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천주교당에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오다가 우연히 곽원양(郭元良)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르각(Le Ga)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몇년 동안 한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안중근과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다. 그는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곽 신부를 만난 안중근은 그동안 일어났던 국내사정을 말하고, 외국에 있는 동포들과 힘을 모아 의거를 시도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곽 신부는 안중근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소상히 일러주었다.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 네가지를 확실히 이루기만 한다면 2천만 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튼튼해져 비록 수천 수만 문의 대포를 가진 적일지라도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사나이 한 사람의 마음도 빼앗기 어렵거늘 어떻게 2천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되면 강토를 빼앗겼다는 것도 형식적인 것이 될 것이요,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것도 종이 위에 쓴 헛된 글일 뿐이므로 그들의 일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사업을 이룰 수 있고 목적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한 방법은 세계 만국에서 모두 통하는 원칙이니 너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그 말을 다 들은 후에 나는 대답했다.
"신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안중근에게 있어서 천주교는 ‘운명적’이었다. 천주교를 통해 신앙심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양에 대해 그리고 민권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부친과 숙부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천주교의 힘을 빌려 벗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상해에서 동포들에게 크게 절망하고 있던 순간에 우연히 국내에서 가까이 지내던 프랑스 신부를 만나 고국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안중근은 1905년 12월, 행장을 꾸려 기선을 타고 진남포로 돌아왔다. 돌아와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니 가족은 이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를 와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은 안태훈의 영구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통곡을 하며 몇번이나 까무러쳤다.
안태훈은 진남포로 이사를 오는 도중인 1905년 12월, 처가인 재령의 김능권(金能權)의 집에서 44세의 한창 나이로 사망하였다. 1905년 12월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이다. 안태훈은 군량미 관계로 여러차례 관가에 불려가 고초를 겪고, 쇄약해진 몸에 을사늑약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어느 자식에게 어버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마는 안중근에게 안태훈은 ‘정의’의 가치를 일깨운 스승이고 천주교 입교를 선도한 선지자였다. 정신적 지주였고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안태훈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안악읍에서 청나라 의사의 치료를 받은 뒤 무슨 이유인지 그 청나라 의사가 안태훈에게 행패를 부렸다. 가슴과 배를 발로 차서 크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하인들이 의사를 붙들고 때리려 하자 안태훈은 말리면서 이유가 무엇이든 의사를 때리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면서 그들을 제지했다.
친구에게서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안중근은 “아버님께서는 대인으로서 행동을 지켜 그렇게 하셨겠지만, 나는 자식된 도리로 그냥 참고 지나칠 수가 없다. 마땅히 그곳으로 가서 잘잘못을 알아본 다음에 법에 호소하여 그같이 행패하는 버릇을 고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안중근은 그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청국 의사의 사과를 받아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정의감의 발로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다음날 청계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상청을 차리고 재계를 지켜 며칠 뒤 상주로서 상례를 마치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 안중근은 이때 아버지의 상청 앞에서 평소 즐기던 술을 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대한이 독립하는 날까지 민족해방운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이때의 금주 약속을 한번도 어기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지켰다.
⑼ 돈의학교(敦義學校)와 삼흥학교(三興學校) 세워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죽음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안중근은 나날이 기울어가는 민족의 현실을 바라볼 때 청계동 산골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1906년이 되자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진남포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산소를 남겨두고 청계동을 떠나는 안중근과 가족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청계동은 안중근 가족에게 영예와 시련이 겹치는 제2의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안씨 가문은 당당한 세가(勢家)로서 활동하고 동학농민혁명군과 대결하였으며 군량미 사건으로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를 받아들여 이를 통해 가문이 근대적 서구문명에 접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당시 진남포는 상해로 가는 주요 거점이자 중국 상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번창한 항구도시였다. 안태훈과 안중근이 처음에 상해 이주 계획을 세우면서 진남포를 택한 것은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큰 버팀목이었던 안태훈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안중근이 가족을 책임지게 되었다. 안중근은 진남포에 망명의 거점을 마련하고, 교육사업(敎育事業)과 배일계몽운동(排日啓蒙運動)을 펴나갔다.
안중근 가족은 진남포 용정동 36통 5호에 양옥 한 채를 마련하고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사업이었다. 안중근은 진남포 천주교 복당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학생수는 50명 정도)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교육하던 돈의학교의 교과과정에 교련을 배정해 집총훈련을 시키는 등 구국영재 교육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또 6월에는 누대에 이어받은 가산을 정리해 영어를 가르치는 중등수준의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해(학생수 40명 정도) 청년들의 민족교육기관으로 육성했다. 삼흥학교는 얼마 뒤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안중근은 돈의학교의 제2대 교장을 맡아 학생을 증모하고 교사를 증축하고 교사(敎師)를 증원하는 등 학교운영에 열의를 보였다. 이때 그의 처남 김능권이 엽전 1만 5천냥을 기부하여 삼흥학교의 교사(校舍) 마련을 도왔으며 그의 동생 안정근도 형의 뒤를 이어 오성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했음이 주목된다. 나아가 안중근은 1907년 4월경 교육구국운동을 목표로 뮈텔 주교에게 대학교 설립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뮈텔 주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이 교육사업을 벌인 기간은 1906년 봄부터 이듬해 6월 망명하기 전까지 1년 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안중근은 누대로 이어진 재산의 대부분을 교육사업에 투자하고, 학생들에게 신식 군사교련과 앞으로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나라들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비록 뮈텔주교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는 했지만 오성학교를 통해 대학설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보면 안중근의 교육사업의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
1914년 6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권업신문(勸業新聞)》에「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安重根傳)」을 쓴 역사학자 계봉우(桂奉瑀)는 안중근의 생애를 다섯가지로 나누어 평하였다. 그것은 첫째 큰 상무가(尙武家), 둘째 대종교가, 셋째 대교육가, 넷째 대시가(大詩家), 다섯째 대여행가였다.
⑽ 서북학회,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안중근에 대한 관심이 민족해방운동에만 맞추어지다보니 그가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이나 서우학회(西友學會) 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회사운영 등에 참여해 활동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은 망명하기 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북지역 인사들의 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는 1906년 정운복(鄭雲復)·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노백린(盧伯麟)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다. 안중근은 1907년 봄 제8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서우학회는 “생존경쟁과 우승열패의 진화론을 적극 수용하여 '자보자전지책(自保自全之策)'을 강구하려던 동포와 청년의 교육을 계도면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중지(衆智)를 계발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시킬 수 있다”는 취지를 내걸고 동포들의 계몽과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서우학회의 등장으로 기호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국민교육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병탄에 반대투쟁을 벌였다. 서우학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서북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적 명사들이었다. 안중근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당대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봄에는 아버지의 친구 김 진사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가 몇 개월동안 지내면서 안창호·이동휘·김종한 등과 사귀기도 했다.
‘그는 1907년 5월에 안창호·이갑·유동열·노백린·이동휘·이종호 등과 함께 서울 동문밖 삼선평(三仙坪)에서 열린 서우학회 친목회에 참석했고, 진남포에서 안창호의 구국연설을 듣고 그에게 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러시아 망명 전에는 그와 함께 수차 '배일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앙에서 활약중인 계몽주의 계열의 민족운동가들과 단기간의 교유를 통하여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동아정세와 세계대세를 파악하는 동시에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급진적 의열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음을 물론, 이전에《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나《황성신문(皇城新聞)》을 통하여 막연하게 구상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에 대한 논리를 체계화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안중근이 교육사업과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해 활동할 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1904년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한 이래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왔다. 도입된 차관은 침략을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과 일본 거류민 시설 확충에 투입하는 등 통감부에 의해 마음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외채가 엄청나게 불어나서 정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국채를 갚지 않고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에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김광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회를 발기해 국민대회를 여는 등 활동을 시작하였다.《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만세보》등 각종 신문이 여기에 호응해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담배를 끊고 돈을 낸 사람, 금은패물을 모아 바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기생들까지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았다.
안중근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평안도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장을 맡았다. 안중근은 먼저 아내에게 장신구 전부를 헌납케 하고, 일반 민중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평양에서는 선비 1천여 명을 명륜당(明倫堂)에 집합시켜 취지를 설명하고 성금을 모았다. “안중근이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뜻 있는 선비 천여 명을 모으고 의연금을 크게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이니라”는 기록도 전한다.
국채보상운동은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대되었다.《대한매일신보》는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하였다. 안중근은 뒷날《안응칠역사》에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때를 당하여 일반 한국인이 발기한 국채보상회는 앞을 다투어 돈을 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을 본 일본 형사 한 명이 와서 그 형편을 알아보고 묻기를, "회원은 몇이나 되며 재정은 얼마나 모았는가?"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회원은 2천만 명이고 재정은 1천 3백만 원을 모은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하등한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부채라는 것은 갚아야 하는 것이요 급채라는 것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같은 시샘을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그 일본인은 화가 나서 나를 쳤다.
내가 이르기를, "이처럼 까닭없이 욕을 본다면 2천만의 겨레들이 더 많은 압제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마주쳤더니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운데 들어 화해를 시켜 서로 헤어졌다.’
학교를 운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안중근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났다. 그래서 경비를 마련하고자 이 해 7월에 한재호, 송병운 등과 평양에서 미곡상 운영과 삼합의(三合義)라는 무연탄 판매회사를 차렸다. ‘삼합의’란 3인이 설립한 공동체라는 뜻을 담았지만, 서로간의 불화와 일본인들의 방해로 석탄 판매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수천 원의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안중근은《안응칠역사》에서 “그무렵 나는 재정을 마련해 볼 계획으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광을 캐었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좋은 돈 수천 원이나 손해를 보았다”라고 썼다.
안중근의 ‘삼합의 실패’와 관련해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는 간도 망명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자 회사를 처분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안중근은 일제의 간섭으로 이제 국내에서 사업이나 활동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망명을 앞당기기로 했다.
반제국주의투쟁의 선도자 안중근 의사〈13〉
4.구국운동에 나서다.
⑻ 국내 사명 깨닫고 귀국길에
안중근은 천주교당에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오다가 우연히 곽원양(郭元良)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르각(Le Ga)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몇년 동안 한국에서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안중근과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다. 그는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곽 신부를 만난 안중근은 그동안 일어났던 국내사정을 말하고, 외국에 있는 동포들과 힘을 모아 의거를 시도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곽 신부는 안중근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소상히 일러주었다.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 네가지를 확실히 이루기만 한다면 2천만 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튼튼해져 비록 수천 수만 문의 대포를 가진 적일지라도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사나이 한 사람의 마음도 빼앗기 어렵거늘 어떻게 2천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되면 강토를 빼앗겼다는 것도 형식적인 것이 될 것이요,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것도 종이 위에 쓴 헛된 글일 뿐이므로 그들의 일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사업을 이룰 수 있고 목적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한 방법은 세계 만국에서 모두 통하는 원칙이니 너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그 말을 다 들은 후에 나는 대답했다.
"신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안중근에게 있어서 천주교는 ‘운명적’이었다. 천주교를 통해 신앙심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양에 대해 그리고 민권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부친과 숙부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천주교의 힘을 빌려 벗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상해에서 동포들에게 크게 절망하고 있던 순간에 우연히 국내에서 가까이 지내던 프랑스 신부를 만나 고국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안중근은 1905년 12월, 행장을 꾸려 기선을 타고 진남포로 돌아왔다. 돌아와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니 가족은 이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를 와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은 안태훈의 영구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통곡을 하며 몇번이나 까무러쳤다.
안태훈은 진남포로 이사를 오는 도중인 1905년 12월, 처가인 재령의 김능권(金能權)의 집에서 44세의 한창 나이로 사망하였다. 1905년 12월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이다. 안태훈은 군량미 관계로 여러차례 관가에 불려가 고초를 겪고, 쇄약해진 몸에 을사늑약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어느 자식에게 어버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마는 안중근에게 안태훈은 ‘정의’의 가치를 일깨운 스승이고 천주교 입교를 선도한 선지자였다. 정신적 지주였고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안태훈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안악읍에서 청나라 의사의 치료를 받은 뒤 무슨 이유인지 그 청나라 의사가 안태훈에게 행패를 부렸다. 가슴과 배를 발로 차서 크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하인들이 의사를 붙들고 때리려 하자 안태훈은 말리면서 이유가 무엇이든 의사를 때리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면서 그들을 제지했다.
친구에게서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안중근은 “아버님께서는 대인으로서 행동을 지켜 그렇게 하셨겠지만, 나는 자식된 도리로 그냥 참고 지나칠 수가 없다. 마땅히 그곳으로 가서 잘잘못을 알아본 다음에 법에 호소하여 그같이 행패하는 버릇을 고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안중근은 그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청국 의사의 사과를 받아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정의감의 발로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다음날 청계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상청을 차리고 재계를 지켜 며칠 뒤 상주로서 상례를 마치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 안중근은 이때 아버지의 상청 앞에서 평소 즐기던 술을 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대한이 독립하는 날까지 민족해방운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이때의 금주 약속을 한번도 어기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지켰다.
⑼ 돈의학교(敦義學校)와 삼흥학교(三興學校) 세워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죽음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안중근은 나날이 기울어가는 민족의 현실을 바라볼 때 청계동 산골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1906년이 되자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진남포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산소를 남겨두고 청계동을 떠나는 안중근과 가족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청계동은 안중근 가족에게 영예와 시련이 겹치는 제2의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안씨 가문은 당당한 세가(勢家)로서 활동하고 동학농민혁명군과 대결하였으며 군량미 사건으로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를 받아들여 이를 통해 가문이 근대적 서구문명에 접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당시 진남포는 상해로 가는 주요 거점이자 중국 상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번창한 항구도시였다. 안태훈과 안중근이 처음에 상해 이주 계획을 세우면서 진남포를 택한 것은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큰 버팀목이었던 안태훈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안중근이 가족을 책임지게 되었다. 안중근은 진남포에 망명의 거점을 마련하고, 교육사업(敎育事業)과 배일계몽운동(排日啓蒙運動)을 펴나갔다.
안중근 가족은 진남포 용정동 36통 5호에 양옥 한 채를 마련하고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사업이었다. 안중근은 진남포 천주교 복당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학생수는 50명 정도)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교육하던 돈의학교의 교과과정에 교련을 배정해 집총훈련을 시키는 등 구국영재 교육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또 6월에는 누대에 이어받은 가산을 정리해 영어를 가르치는 중등수준의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해(학생수 40명 정도) 청년들의 민족교육기관으로 육성했다. 삼흥학교는 얼마 뒤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안중근은 돈의학교의 제2대 교장을 맡아 학생을 증모하고 교사를 증축하고 교사(敎師)를 증원하는 등 학교운영에 열의를 보였다. 이때 그의 처남 김능권이 엽전 1만 5천냥을 기부하여 삼흥학교의 교사(校舍) 마련을 도왔으며 그의 동생 안정근도 형의 뒤를 이어 오성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했음이 주목된다. 나아가 안중근은 1907년 4월경 교육구국운동을 목표로 뮈텔 주교에게 대학교 설립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뮈텔 주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이 교육사업을 벌인 기간은 1906년 봄부터 이듬해 6월 망명하기 전까지 1년 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안중근은 누대로 이어진 재산의 대부분을 교육사업에 투자하고, 학생들에게 신식 군사교련과 앞으로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나라들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비록 뮈텔주교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는 했지만 오성학교를 통해 대학설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보면 안중근의 교육사업의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
1914년 6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권업신문(勸業新聞)》에「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安重根傳)」을 쓴 역사학자 계봉우(桂奉瑀)는 안중근의 생애를 다섯가지로 나누어 평하였다. 그것은 첫째 큰 상무가(尙武家), 둘째 대종교가, 셋째 대교육가, 넷째 대시가(大詩家), 다섯째 대여행가였다.
⑽ 서북학회,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안중근에 대한 관심이 민족해방운동에만 맞추어지다보니 그가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이나 서우학회(西友學會) 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회사운영 등에 참여해 활동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은 망명하기 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북지역 인사들의 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는 1906년 정운복(鄭雲復)·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노백린(盧伯麟)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다. 안중근은 1907년 봄 제8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서우학회는 “생존경쟁과 우승열패의 진화론을 적극 수용하여 '자보자전지책(自保自全之策)'을 강구하려던 동포와 청년의 교육을 계도면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중지(衆智)를 계발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시킬 수 있다”는 취지를 내걸고 동포들의 계몽과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서우학회의 등장으로 기호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국민교육회 등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병탄에 반대투쟁을 벌였다. 서우학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서북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적 명사들이었다. 안중근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당대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봄에는 아버지의 친구 김 진사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가 몇 개월동안 지내면서 안창호·이동휘·김종한 등과 사귀기도 했다.
‘그는 1907년 5월에 안창호·이갑·유동열·노백린·이동휘·이종호 등과 함께 서울 동문밖 삼선평(三仙坪)에서 열린 서우학회 친목회에 참석했고, 진남포에서 안창호의 구국연설을 듣고 그에게 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러시아 망명 전에는 그와 함께 수차 '배일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앙에서 활약중인 계몽주의 계열의 민족운동가들과 단기간의 교유를 통하여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동아정세와 세계대세를 파악하는 동시에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급진적 의열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음을 물론, 이전에《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나《황성신문(皇城新聞)》을 통하여 막연하게 구상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에 대한 논리를 체계화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안중근이 교육사업과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해 활동할 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1904년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한 이래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왔다. 도입된 차관은 침략을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과 일본 거류민 시설 확충에 투입하는 등 통감부에 의해 마음대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외채가 엄청나게 불어나서 정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국채를 갚지 않고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에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김광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회를 발기해 국민대회를 여는 등 활동을 시작하였다.《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만세보》등 각종 신문이 여기에 호응해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 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담배를 끊고 돈을 낸 사람, 금은패물을 모아 바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기생들까지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의연금을 모았다.
안중근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평안도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장을 맡았다. 안중근은 먼저 아내에게 장신구 전부를 헌납케 하고, 일반 민중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평양에서는 선비 1천여 명을 명륜당(明倫堂)에 집합시켜 취지를 설명하고 성금을 모았다. “안중근이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뜻 있는 선비 천여 명을 모으고 의연금을 크게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이니라”는 기록도 전한다.
국채보상운동은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대되었다.《대한매일신보》는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다고 보도하였다. 안중근은 뒷날《안응칠역사》에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때를 당하여 일반 한국인이 발기한 국채보상회는 앞을 다투어 돈을 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을 본 일본 형사 한 명이 와서 그 형편을 알아보고 묻기를, "회원은 몇이나 되며 재정은 얼마나 모았는가?"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회원은 2천만 명이고 재정은 1천 3백만 원을 모은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하등한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부채라는 것은 갚아야 하는 것이요 급채라는 것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같은 시샘을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그 일본인은 화가 나서 나를 쳤다.
내가 이르기를, "이처럼 까닭없이 욕을 본다면 2천만의 겨레들이 더 많은 압제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마주쳤더니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운데 들어 화해를 시켜 서로 헤어졌다.’
학교를 운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안중근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났다. 그래서 경비를 마련하고자 이 해 7월에 한재호, 송병운 등과 평양에서 미곡상 운영과 삼합의(三合義)라는 무연탄 판매회사를 차렸다. ‘삼합의’란 3인이 설립한 공동체라는 뜻을 담았지만, 서로간의 불화와 일본인들의 방해로 석탄 판매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수천 원의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안중근은《안응칠역사》에서 “그무렵 나는 재정을 마련해 볼 계획으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광을 캐었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좋은 돈 수천 원이나 손해를 보았다”라고 썼다.
안중근의 ‘삼합의 실패’와 관련해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는 간도 망명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자 회사를 처분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안중근은 일제의 간섭으로 이제 국내에서 사업이나 활동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망명을 앞당기기로 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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