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축구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축구판에서 제일 좋아하고 좋아했고 존경하는 축구스타를 먼저 하고 싶었다.
유명하지만, 세계적이지만, 누구보다 로맨틱한 Soccer Player.
그라운드 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누구나 클럽에 애을 갖고있지만 누구보다도 클럽을 사랑한.. 부득이하게 이적을 하여 적으로 만났을 때도. 피렌체의 전설이 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그를 블로깅의 첫번째 타깃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없다.
바티스투타의 프로필
생년월일 : 1969년 2월 1일
출생지 : 아르헨티나 레콩키스타 (Argentina, Reconquista)
키 : 185cm 체중 : 73kg
포지션 : ST (스트라이커)
경력
1987-1988 뉴웰스 올드 보이즈 Newell's Old Boys (youth)
1988-1989 뉴웰스 올드 보이즈Newell's Old Boys (pro) (24경기 7골)
1989-1990 리버 플레이트 River Plate (21경기 4골)
1990-1991 Boca Juniors (30경기 13골)
1991-2000 Fiorentina (269경기 168골)
2000-2003 AS Roma (60경기 30골)
2003 Internazionale (12경기 2골)
2003-2005 Al Arabi (22경기 30골)
클럽 경력 : 440경기 249골
국가대표 경력 : 94,98,02월드컵 출전
A매치 78경기 56골
주요이력
1991,1993 코파 아메리카 우승 (아르헨티나)
1992 피파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아르헨티나)
93-94 세리에B 우승 (피오렌티나)
95-96 코파 이탈리아 우승 (피오렌티나)
96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 (피오렌티나)
00-01 세리에A 우승 (AS로마)
01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 (AS로마)
1991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94-95 세리에A 득점왕
1998 아르헨티나 기자협회 올해의 선수
2004 FIFA 100인선정
농구스타를 꿈꾸는 소년.. 늦게 시작한 축구
일명 '바티골'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바티스투타는 다른 많은 축구선수들과는 달리 유소년부터 축구를 시작하지 않은 희귀한 케이스이다.
농구선수 (혹자는 야구선수라는 설이 있음)를 꿈꾸었던 소년 바티스투타는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좋은 편이어서 큰 체격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꿈이었던 바티스투타(이하 바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축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한 계기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다.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최초로 월드컵을 우승하며 아르헨티나를 뜨겁게 달궜다.
여기서 마리오 켐페스(Mario Kempes)라는 당시 스트라이커의 플레이를 보면서 (켐페스는 월드컵에서 MVP, 득점왕을 차지)
바티스투타는 축구에 관심을 두게 된다.
바티스투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마리오 켐페스(Mario Kempes)
17살이라는 다소 늦은나이에 축구를 시작하게 된 바티는 축구를 늦게 시작한 탓인지 그렇게 특출날게 없는 그냥 그저 그런 선수였다.
뉴웰스 유스에서 시작한 그는 1년 프로에서 뛴 다음 아르헨티나 명문클럽 리버플레이트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낸 그는 실망감에 빠진다. 결국 시즌 중반 그는 스쿼드에 제외된다.
서서히 들어나는 실력
바티는 1990년, 시즌 중반 리버플레이트의 라이벌 구단 보카 주니오르로 이적을 하게된다. 처음엔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지만 91-92시즌이 시작되면서
타바레즈 감독의 취임으로 인해 그는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리그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인 그 활약을 인정받아 22살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발탁이 된다. 바티는 1991년 칠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였다. 서서히 물이 올라온 바티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6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하고 더불어 조국 아르헨티나를 우승에 올려놓게된다.
보카주니오르 시절의 바티스투타
(붉은 유니폼은 리버플레이트 시절..)
로맨티스트의 선택, 피렌체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에 오른 바티스투타는 유럽의 빅클럽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된다.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같은 대 명문팀들이
영입에 나섰으나 그의 선택은 의외로 피렌체. 피오렌티나 였다. 결국 그는 22세 젊은 나이로 유럽 축구무대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그의 세리에A 첫 데뷔시즌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리그 27경기를 뛰며 13골을 기록하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1993년 바티스투타는 다시 한번 에콰도르에서 개최된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지만. 정작 클럽인 피오렌티나는
세리에B로 강등되는 상황이 된다. 이 시점에서 바티는 당시 최고반열의 스트라이커로 많은사람들은 물론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그가 다른 팀을
찾아 떠날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도 많은 유럽명문팀들은 그가 이적할 것으로 예상에 유혹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맨티스트는 떠나지 않고 팀의 남아 세리에A 승격을 위해 싸웠고, 16골을 기록한 바티와 명장 라니에리를 앞세워 피렌체는 한시즌만에 다시 세리에A로 복귀하였다. 당시 축구계에는 돈과 명예, 우승에 목말라 빅클럽으로의 이적이 빈번했던 시기였던 터라 그의 잔류는 축구계에 충격을 주는 물론 피오렌티나 팬들은 그를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94-95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그는 전반기 11골 연속골을 기록. 세리에 기록을 갈아치운다. 이 시즌에 바티는 32경기 26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득점왕에 오르게된다. 그 뒤로 바티스투타는 99년부터 2000년까지 269경기 168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왼쪽사진은 입단 당시 바티스투타.
바티스투타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바티의 특유 따발총(?) 세레모니
어찌보면 예수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바티스투타이다. 좀 닮긴 했다. ㅎㅎ
94,98 월드컵과의 악연
승승장구 하는 바티스투타는 94년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게된다. 94년 미국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인 그리스전에서 그는 폭풍같은 헤트트릭을
몰아쳐 4:0 대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2차전인 나이지리아전에서도 2:1로 승리를 거둔 아르헨티나는 3차전에서 불가리아에게 패배를 했지만 16강에 진출하였다. 16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루마니아. 바티스투타는 전반16분 패널티킥을 넣는 등 팀 승리를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루마니아에게 3:2로 아쉬운 패배를 당한다. 한번 아픔을 겪은 바티는 절치부심하며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다시한번 우승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바티스투타는 예선 1차전 일본을 상대로 결승골을 뽑아내고 2차전인 자메이카전에서 또다시 벼락같은 헤트트릭을 기록.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2대회 연속 해트트릭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더욱 알렸다. 조별예선에서 3전 전승을 거둔 아르헨티나는 무난하게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드디어 오른 16강에서 바티스투타는 전반6분 패널티킥을 넣었다.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와 2:2 승부차기 접전끝에 (4:3)으로 8강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또다시 악몽이 찾아왔다. 8강에서 만난 네덜란드는 당시 너무나도 강력한 스쿼드를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크루이베르트와 베르캄프에게 골을 내주며 2:1 아쉬운 패배를 당하면서 98년 월드컵도 마감하게 된다.
로마로의 이적, 그리고 눈물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98-99 세리에 A시즌 바티는 역시나 당시 최고의 골잡이로써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반기 17경기에 출장 17득점을 기록하는 등 초반에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도중 부상만 아니었어도 득점왕을 할 수 있는 페이스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27경기 21득점을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한다. 이 후 바티를 앞세운 피오렌티나는 서서히 세리에 강호로 자리매김을 하게된다. 피오렌티나에 몸 담아온 그에게 도중에 많은 이적제의가 들어왔지만
클럽을 사랑하는 바티스투타는 모든 제의를 거절한다. 이러한 바티를 싫어할 팬이 있겠는가. 피렌체팬들은 바티스투타에게 더욱 환호했고 바티는 그의 보답을 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피오렌티나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피오렌티나에게 아주 달콤한 제의가 들어오게된다. 같은 리그소속 AS로마에서 바티스투타에게 당시 세리에A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이적금액 약 400억을 제안한다.
재정난에 빠져있던 피오렌티나. 그 피오렌티나에서 오랫동안 몸 담아온 바티스투타도 우승에 대한 욕망이 약간이라도 있었던 시기..
결국 피오렌티나는 2000년 5월 이적의 동의하며 바티스투타는 그렇게 로마로 떠난다.
로마로 이적한 바티스투타는 우승청부서 카펠로감독 아래 로마의 왕자 토티와 더불어 꾸준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그 시즌 28경기 출전 20득점을 올리며 마침내 00-01시즌 우승이라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시즌에서 바티는 로맨티스트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데 바로 로마 홈에서 치뤄진 로마 vs 피오렌티나전이다.
이 경기에서 로마가 1:0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애석하게도 그 골의 주인공은 가브리엘 바티였다.
당시 바티는 골을 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체 눈물을 훔쳤다.
이러한 바티스투타에게 원정까지 온 피오렌티나 팬들은 바티에게 열광을 했다.
바티스투타가 피오렌티나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유명한 대목이다.
"나는 승리를 원했지만 피오렌티나가 패하는 걸 원치 않았다. 승리 할 수 밖에 없었던 골이 나에게서 나왔다는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바티의 마지막 월드컵.. 그리고 실수
사실상 바티스투타의 마지막이 될 한일월드컵에서 바티는 전의를 불태웠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해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티스투타는 자비를 들여가며 월드컵에 참가한다. 당시 죽음의 조라 일컬어졌던 F조에는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나이지리아 그리고 스웨덴이 예선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1차전인 나이지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바티스투타를 앞세워 아르헨티나의 출발은 괜찮았다. 하지만 2차전
잉글랜드전에서 1:0으로 패배하게 되는데 아쉽게도 빌미를 제공한 선수는 바티였다. 이후 스웨덴에게 1:1로 비기게 되면서 1승 1무 1패를 기록
조예선 3위에 그치며 아르헨티나는 충격에 예선탈락을 하게된다. 바티스투타는 스웨덴전이 끝난 직후 그라운드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당시 IMF구제금융을 받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바티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탈락후 눈물을 흘리는 바티스투타.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 우승트로피를 끝으로 바티스투타는 사실상 더이상의 트로피는 없었다. 무릎부상에 시달린 그는 더이상 전성기 시절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후 로마,인테르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했지만 그의 하락세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바티는 2003년 중동으로 가서 알 아라비에서 2년을 뛴 후
그의 축구인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
.
마치며..
다른 유명한 선수들과 비교했을때 그의 우승이력은 초라하기 짝이없다. 발롱도르수상도 없을 뿐더러 올해의선수상도 받은적이 없다.
그런 그가 이토록 사랑을 받는건 그가 피오렌티나에게 보여준 눈물과 열정 그리고 애정때문이 아닐까?
돈과 명예를 쫓는 다른 많은 선수들과는 달리 바티는 한 클럽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들도 많지만
어려웠던 시기 부득이하게 이적을하고 이적을 하고 나서도 그 클럽을 잊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팀을 위해 헌신하는 바티스투타. 바티는 그를 좋아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그를 축구블로그의 첫 글로 장식하기에는 더없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부족한 블로그를 마친다.
ex) 바티골 : 바티골이라는 별명은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그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골을 넣은다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선수]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Gabriel Omar Batistuta)
이번 축구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축구판에서 제일 좋아하고 좋아했고 존경하는 축구스타를 먼저 하고 싶었다.
유명하지만, 세계적이지만, 누구보다 로맨틱한 Soccer Player.
그라운드 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누구나 클럽에 애을 갖고있지만 누구보다도 클럽을 사랑한.. 부득이하게 이적을 하여 적으로 만났을 때도. 피렌체의 전설이 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그를 블로깅의 첫번째 타깃으로 삼기엔 부족함이 없다.
바티스투타의 프로필
생년월일 : 1969년 2월 1일
출생지 : 아르헨티나 레콩키스타 (Argentina, Reconquista)
키 : 185cm 체중 : 73kg
포지션 : ST (스트라이커)
경력
1987-1988 뉴웰스 올드 보이즈 Newell's Old Boys (youth)
1988-1989 뉴웰스 올드 보이즈Newell's Old Boys (pro) (24경기 7골)
1989-1990 리버 플레이트 River Plate (21경기 4골)
1990-1991 Boca Juniors (30경기 13골)
1991-2000 Fiorentina (269경기 168골)
2000-2003 AS Roma (60경기 30골)
2003 Internazionale (12경기 2골)
2003-2005 Al Arabi (22경기 30골)
클럽 경력 : 440경기 249골
국가대표 경력 : 94,98,02월드컵 출전
A매치 78경기 56골
주요이력
1991,1993 코파 아메리카 우승 (아르헨티나)
1992 피파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아르헨티나)
93-94 세리에B 우승 (피오렌티나)
95-96 코파 이탈리아 우승 (피오렌티나)
96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 (피오렌티나)
00-01 세리에A 우승 (AS로마)
01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 (AS로마)
1991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94-95 세리에A 득점왕
1998 아르헨티나 기자협회 올해의 선수
2004 FIFA 100인선정
농구스타를 꿈꾸는 소년.. 늦게 시작한 축구
일명 '바티골'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바티스투타는 다른 많은 축구선수들과는 달리 유소년부터 축구를 시작하지 않은 희귀한 케이스이다.
농구선수 (혹자는 야구선수라는 설이 있음)를 꿈꾸었던 소년 바티스투타는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좋은 편이어서 큰 체격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꿈이었던 바티스투타(이하 바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축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한 계기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다.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최초로 월드컵을 우승하며 아르헨티나를 뜨겁게 달궜다.
여기서 마리오 켐페스(Mario Kempes)라는 당시 스트라이커의 플레이를 보면서 (켐페스는 월드컵에서 MVP, 득점왕을 차지)
바티스투타는 축구에 관심을 두게 된다.
바티스투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마리오 켐페스(Mario Kempes)
17살이라는 다소 늦은나이에 축구를 시작하게 된 바티는 축구를 늦게 시작한 탓인지 그렇게 특출날게 없는 그냥 그저 그런 선수였다.
뉴웰스 유스에서 시작한 그는 1년 프로에서 뛴 다음 아르헨티나 명문클럽 리버플레이트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낸 그는 실망감에 빠진다. 결국 시즌 중반 그는 스쿼드에 제외된다.
서서히 들어나는 실력
바티는 1990년, 시즌 중반 리버플레이트의 라이벌 구단 보카 주니오르로 이적을 하게된다. 처음엔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지만 91-92시즌이 시작되면서
타바레즈 감독의 취임으로 인해 그는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리그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인 그 활약을 인정받아 22살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발탁이 된다. 바티는 1991년 칠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였다. 서서히 물이 올라온 바티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6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하고 더불어 조국 아르헨티나를 우승에 올려놓게된다.
보카주니오르 시절의 바티스투타
(붉은 유니폼은 리버플레이트 시절..)
로맨티스트의 선택, 피렌체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에 오른 바티스투타는 유럽의 빅클럽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된다.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같은 대 명문팀들이
영입에 나섰으나 그의 선택은 의외로 피렌체. 피오렌티나 였다. 결국 그는 22세 젊은 나이로 유럽 축구무대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그의 세리에A 첫 데뷔시즌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리그 27경기를 뛰며 13골을 기록하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1993년 바티스투타는 다시 한번 에콰도르에서 개최된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지만. 정작 클럽인 피오렌티나는
세리에B로 강등되는 상황이 된다. 이 시점에서 바티는 당시 최고반열의 스트라이커로 많은사람들은 물론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그가 다른 팀을
찾아 떠날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도 많은 유럽명문팀들은 그가 이적할 것으로 예상에 유혹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맨티스트는 떠나지 않고 팀의 남아 세리에A 승격을 위해 싸웠고, 16골을 기록한 바티와 명장 라니에리를 앞세워 피렌체는 한시즌만에 다시 세리에A로 복귀하였다. 당시 축구계에는 돈과 명예, 우승에 목말라 빅클럽으로의 이적이 빈번했던 시기였던 터라 그의 잔류는 축구계에 충격을 주는 물론 피오렌티나 팬들은 그를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94-95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그는 전반기 11골 연속골을 기록. 세리에 기록을 갈아치운다. 이 시즌에 바티는 32경기 26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득점왕에 오르게된다. 그 뒤로 바티스투타는 99년부터 2000년까지 269경기 168골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왼쪽사진은 입단 당시 바티스투타.
바티스투타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바티의 특유 따발총(?) 세레모니
어찌보면 예수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바티스투타이다. 좀 닮긴 했다. ㅎㅎ
94,98 월드컵과의 악연
승승장구 하는 바티스투타는 94년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게된다. 94년 미국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인 그리스전에서 그는 폭풍같은 헤트트릭을
몰아쳐 4:0 대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2차전인 나이지리아전에서도 2:1로 승리를 거둔 아르헨티나는 3차전에서 불가리아에게 패배를 했지만 16강에 진출하였다. 16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루마니아. 바티스투타는 전반16분 패널티킥을 넣는 등 팀 승리를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루마니아에게 3:2로 아쉬운 패배를 당한다. 한번 아픔을 겪은 바티는 절치부심하며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다시한번 우승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바티스투타는 예선 1차전 일본을 상대로 결승골을 뽑아내고 2차전인 자메이카전에서 또다시 벼락같은 헤트트릭을 기록.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2대회 연속 해트트릭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더욱 알렸다. 조별예선에서 3전 전승을 거둔 아르헨티나는 무난하게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드디어 오른 16강에서 바티스투타는 전반6분 패널티킥을 넣었다.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와 2:2 승부차기 접전끝에 (4:3)으로 8강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또다시 악몽이 찾아왔다. 8강에서 만난 네덜란드는 당시 너무나도 강력한 스쿼드를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크루이베르트와 베르캄프에게 골을 내주며 2:1 아쉬운 패배를 당하면서 98년 월드컵도 마감하게 된다.
로마로의 이적, 그리고 눈물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98-99 세리에 A시즌 바티는 역시나 당시 최고의 골잡이로써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반기 17경기에 출장 17득점을 기록하는 등 초반에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도중 부상만 아니었어도 득점왕을 할 수 있는 페이스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27경기 21득점을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한다. 이 후 바티를 앞세운 피오렌티나는 서서히 세리에 강호로 자리매김을 하게된다. 피오렌티나에 몸 담아온 그에게 도중에 많은 이적제의가 들어왔지만
클럽을 사랑하는 바티스투타는 모든 제의를 거절한다. 이러한 바티를 싫어할 팬이 있겠는가. 피렌체팬들은 바티스투타에게 더욱 환호했고 바티는 그의 보답을 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피오렌티나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피오렌티나에게 아주 달콤한 제의가 들어오게된다. 같은 리그소속 AS로마에서 바티스투타에게 당시 세리에A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이적금액 약 400억을 제안한다.
재정난에 빠져있던 피오렌티나. 그 피오렌티나에서 오랫동안 몸 담아온 바티스투타도 우승에 대한 욕망이 약간이라도 있었던 시기..
결국 피오렌티나는 2000년 5월 이적의 동의하며 바티스투타는 그렇게 로마로 떠난다.
로마로 이적한 바티스투타는 우승청부서 카펠로감독 아래 로마의 왕자 토티와 더불어 꾸준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그 시즌 28경기 출전 20득점을 올리며 마침내 00-01시즌 우승이라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시즌에서 바티는 로맨티스트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데 바로 로마 홈에서 치뤄진 로마 vs 피오렌티나전이다.
이 경기에서 로마가 1:0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애석하게도 그 골의 주인공은 가브리엘 바티였다.
당시 바티는 골을 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체 눈물을 훔쳤다.
이러한 바티스투타에게 원정까지 온 피오렌티나 팬들은 바티에게 열광을 했다.
바티스투타가 피오렌티나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유명한 대목이다.
"나는 승리를 원했지만 피오렌티나가 패하는 걸 원치 않았다. 승리 할 수 밖에 없었던 골이 나에게서 나왔다는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바티의 마지막 월드컵.. 그리고 실수
사실상 바티스투타의 마지막이 될 한일월드컵에서 바티는 전의를 불태웠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해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티스투타는 자비를 들여가며 월드컵에 참가한다. 당시 죽음의 조라 일컬어졌던 F조에는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나이지리아 그리고 스웨덴이 예선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1차전인 나이지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바티스투타를 앞세워 아르헨티나의 출발은 괜찮았다. 하지만 2차전
잉글랜드전에서 1:0으로 패배하게 되는데 아쉽게도 빌미를 제공한 선수는 바티였다. 이후 스웨덴에게 1:1로 비기게 되면서 1승 1무 1패를 기록
조예선 3위에 그치며 아르헨티나는 충격에 예선탈락을 하게된다. 바티스투타는 스웨덴전이 끝난 직후 그라운드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당시 IMF구제금융을 받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바티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탈락후 눈물을 흘리는 바티스투타.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 우승트로피를 끝으로 바티스투타는 사실상 더이상의 트로피는 없었다. 무릎부상에 시달린 그는 더이상 전성기 시절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후 로마,인테르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했지만 그의 하락세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바티는 2003년 중동으로 가서 알 아라비에서 2년을 뛴 후
그의 축구인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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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다른 유명한 선수들과 비교했을때 그의 우승이력은 초라하기 짝이없다. 발롱도르수상도 없을 뿐더러 올해의선수상도 받은적이 없다.
그런 그가 이토록 사랑을 받는건 그가 피오렌티나에게 보여준 눈물과 열정 그리고 애정때문이 아닐까?
돈과 명예를 쫓는 다른 많은 선수들과는 달리 바티는 한 클럽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들도 많지만
어려웠던 시기 부득이하게 이적을하고 이적을 하고 나서도 그 클럽을 잊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팀을 위해 헌신하는 바티스투타. 바티는 그를 좋아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그를 축구블로그의 첫 글로 장식하기에는 더없이 영광이라 생각하며 부족한 블로그를 마친다.
ex) 바티골 : 바티골이라는 별명은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그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골을 넣은다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바티스투타 하이라이트 동영상
그는 은퇴했지만 그의 로망스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