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인간의 추악하고 나약한 본성을 신랄하게 묘사하는 아주 강렬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묘미는 인간의 이기심과 거짓됨을 들어내어 어느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인간에게 혼돈을 가져오는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일본 특유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 영화였다.
이 영화의 배경은 전란으로 파괴된 라쇼몽으로 일본 교토의 4대문 중 하나다. 그 파괴된 문에서 스님 한 사람과 나무꾼 한 사람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 행인이 찾아와 이들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무서운 일을 겪었다고 이야기했다. 나뭇꾼과 스님은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얘기했다. 그것은 나뭇꾼과 스님이 사무라이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 관아에서 증언하면서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이제 라쇼몽의 외부이야기에서 관아의 내부 이야기로 들어간다. 여기서 나는 이 영화가 액자식 구성의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뭇꾼은 관아에서 사무라이의 시체와 물건들을 발견한 것에 대해 증언했고, 칼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스님은 무사와 그의 부인이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던 중, 도적인 타조마루가 강가에서 체포되었다. 여기서 등장한 도적 타조마루와 이후 등장한 무사 부부의 증언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타조마루를 잡은 남자는 타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조마루는 복통 때문에 말에서 내린 것이지, 결코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서, 증언을 시작했다. 타조마루는 무사의 부인을 차지하기 위해 무사를 속여 포박한 뒤, 단도를 들고 격렬히 저항하는 무사의 부인을 굴복시켜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사의 부인이 두 남자에게 욕을 봤으니, 무사와 타조마루,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된다고 하여, 대결을 통해 무사를 죽였는데, 그 사이 무사의 부인이 도망을 쳐버렸다고 하였다. 도적의 증언에서 도적으로서의 풍도와 용맹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증언한 사람은, 근방의 절에서 발견된 무사의 아내였다. 무사의 아내는 자신이 도적인 타조마루에게 겁탈을 당했고, 도적은 곧바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뒤, 남편이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며 칼을 건네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자신이 단도로 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증언을 통해 자신을 불쌍하고 연약한 여자로 묘사하고 동정심을 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당을 통해 불러낸 무사의 영혼이 증언했다. 무사의 말에 따르면, 도적이 아내를 범한 뒤, 아내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인 무사를 버렸고, 도적인 타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여버리라는 냉혹한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 냉혹함에 놀란 도적은 아내를 죽이려고 했고, 자신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치욕을 이기지 못한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결했고, 암흑 속의 적막감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칼을 빼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증언 속에는 무사로써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비록 그들의 증언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뭇꾼과 스님이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고 할 때부터 짐작했었다. 그것은 극중 나뭇꾼이 말한대로 그들의 증언이주관이 개입되어 변질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고, 심지어 무사는 죽어서까지 거짓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돌려서 생각해보니 이들이 한 말이 그들 자신에게는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이기심에 휘둘려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거짓은 단순한 거짓이 아닌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진실과 닮은 거짓이다. 어쩌면 우리가 객관적인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도 대다수의 편견일 뿐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는 라쇼몽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진실에 대해 알 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의 거짓은 라쇼몽에서의 나뭇꾼의 진술을 통해 더욱 명백히 들어났다. 나뭇꾼의 증언에 따르면, 무사의 아내를 겁탈한 도적은 그가 진술했던 것과 달리, 아내에게 결혼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울고 있던 무사의 아내는 순간 눈물을 그치고, 남자들이 결정해야 될 문제라고 말하며, 결투를 시킨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말로 소름끼치고 오금이 저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이에 남편은 무사답지 않게 싸움을 거부하고, 겁탈을 당한 더러운 여자는 말 한 필보다도 가치가 없으니 데려가라고 한다. 도적 또한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건지, 그 또한 여자를 버리려 하였다. 무사의 아내가 흐느끼는 것을 본 도적이 여자는 나약한 존재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의 기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나약한 건 너희들이다.’ , ‘사랑은 칼로써 쟁취하는 거다.’ 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두 남자를 자극하였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싸웠다. 이들은 그들의 말과 달리 전혀 남자답지 못했다. 결국 도적이 무사를 죽인 뒤 다가오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쳤다. 짐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두 남자를 농락하여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뒤, 그대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무사의 아내를 보면서,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여자는 이중적인 존재다. 겉으로는 나약하고 진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자보다 훨씬 강하며 진실에 대해 더 잘 아는 존재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것만이 아닌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것도 포함한다. 여자는 특히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에서 매우 탁월하다. 무사의 아내가 보여준 감정 표현의 조절과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뤄내는, 즉, 남성에 의존적인 여성 특유의 나약한 모습을 역으로 이용하여 남성의 심리를 지배하는 처세술, 그리고 자신을 그럴 듯 하게 미화하고, 미화된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나뭇꾼의 증언을 들은 행인은 나뭇꾼 또한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행인은 그 아이의 요람에 있는 물건만 챙겨 아이를 버려두고 가려 한다. 증언을 하면서, 인간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며 혼란스러워 하던 나뭇꾼은 그의 냉혹한 모습을 보고,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확신하며, 지금 그의 행동 또한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행인은 나뭇꾼 또한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관아에서 증인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무사의 몸에서 단도를 챙긴 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냐고, 사건의 당사자들보다 더 이기적이지 않냐고 되묻는다. 나뭇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뭇꾼의 증언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행인이 말한 것처럼 나뭇꾼의 주관적인 이기심 때문에 변질된 또 하나의 거짓일 뿐이었을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한 본질을 보았으면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선하다는 믿음에 미련을 두고 있었던 스님은, 나뭇꾼마저도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충격에 그러한 믿음이 깨져 버렸다. 그래서 나뭇꾼이 아이를 달라 하자, 인간의 추악함에 몸서리치며, 거부했다.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라고 말하면서.......하지만, 나뭇꾼이 슬픈 눈빛으로 호소하자,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되찾았고, 아이를 건네준다. 아이를 받은 나뭇꾼이 라쇼몽을 떠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스님은 무사가 살해당한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도,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믿음이 깨졌다가도, 다시 그 믿음을 찾은 선량한 사람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그러한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여러 이기적이고 사악한 모습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아 버리는 그러한 모습에서 증오와 분노를 품었다. 그로 인해,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겼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져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나뭇꾼이 행인의 말을 통해 깨달은 것처럼,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최대로 키웠던 원인이자, 그러한 악감정을 가라앉히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구역질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 재평가를 하기 시작했고, 세상에 대해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과 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까, 단지 추악한 세상사를 외면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의 부정적인 인식이 내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구우일모의 오류를 세상의 본질인 양 생각하는 것일 뿐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러한 의문들이 머리 속에 꽉 채워져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내 꿈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립되지 않은, 불안정한 사고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가끔씩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고 얘기하던 불량한 행인처럼, 암흑같은 현실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모름지기 스승이 되려면 세상에 대한 건전하고 확고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다면, 결코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뭇꾼에게 아이를 맡기면서 믿음을 되찾는 스님과 결연한 얼굴로 걸어가는 나뭇꾼의 모습에서, 진실된 삶을 살겠다는 희망과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들이 끝내 맞이하게 될 비극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뭇꾼, 스님처럼 인간의 순선함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거대한 벽, 즉, 자신의 이기심과 나약함, 어리석음, 그리고 세상의 비정함에 부딪쳐 절망하게 될 것이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패배의 운명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시몬 볼리바르의 유언이 더욱 뼈저리게 와닿았다.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 볼리바르입니다.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입니다.”
위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난 결국 마음의 거대한 바다를 해메다가, 결국에는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허황된 사색 속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사라질 거라면, 한 순간이라면, 헤매지 말고, 즐겁게 여행하자’ 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고, 결국 현실의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라쇼몽, 진실에 대해 고뇌하게 하는 영화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인간의 추악하고 나약한 본성을 신랄하게 묘사하는 아주 강렬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묘미는 인간의 이기심과 거짓됨을 들어내어 어느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인간에게 혼돈을 가져오는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일본 특유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 영화였다.
이 영화의 배경은 전란으로 파괴된 라쇼몽으로 일본 교토의 4대문 중 하나다. 그 파괴된 문에서 스님 한 사람과 나무꾼 한 사람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 행인이 찾아와 이들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무서운 일을 겪었다고 이야기했다. 나뭇꾼과 스님은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얘기했다. 그것은 나뭇꾼과 스님이 사무라이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 관아에서 증언하면서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이제 라쇼몽의 외부이야기에서 관아의 내부 이야기로 들어간다. 여기서 나는 이 영화가 액자식 구성의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뭇꾼은 관아에서 사무라이의 시체와 물건들을 발견한 것에 대해 증언했고, 칼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스님은 무사와 그의 부인이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던 중, 도적인 타조마루가 강가에서 체포되었다. 여기서 등장한 도적 타조마루와 이후 등장한 무사 부부의 증언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타조마루를 잡은 남자는 타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조마루는 복통 때문에 말에서 내린 것이지, 결코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서, 증언을 시작했다. 타조마루는 무사의 부인을 차지하기 위해 무사를 속여 포박한 뒤, 단도를 들고 격렬히 저항하는 무사의 부인을 굴복시켜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사의 부인이 두 남자에게 욕을 봤으니, 무사와 타조마루,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된다고 하여, 대결을 통해 무사를 죽였는데, 그 사이 무사의 부인이 도망을 쳐버렸다고 하였다. 도적의 증언에서 도적으로서의 풍도와 용맹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증언한 사람은, 근방의 절에서 발견된 무사의 아내였다. 무사의 아내는 자신이 도적인 타조마루에게 겁탈을 당했고, 도적은 곧바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뒤, 남편이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며 칼을 건네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자신이 단도로 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증언을 통해 자신을 불쌍하고 연약한 여자로 묘사하고 동정심을 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당을 통해 불러낸 무사의 영혼이 증언했다. 무사의 말에 따르면, 도적이 아내를 범한 뒤, 아내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인 무사를 버렸고, 도적인 타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여버리라는 냉혹한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 냉혹함에 놀란 도적은 아내를 죽이려고 했고, 자신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치욕을 이기지 못한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결했고, 암흑 속의 적막감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칼을 빼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증언 속에는 무사로써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비록 그들의 증언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뭇꾼과 스님이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고 할 때부터 짐작했었다. 그것은 극중 나뭇꾼이 말한대로 그들의 증언이주관이 개입되어 변질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고, 심지어 무사는 죽어서까지 거짓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돌려서 생각해보니 이들이 한 말이 그들 자신에게는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이기심에 휘둘려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거짓은 단순한 거짓이 아닌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진실과 닮은 거짓이다. 어쩌면 우리가 객관적인 진실이라 믿고 있는 것도 대다수의 편견일 뿐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는 라쇼몽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진실에 대해 알 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의 거짓은 라쇼몽에서의 나뭇꾼의 진술을 통해 더욱 명백히 들어났다. 나뭇꾼의 증언에 따르면, 무사의 아내를 겁탈한 도적은 그가 진술했던 것과 달리, 아내에게 결혼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울고 있던 무사의 아내는 순간 눈물을 그치고, 남자들이 결정해야 될 문제라고 말하며, 결투를 시킨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말로 소름끼치고 오금이 저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이에 남편은 무사답지 않게 싸움을 거부하고, 겁탈을 당한 더러운 여자는 말 한 필보다도 가치가 없으니 데려가라고 한다. 도적 또한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건지, 그 또한 여자를 버리려 하였다. 무사의 아내가 흐느끼는 것을 본 도적이 여자는 나약한 존재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의 기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나약한 건 너희들이다.’ , ‘사랑은 칼로써 쟁취하는 거다.’ 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두 남자를 자극하였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싸웠다. 이들은 그들의 말과 달리 전혀 남자답지 못했다. 결국 도적이 무사를 죽인 뒤 다가오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쳤다. 짐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두 남자를 농락하여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뒤, 그대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무사의 아내를 보면서,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여자는 이중적인 존재다. 겉으로는 나약하고 진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자보다 훨씬 강하며 진실에 대해 더 잘 아는 존재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것만이 아닌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것도 포함한다. 여자는 특히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에서 매우 탁월하다. 무사의 아내가 보여준 감정 표현의 조절과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뤄내는, 즉, 남성에 의존적인 여성 특유의 나약한 모습을 역으로 이용하여 남성의 심리를 지배하는 처세술, 그리고 자신을 그럴 듯 하게 미화하고, 미화된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나뭇꾼의 증언을 들은 행인은 나뭇꾼 또한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행인은 그 아이의 요람에 있는 물건만 챙겨 아이를 버려두고 가려 한다. 증언을 하면서, 인간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며 혼란스러워 하던 나뭇꾼은 그의 냉혹한 모습을 보고,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확신하며, 지금 그의 행동 또한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행인은 나뭇꾼 또한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관아에서 증인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무사의 몸에서 단도를 챙긴 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냐고, 사건의 당사자들보다 더 이기적이지 않냐고 되묻는다. 나뭇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뭇꾼의 증언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행인이 말한 것처럼 나뭇꾼의 주관적인 이기심 때문에 변질된 또 하나의 거짓일 뿐이었을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한 본질을 보았으면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선하다는 믿음에 미련을 두고 있었던 스님은, 나뭇꾼마저도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충격에 그러한 믿음이 깨져 버렸다. 그래서 나뭇꾼이 아이를 달라 하자, 인간의 추악함에 몸서리치며, 거부했다.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라고 말하면서.......하지만, 나뭇꾼이 슬픈 눈빛으로 호소하자,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되찾았고, 아이를 건네준다. 아이를 받은 나뭇꾼이 라쇼몽을 떠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스님은 무사가 살해당한 사건의 전말을 알고서도,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믿음이 깨졌다가도, 다시 그 믿음을 찾은 선량한 사람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그러한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여러 이기적이고 사악한 모습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아 버리는 그러한 모습에서 증오와 분노를 품었다. 그로 인해,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겼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져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나뭇꾼이 행인의 말을 통해 깨달은 것처럼,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최대로 키웠던 원인이자, 그러한 악감정을 가라앉히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구역질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 재평가를 하기 시작했고, 세상에 대해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과 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까, 단지 추악한 세상사를 외면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의 부정적인 인식이 내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구우일모의 오류를 세상의 본질인 양 생각하는 것일 뿐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러한 의문들이 머리 속에 꽉 채워져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내 꿈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립되지 않은, 불안정한 사고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가끔씩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고 얘기하던 불량한 행인처럼, 암흑같은 현실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모름지기 스승이 되려면 세상에 대한 건전하고 확고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다면, 결코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뭇꾼에게 아이를 맡기면서 믿음을 되찾는 스님과 결연한 얼굴로 걸어가는 나뭇꾼의 모습에서, 진실된 삶을 살겠다는 희망과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들이 끝내 맞이하게 될 비극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뭇꾼, 스님처럼 인간의 순선함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거대한 벽, 즉, 자신의 이기심과 나약함, 어리석음, 그리고 세상의 비정함에 부딪쳐 절망하게 될 것이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패배의 운명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시몬 볼리바르의 유언이 더욱 뼈저리게 와닿았다.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 볼리바르입니다.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입니다.”
위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난 결국 마음의 거대한 바다를 해메다가, 결국에는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허황된 사색 속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사라질 거라면, 한 순간이라면, 헤매지 말고, 즐겁게 여행하자’ 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고, 결국 현실의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