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600년 넘게 우리나라의 수도의 역할을 해왔고 조선시대의 고궁들과 각종 문화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보존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하며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 시키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어떤 방법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인지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려 한다.
기본적으로 고궁들의 역사와 연혁, 위치, 규모등이 나와 있는 통계자료와 문헌들을 살펴보고 인터넷 자료를 통해 고궁 주변과의 인접성및 연관성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또한 고궁들이 배치되어 있는 흐름을 도보 및 대중교통로를 확인하였다.
서울에 보존되고 있는 고궁들의 흐름을 살펴보면 위 그림과 같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먼저 복구되었고, 경복궁은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동안 빈 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865년 고종 2년 대대적인 재건 공사가 시작된 후, 경복궁은 다시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명성 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에게 무참히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그 후로 고종은 덕수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때부터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더욱이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후, 경복궁은 일본인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4,000여 칸의 건물이 헐리는 등 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민족 정기 회복의 하나로 경복궁 복원 사업을 벌여 경복궁 옛 모습 되살리기에 애쓰고 있다. 먼저 1996년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헐었으며, 그 자리에 영제교와 흥례문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비록 궁 안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주요 건물들이 남아 있다.
정종 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궁궐을 더 짓게 되었다. 1404년 태종 4년부터 궁궐 조성이 시작되어 이듬해 공사가 마무리되었는데,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하였다. 정궁인 경복궁에 대하여 창덕궁은 이궁으로 불리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불렸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선조 말년에 복구 공사가 시작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앞서 복구가 되었다. 이는 역대 왕들이 창덕궁에 많이 거처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은 오랜 기간 소실과 중건, 개수, 보수 등을 반복하였고, 1917년 다시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919년 일제의 중건사업정책으로 궁궐의 파괴가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하였는데 경복궁의 주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부재를 이용하여 창덕궁을 재건한 것이다.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 건물의 양식을 혼합하는 등의 많은 변모를 겪게 되었다. 광복 후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의 창덕궁의 모습은 현재 동궐도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다.
창경궁은 일제시대 이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창경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일제시대 때, 창덕궁에서 우울하게 기거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과거 시험장이었던 드넓은 춘당대 언덕에 식물원과 박물관을 세우고, 선인문안쪽 넓은 뜰에는 동물원을 지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궁내의 많은 행각과 궁문, 궁장이 훼손되었고, 심지어 궁전)의 초석까지도 파내어 궁궐 전체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지난 1983년부터 정부는 일제가 파괴, 변형시킨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하는 중창 공사에 들어갔으며,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회복시켰다. 궁내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터 시설도 철거했으며,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 등을 중창하면서 남아 있던 궁전 등을 보수하여 조선 왕궁의 옛 모습을 되살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 많던 전각과 누정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또한 창경궁은 그러한 오욕의 역사뿐 아니라, 여러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소실되어,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이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왕실의 행궁으로 처음 이용하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1611년 광해군 3년에 경운궁이라 고쳐 불렀다. 그 후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길 때까지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인조가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바로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곳이 정식 궁궐이 된 것은, 1897년에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한 이후부터였다.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곳에는 장려한 건물들이 새로 건립되었다. 이 때 궁 안에는 왕의 영정을 모신 진전과 정전인 중화전 등 전통적인 건물이 세워지는 한편, 정관헌과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서양식 건물도 세워졌다.
운현궁은 크게 2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수직사가 있고, 수직사 앞쪽으로는 노안당등의 건물이 있다. 수직사를 등지고 보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이곳에서는 공연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편의 시설이 있다. 운현궁의 핵심 공간은 노안당을 비롯한 노락당, 이로당이 있는 구역으로 대원군 시절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종묘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한 조선 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했던 곳이다. 태조는 한양에 천도하던 해인 1394년에 궁궐의 위치를 결정한 다음, '도성의 좌측인 동쪽에 종묘, 우측인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 터를 정하였다. 1394년 12월에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그 후 모실 신위가 늘어나자 1421년 세종 3년에 종묘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인 영녕전을 지어 그곳에도 신위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통칭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정전을 종묘라 하고 별묘를 영녕전이라 하여 구분하였다. 정전 내부에는 서측 제1실에 모신 태조의 신위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19실에 모시고 있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 정전에서 이안된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 34위를 16실에 모시고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대에 창건된 뒤 290여 년 간 존속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창건될 당시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1760년 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렸다. 일제시대인 1908년에 궁궐의 서쪽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웠고 1925년에는 전매국관사로서 궁의 동쪽이 분할되었으며, 1926년부터 이루어진 중요 건물의 이전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해방 후에는 그 터에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 섰다가 그 후 민간인 기업에 매각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서울시에서 공원 조성을 위하여 다시 매입하였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서울시에서는 내전과 동궁, 생활 기거 공간, 내원등 대부분 구역에 서울 시립 박물관을 신축하고 있다. 이러한 우여 곡절 끝에 궁궐 경희궁은 서서히 그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위의 설명에서 나와있는 고궁들이 도시관광 요소로써 잘 활용되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끌어들일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진 요소들이 부족함과 두 번째로 기존에 사람이 몰리는 고궁 주변의 특정 지역들과의 연계성이 부족함에 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장소와 같이 평소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과의 연계성을 가지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또 각자의 고궁마다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벤트적인 요소들을 함양한다면 오래전부터 고요하던 그 장소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고궁이란 장소, 나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고 고리타분한 글이나 그림보다 좀 더 익숙하게 공간이란 개념으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스스로 교육할 수 있는 그러한 장소가 좀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하였다. 자체적인 노력과 주변과의 연계와 같은 안팎의 소통으로 인하여 체계적인 계획과 짜임새있는 구성이 있다면 소외되었던 현재의 고궁은 그 어떤 장소보다 더 매력적인 장소로 전환되어 질수 있을것이다.
역사는 사회의 밑바탕이 되며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장치이고 자랑거리이다. 그러한 역사를 켜를 보여줄 수 있는 장치로써 활성화 시킬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문화재의 존재이지 않을까?
서울시 고전건축 문화유산의 개발 방향에 대한 고찰
서울은 600년 넘게 우리나라의 수도의 역할을 해왔고 조선시대의 고궁들과 각종 문화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보존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하며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 시키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어떤 방법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인지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려 한다.
기본적으로 고궁들의 역사와 연혁, 위치, 규모등이 나와 있는 통계자료와 문헌들을 살펴보고 인터넷 자료를 통해 고궁 주변과의 인접성및 연관성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또한 고궁들이 배치되어 있는 흐름을 도보 및 대중교통로를 확인하였다.
서울에 보존되고 있는 고궁들의 흐름을 살펴보면 위 그림과 같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먼저 복구되었고, 경복궁은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동안 빈 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865년 고종 2년 대대적인 재건 공사가 시작된 후, 경복궁은 다시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명성 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에게 무참히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그 후로 고종은 덕수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때부터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더욱이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후, 경복궁은 일본인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4,000여 칸의 건물이 헐리는 등 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민족 정기 회복의 하나로 경복궁 복원 사업을 벌여 경복궁 옛 모습 되살리기에 애쓰고 있다. 먼저 1996년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헐었으며, 그 자리에 영제교와 흥례문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비록 궁 안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주요 건물들이 남아 있다.
정종 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궁궐을 더 짓게 되었다. 1404년 태종 4년부터 궁궐 조성이 시작되어 이듬해 공사가 마무리되었는데,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하였다. 정궁인 경복궁에 대하여 창덕궁은 이궁으로 불리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불렸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선조 말년에 복구 공사가 시작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앞서 복구가 되었다. 이는 역대 왕들이 창덕궁에 많이 거처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은 오랜 기간 소실과 중건, 개수, 보수 등을 반복하였고, 1917년 다시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919년 일제의 중건사업정책으로 궁궐의 파괴가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하였는데 경복궁의 주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부재를 이용하여 창덕궁을 재건한 것이다.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 건물의 양식을 혼합하는 등의 많은 변모를 겪게 되었다. 광복 후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전의 창덕궁의 모습은 현재 동궐도를 통해서 알아 볼 수 있다.
창경궁은 일제시대 이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창경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일제시대 때, 창덕궁에서 우울하게 기거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과거 시험장이었던 드넓은 춘당대 언덕에 식물원과 박물관을 세우고, 선인문안쪽 넓은 뜰에는 동물원을 지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궁내의 많은 행각과 궁문, 궁장이 훼손되었고, 심지어 궁전)의 초석까지도 파내어 궁궐 전체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지난 1983년부터 정부는 일제가 파괴, 변형시킨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하는 중창 공사에 들어갔으며,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회복시켰다. 궁내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터 시설도 철거했으며,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 등을 중창하면서 남아 있던 궁전 등을 보수하여 조선 왕궁의 옛 모습을 되살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 많던 전각과 누정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또한 창경궁은 그러한 오욕의 역사뿐 아니라, 여러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소실되어,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이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왕실의 행궁으로 처음 이용하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1611년 광해군 3년에 경운궁이라 고쳐 불렀다. 그 후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길 때까지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인조가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바로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곳이 정식 궁궐이 된 것은, 1897년에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한 이후부터였다.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곳에는 장려한 건물들이 새로 건립되었다. 이 때 궁 안에는 왕의 영정을 모신 진전과 정전인 중화전 등 전통적인 건물이 세워지는 한편, 정관헌과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서양식 건물도 세워졌다.
운현궁은 크게 2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수직사가 있고, 수직사 앞쪽으로는 노안당등의 건물이 있다. 수직사를 등지고 보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이곳에서는 공연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편의 시설이 있다. 운현궁의 핵심 공간은 노안당을 비롯한 노락당, 이로당이 있는 구역으로 대원군 시절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종묘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한 조선 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했던 곳이다. 태조는 한양에 천도하던 해인 1394년에 궁궐의 위치를 결정한 다음, '도성의 좌측인 동쪽에 종묘, 우측인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 터를 정하였다. 1394년 12월에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그 후 모실 신위가 늘어나자 1421년 세종 3년에 종묘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인 영녕전을 지어 그곳에도 신위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통칭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정전을 종묘라 하고 별묘를 영녕전이라 하여 구분하였다. 정전 내부에는 서측 제1실에 모신 태조의 신위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19실에 모시고 있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 정전에서 이안된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 34위를 16실에 모시고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대에 창건된 뒤 290여 년 간 존속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창건될 당시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1760년 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렸다. 일제시대인 1908년에 궁궐의 서쪽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웠고 1925년에는 전매국관사로서 궁의 동쪽이 분할되었으며, 1926년부터 이루어진 중요 건물의 이전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해방 후에는 그 터에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 섰다가 그 후 민간인 기업에 매각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서울시에서 공원 조성을 위하여 다시 매입하였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서울시에서는 내전과 동궁, 생활 기거 공간, 내원등 대부분 구역에 서울 시립 박물관을 신축하고 있다. 이러한 우여 곡절 끝에 궁궐 경희궁은 서서히 그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위의 설명에서 나와있는 고궁들이 도시관광 요소로써 잘 활용되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끌어들일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진 요소들이 부족함과 두 번째로 기존에 사람이 몰리는 고궁 주변의 특정 지역들과의 연계성이 부족함에 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장소와 같이 평소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과의 연계성을 가지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또 각자의 고궁마다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벤트적인 요소들을 함양한다면 오래전부터 고요하던 그 장소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고궁이란 장소, 나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고 고리타분한 글이나 그림보다 좀 더 익숙하게 공간이란 개념으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스스로 교육할 수 있는 그러한 장소가 좀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시작하였다. 자체적인 노력과 주변과의 연계와 같은 안팎의 소통으로 인하여 체계적인 계획과 짜임새있는 구성이 있다면 소외되었던 현재의 고궁은 그 어떤 장소보다 더 매력적인 장소로 전환되어 질수 있을것이다.
역사는 사회의 밑바탕이 되며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장치이고 자랑거리이다. 그러한 역사를 켜를 보여줄 수 있는 장치로써 활성화 시킬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문화재의 존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