록에서처럼 안중근은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국권이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자 해외 이주를 결심한다. 해외로 나가서 의병을 모아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쳐 독립을 쟁취하려는 생각이었다. 연구자들은 안중근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눈다.



‘1897년 그의 나이 18세에 이르러 천주교 세례를 받기 전의 단계와 이후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 두 번째 단계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이 중에서 두 번째 단계는 첫째 1897년부터 1905년 말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해여행을 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주로 향리에서 활동하는 시기, 둘째 1906년 3월 진남포로 이주한 이후 1907년 10월까지 애국계몽운동과 식산진흥운동, 국체보상운동에 참여하던 시기, 셋째 1907년 10월 북간도로 망명한 이후 1910년 3월 26일 32세의 나이로 순국할 때까지로 구분될 수 있다.’



안중근은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말기 가족이 망명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곳을 찾기 위해 먼저 답사차 중국으로 건너갔다. 먼저 산동 지역 등지를 두루 답사하고 상해로 갔다. 상해는 일찍부터 국제무역 중심의 해양도시로서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조계지(租界地)가 있는 도시였다. 또 세계 각국의 상인과 외교관들이 내왕하면서 문물이 풍성하고 국제적인 여론형성과 정보수집에 유리한 곳이었다. 상당수의 한국인도 이주하여 터를 닦아 살고 있었다.



안중근은 낯선 이역에서 동포들이 사는 곳을 찾아 여러 날 동안 동포들을 만났다. 그리고 망해가는 고국의 소식을 전하고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 함께 나설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포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은 크게 실망했지만 동포들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대신이었던 민영익(閔泳翊)을 찾아갔다. 민영익은 여흥(驪興) 민씨(閔氏) 세력의 핵심인물로서 1883년에 전권대사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러일전쟁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안응칠역사》에는 민영익이 안중근을 만나기를 거부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민영익을 찾아 갔더니 문지기 하인이 문을 닫고 대감께서는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며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돌아갔다가 다음날 두세 번 더 찾아 갔으나 전날과 마찬가지로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나는 크게 꾸짖었다.


"그대는 한국인이 되어 가지고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더구나 한국에서 여러 대에 걸쳐 국가의 녹(祿)을 먹은 신하로서 이같이 어려운 때를 만나 전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혼자만 베개를 높이 하고 편히 누워 조국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우리 나라가 위급해진 것이 모두 그대와 같은 대관들 때문이오, 민족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워 만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민영익에게서 실망한 안중근은 이번에는 서상근(徐相根)이라는 상인을 찾아갔다. 서상근은 사과(司果) 감리(監理) 등을 지낸 인물로 인천에서 부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용익과 쌀장사를 하다가 충돌하자 상해로 망명했다. 안중근은 그에게 국내 정세를 말하고 나라를 구할 방도를 물었다. 그리고 설득에 나섰다.



‘"나에게 한국의 일은 이야기 하지 마시오. 나는 일개 장사치로서 몇 십만 원이 넘는 돈을 정부 고관에게 빼앗기고 몸을 피해 여기까지 왔고, 더구나 국가의 정치야 우리 같은 백성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구나 나라란 몇 명의 대관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2천만 민족의 나라입니다.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의 민족세계에서 어째서 한국 민족만이 남의 먹이가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나 나는 단지 장사꾼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면 족하니 나에게 다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두세 번 더 설득해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로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상해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언행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뒷날 이때의 심경을《안응칠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이러니 나라의 앞날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길게 탄식했다. 여관으로 돌아와 침상 위에 누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니 착잡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⑷ ‘민족’의 의미 헤아린 민족주의자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안중근이 서상근에게 한 말이다. 안중근이 서상근을 찾아가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고자 할 때 서상근은 구국운동(救國運動)이 장사꾼인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민족세계에서 어떻게 한국 민족만이 남의 먹이가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안중근은 이때 “지금은 민족세계”, “한국 민족만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안중근이 ‘민족’에 대한 근대적 의미와 가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민족’이라는 용어는 러일전쟁[露日戰爭] 중에《황성신문(皇城新聞)》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안중근이 사용한 용어와 그 안에 담긴 민족의식에 대한 의미와 가치는 각별한 듯하다. 다음은 신운룡 박사의 견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안중근이 '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민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가 민족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이는 그의 해외 이주 계획이 단순히 '해서교안'이후 향촌사회에서 세력약화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안중근은 해외 이주계획을 거시적 안목에서 민족의 장래문제와 결부하여 고려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민족의식은 어느 한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국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민족의식은 천주교와 결합되어 의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당시의 민족에 대한 담론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대서신사(泰西新史)」등의 영향을 받으며 이론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중근의 민족의식은 일찍부터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천주교를 믿으면서도 일부 신부와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그리고 한국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저들의 행태에 반항하면서 자아의식이 싹텄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노골적인 국권침탈과 일본인들의 거들먹대는 행동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저항심과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대한매일신보》와《황성신문》의 논설을 읽으면서 애국심과 민족정신은 더 자라났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