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정의론

EAST-TIGER201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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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책 읽는 밤>에서 보내준 책이다.

 

  나는 가끔 주말에 서점에 가곤 한다. 시대가 좋아져서 인터넷 검색으로 책의 정보를 알고 빠르게 구입 할 수 있지만, 보고 싶은 책들을 선택해서 직접 책의 내용을 잠시 읽어봄으로써 여유롭게 구입을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서점이다. 또한 베스트셀러들을 분야별로 한눈에 볼 수 있기에,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과 유행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10년 5월에 출판되어 지금까지 6만부 이상 팔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계층 간의 양극화와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 내 젊은 세대들이 선택한 시대의 베스트셀러이다. 27세에 미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20년간 ‘정의(正義; Justice)’ 에 대해 강의한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기존의 학자들이 제시한 정의론의 특징들을 소개하고 때로는 반박하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가?” 에 대해 논한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33p>

 

  정의에 대한 논의는 인류의 시초부터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인 존재이고, 고등 교육을 받더라도 이성으로 통제 할 수 없는 본능은 사회법의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시대의 특징을 파악하며 나름의 정의론을 세웠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이기심과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샌델은 생각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특징은 원론적인 말이다. 문제는 그의 말처럼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그래서 그가 각 장마다 제시하는 사례들에서 나오는 대립의 근원들은 한쪽 면에서만 볼 수 없고, 그 역시 양자와 제 3자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도덕적 자격에 대한 문제이다. 정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강자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한쪽 입장에 서 있을 수 없고, 양자의 입장을 동등하게 고려하여 공감시켜야 한다. 여기에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담겨져 있다. 발생한 정의의 분배 과정 속에서 정의의 혜택을 받게 될 도덕적 자격은 어떤 방식으로 선정되어야 하고, 그 혜택에 소외된 사람들의 아쉬움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또한 그것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이득이나 피해가 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가 발달할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더욱 해결하기 어렵다.

 

  공정한 헌법이 왜 진짜가 아닌 상상의 계약에서 나올까? 우선 국가가 형성된 이래 사회계약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둘째로, 도덕 원칙은 경험한 사실에서만 나올 수는 없다는 철학적 이유 때문이다. 도덕법이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듯이, 정의의 원칙도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헌법에 동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헌법이 지금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3p>

 

  칸트의 이 말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시대에 맞게 법이 개정되듯이, 정의의 원칙도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책에서 예로 든 정의론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론적 정의론,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정의론, 칸트가 말하는 이성을 신뢰한 개인의 직관과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론, 롤스가 말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동체의 선을 위한 정의론 등은 그 당시 그들이 살았던 사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정의론이다.  

 

  물론 이 정의론들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샌델은 이 책에서 제시한 사례들을 다양한 정의론들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그러나 읽으면서 느낀 것은 어느 정의론 하나 배제할 수 없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일관된 생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수 없다. 직면한 상황을 보고 최선의 선택을 위해 스스로 생각하거나 타인과 의견을 공유한다. 그래서 가치판단을 내린 후 실행에 옮긴다. 실행 이후에는 결과와 다수의 판단만이 선악을 가늠하고, 그에 따라 실행에 옮긴 자나 동조한 자들에게 책임과 보상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여기에 상대성을 적용한다면, 누구의 입장을 지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사회 내에 명확한 선악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은 그것을 판단하는 대상의 몫이 되고, 정의 역시 그 대상에게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회법이나 도덕을 원칙으로 판단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법과 정의는 시대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고 완벽할 수 없다. 더욱이 지금의 시대는 법과 정의, 도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거나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현실에서 자율과 호혜라는 이상은 불완전하게 실현된다. 어떤 약속은 비록 자발적이지만 상호 이익을 실현하지 않는다. 또 어떤 때는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호혜원칙을 근거로 내가 얻은 이익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생길 수 있다. 여기서 합의의 도덕적 한계가 드러난다. 즉 어떤 경우엔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생기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합의가 반드시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203p>

 

  합의 즉 상호계약에 대한 원칙과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은 상호계약은 필요를 근거로 성립되고 원칙은 신뢰이다. 계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기에 상호간 이익이 되어야 하며, 계약의 완성까지 신뢰는 그것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런 계약이 불법적, 임의적으로 파기되거나 상호 피해 또는 한쪽에게만 엄청난 이익내지 피해를 주는 상황이 지금 시대에 많아졌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내에 예를 든다면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을 상대로 하는 노예계약이나 한미 FTA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강자와 약자 간에 공정한 계약이 가능한가?” 이다. 계약은 롤스의 말대로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동등성은 계약이 불이행될시 서로가 비슷한 피해가 생겨야 하고 반대로 이익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강자와 약자 간의 계약은 강자를 위한 거짓놀음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샌델이 말하는 계약에 대한 견해에 공감한다.

 

  ..과학이 목적론적 사고를 거부하자. 정치와 도덕도 그러한 사고를 거부하려 든다. 그러나 사회조직과 정치 행위를 생각할 때 목적론적 추론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오늘날의 과학자 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이나 물리에 관해 쓴 글을 읽거나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윤리와 정치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정치철학을 읽고 고민한다. <267p>

 

  오늘날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점 중 하나가 이런 점이라 생각한다. 즉 과학적·논리적 의식들이 팽배하여 점차 윤리와 종교적 신념이 중립적인 위치에 있거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약 2000년 전의 희랍 철학자들의 과학적 지식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과 윤리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적·논리적 의식들만 추구한다면,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과 사회에 관련된 중요한 지식들을 놓치게 될 것이고, 정의의 힘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289p>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362p>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회 내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선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상대성을 고려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곧 사회 내에서 약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부류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부류도 있으며 둘 다 속하지 않는 부류도 있다. 물론 끔찍하지만 그 반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정의는 사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선악을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혜택은 개인에서 공동체까지 폭넓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정의는 사회 내 선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확립된 후, 혜택에 대한 논란을 최소화 하는 과정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고집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다른 곳에 사는 누구라도 미국독립선언서, 헌법,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알링턴 국립묘지에 잠든 영웅 등을 존경하거나 감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애국적 자부심을 느끼려면 세월을 뛰어넘어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따라온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 도덕적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327~328p>

 

  샌델은 이것에 대한 사례로 과거사 문제와 종군 위안부 문제를 들었다. 조상들의 잘못을 현재의 후손들에게 묻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불합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 내의 연대의식은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 강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속되어 왔다면,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있어서 큰 자부심이다. 그러한 자부심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또한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국가들은 신뢰 관계 속에서 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단 자부심만으로 자신들의 과거의 과오를 묵인할 수 없다. 과오에 대한 책임은 연대의식 속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고립된 자부심과 연대의식이 아닌 공동체의 정의를 원한다면, 피해를 입은 국가와 대상들에 대한 보상은 당연하다.

 

  우리는 리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고민에 드러난 인격에 끌려 리 같은 사람을 동정할 뿐 아니라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다. 나를 특별한 삶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특별함을 인식하게 하고, 다른 여러 요구와 더 넓은 지평에도 눈을 뜨라는 요구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산다는 뜻이다. <330p>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공적인 삶에서 시민이 드러내는 자세와 기질인 “마음의 습관” 에 무관심할 수 없다. 사회는 좋은 삶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시민의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 <364~365p>

 

  샌델은 이 책의 결론부분에서 정의실현의 도구로 사회가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할 것을 권장한다. 또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정의에 대한 가치판단을 스스로 자문하여,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타인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정의로운 답을 찾아 실행하라고 권장한다. 결국 그는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하고 어떤 사회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인지 지속적으로 연구하면서, 개인의 인격이 성숙되어 스스로가 올바른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그나마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어떻게 보면, 롤스의 주장보다는 조금 소극적이라 생각한다. 롤스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사회구조의 개선과 선천적 환경 속에서도 평등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이론을 제시했다면, 샌델의 결론은 공동체와 개인의 인격적 성숙을 감정적으로 호소한 기분이 든다. 물론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결론 이전까지 정의에 대한 냉철한 변증을 보여줬던 그의 단호한 말에 비해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샌델은 개인 스스로가 올바른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조금 위험한 생각이라 본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은 일관된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문제는 다양성인데, 정의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고려한다면, 가치판단에 있어서 더욱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 반대로 입장들이 적을 시에는 가치판단의 혼란을 줄일 수 있겠지만, 단편적인 가치판단에 머무를 수 있다. 그리고 인격적 성숙이 더디거나 불가능한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시에는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에 대한 샌델의 부연설명이 없기에 책을 다 읽고도 아쉬움이 남는다. 

 

  번외로 마이클 샌델은 191p에서 칸트의 도덕 이론이 진실이지만 오해를 일으키는 발언을 하는 것은 빤한 거짓말과 달리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데,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도가 있는 오해의 발언마저도 칸트에게 있어서는 무조건 악이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위장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는 없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고민할 수 있고,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된 사례들은 미국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기에 친숙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 내에서 정의는, 사회구성원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서 뉴스를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가치판단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이 옳은가 판단해야 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기 이전에 언론이나 누군가가 먼저 판단하여 우리들을 그쪽으로 몰아가려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군중심리나 환경에 이끌려 공동체의 정의를 위한 가치판단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사회구성원들이 익숙하다면, 사회 내의 정의실현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정의실현에 용이한 사회체제이다. 그러나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 속에서 양극화는 심해졌고, 법과 도덕은 유명무실해졌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사람 간에 신뢰가 깨졌고, 사회와 구성원 간의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신뢰가 깨진 곳에서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만약 사회 내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나는 롤스의 정의론처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되 인권을 기초로 한 사회구조적 개선과 차등적 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국가와 국가, 국가와 사회, 사회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