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으 ㅣ자아 충돌

--201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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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하였던 바는
무언가 가지려고 다투기조차 아닌
자기부정이었다.
그런 자기부정에 맞는 건 다름아닌 우주탈출이라는 해탈 뿐이다.
또한, 창조를 거부한다.


고통받는 모친에 동감하여 고통스러운 아기에게
모친은 위로 따위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아기에게 복수를 했다, 일평생.
방법은, 자아 투사와 형식적인 관심이었다.
형식적인 관심은 오직 육신을 먹여 살리는 것이었고
그 수준 이상이 없는 동물의 대우였다.
자아 투사란, 나의 자아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고
모친의 자아만을 의식했다는 게다.


동물은, 아니 동물도 제새끼를 귀여워한다.
허나 모친은 나를 그렇게 이뻐하진 않았다.
틀림없는 거리를 두고 키웠을 뿐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나는 모친이 접촉하는 일조차 혐오한다.
이것이 언제부터였나?
어려서 남동생과 어머니 따라 목욕탕 다닐 때에도
어머니의 육신이 낯설었다.
만지는 일은 더우기 곤란했다.
그 분은 어머니 아닌 낯설은 분이었다.
이렇게 나는 여성들에게 동화하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괴로웠다.


상상해보면, 다른 아기들처럼
분명 나 또한 이원적 세계 구조에 처음부터 놓였다.
눈으로 뵈는 것보단 단연 소리를 들어
그 세계구조 상황진행을 파악했다.
두 개의 음원이 서로 움직이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소리를 교환하고
그 소리들을 몸 상태들과 연결지어서
나는 총화의 정신으로 내 몸을 인식하였던 게다.
그들 소리와 나의 의식의 사이 내 몸이 있었다.
'이 나의 몸에는 이런저런 양태의 소리들이
  의미적으로 깃들겠다. 이 쪽의 소리든, 아님 저 쪽의 소리든 간에.'


제대로 눈떠 환경을 보게됐을 때
이미 한 쪽의 음원은 나와 동종의 몸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 또한 그 눈뜸 이전에
양측 음원들 사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음원을
벌써 내 것으로서 채택해 놓고 있었던 게다.
비록 날 업어주고 씻어준 이는 생모였으나
총화적인 아기의 정신으로 일찍이 나는
더 안정적인 음원의 인격 성향을 선택했다.
당연히 그건, 권위적이고 곤조있는 부친의 것이었다.


나는, 눈뜨기 전에 선택한 그쪽 음원의 몸이
내 몸과 반대인 이성이라 알 수가 있었겠는가?
모든 아기는 자기 성별을 의식하지 않는다.
아기들은 소리의 방향들을 알고서
오직 방향들 사이에서 인격을 선택한다.
그리고 방향들은 누구나 둘이었다.


치우친다는 선택으로 한 쪽을 주요한 음원으로 기준하기는 하나
양 음원 사이의 수세적인 불균형성은
역시 마음에 불안정을 가져다준다.
비록 결과적으로 나는 부친의 쪽을 인격으로서 채택하였으나
모친의 모든 감정은 나의 바탕이 되어있다.
그 감정들에 간판을 달아주진 않으나
그것들은 언제나 내게 제동을 건다.
그것은 마치 정치의 여야 관계와 같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긍정적인 관점을 지향하며 말하려 했고
말하려 하는 내용은 항상 부정적 문제들이었다.
어떻게 혐오스런 것들을 긍정적인 수준에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환으로 성적자위도 했던 것이며 포르노도 보았다.
물론 성적인 문제들은 나로선 타인과의 사이에 일절 두지를 않는 것이나
워낙 사람을 싫어하는 나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의식해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지금 난 물론 평범함이나 특별함을 구별하지도 않고 있으나
그건 어렸을 때엔 고민사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