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읽기도 어려운 책을 영어로 읽었다’고 하면 왠 잘난 척이라며, 재수 없어 할 사람이 몇 명 있을 듯 싶다. 그러나 한글로 읽었던 책을 영어로 읽으면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같은 책인데,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고나 할까?
상당히 오래 전 이 책을 한글판으로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부터가 도발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 한데다, 포스트모던 계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대학가의 필독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당시 이런 저런 지식에 목말라하던 나도 자연스레 이 책에 끌리게 되었다. 솔직히 이 때 내가 ‘이런 종류의 외국 소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것들이 외국의 생소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소하고 딱딱한 외국 사상서들이 난해하기만 했던 내게, 외국 소설들은, 그러한 사상들의 배경을 이해하게 함으로서, 그것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소설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상적인 삶을 철학적으로 해부하는 저자의 현란한 말장난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체코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서로 다른 남녀의 기괴한 사랑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땐, 이 책에 대한 파편적 지식들과 부분적 이해에 그쳤던데 만족해야만 했었다. 훗날 다시 한번 도전해보리라는 막연한 바램과 함께.
소설에는 작가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어 있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의 정치, 경제적 환경과 문화’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 있고, 작가의 사고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체코는 ‘자유분방해서 가벼운 서유럽’과 ‘무거운 이데올로기의 동유럽’이 기괴하게 섞인 나라다. 성은 서유럽처럼 자유스럽게 허용되지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무겁게 강요된다. 가볍다는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으로 그래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무겁다는 것은 ‘반드시 그래야 되는 것’으로 그것의 의미가 너무 무겁게 삶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이 삶을 지배하면, 인간은 무의미의 허무로 괴로워하게 되고, 무거움이 지배하면, 그 무거움이 주는 억압 때문에 숨막혀한다. 그런데, 이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장소가 바로 체코였고, 그 갈등을 철학적으로 보여준 소설이 바로 밀란 쿤데라의 이 소설인 것이다.
토마스와 사비나는, 서유럽의 가벼움을 나타내고 테레사와 프란츠는 동유럽의 무거움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토마스와 테레사가 ‘성적 자유’와 ‘사랑과 일치된 성’으로 대립하고, 사비나와 프란츠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거부’와 ‘이데올로기의 꿈’으로 대립된 모습을 보여준다.
섹스을 통해 여성을 알아가는 미학적 취향을 가진 토마스. 그에겐 성적 억압을 의미하는 사랑이란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테레사를 만나면서 그녀만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적 취향을 버리기 어려웠다. 테레사를 만나 비로서 사랑이란 것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사랑과 섹스가 별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테레사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취미생활인 섹스를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레사는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 때문에 토마스도 괴로웠지만,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바람둥이로 운명지워져 태어났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사랑해서 그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여자의 체취로 괴로워했던 테레사. 그녀는 자신이 약하고 토마스는 강해서 토마스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마스가 자신처럼 나약해지기만을 소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시 체코로 돌아와서 정치적 탄압을 받아야만 했던 토마스는, 덕분에 유망한 외과의사에서 평범한 촌로로 변신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순간, 그녀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었고 토마스를 그렇게 만든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의 인생에 그녀가 뛰어들어 화려한 인생 망쳤다는 자괴감이 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권위’ 아래에서 반항심을 키웠던 사비나. 그녀의 삶의 목적은 오직 반란이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극단적 자유를 꿈 꾸었던 그녀’에겐 그녀의 삶을 누르는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츠를 떠났다. 반란이 그녀 삶의 주된 동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사비나를 여신처럼 섬겼던 프란츠.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사비나가 극단적 개인주의를 추구한 반면, 그는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행진’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비나를 잃고, 다른 여자를, ‘그의 여신인 사비나’가 보낸 것으로 믿고 사랑한다. 그것만이 그의 비현실적 사랑을 현실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선 무거움과 가벼움의 교차를 보여주고 있지만, 점점 가벼워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흐름인 것 같다. ‘반드시 그래야 되는 것’은 점점 없어지고 있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들이 우리 삶을 채워가면서,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삶의 이상인 것처럼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벼움만으로 인간의 삶을 채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얼마동안은 편하고 자유롭기는 하겠지만, 곧 그 가벼움이 가져오는 무의미로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헉헉대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중 하나를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조화로운 동거를 추구하는 것’이, 어느 하나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중용의 길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 : 가벼운 삶과 무거운 이념의 운명적 동거
가벼운 삶과 무거운 이념의 운명적 동거
‘한글로 읽기도 어려운 책을 영어로 읽었다’고 하면 왠 잘난 척이라며, 재수 없어 할 사람이 몇 명 있을 듯 싶다. 그러나 한글로 읽었던 책을 영어로 읽으면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같은 책인데,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고나 할까?
상당히 오래 전 이 책을 한글판으로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부터가 도발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 한데다, 포스트모던 계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대학가의 필독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당시 이런 저런 지식에 목말라하던 나도 자연스레 이 책에 끌리게 되었다. 솔직히 이 때 내가 ‘이런 종류의 외국 소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것들이 외국의 생소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소하고 딱딱한 외국 사상서들이 난해하기만 했던 내게, 외국 소설들은, 그러한 사상들의 배경을 이해하게 함으로서, 그것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소설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상적인 삶을 철학적으로 해부하는 저자의 현란한 말장난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체코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서로 다른 남녀의 기괴한 사랑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땐, 이 책에 대한 파편적 지식들과 부분적 이해에 그쳤던데 만족해야만 했었다. 훗날 다시 한번 도전해보리라는 막연한 바램과 함께.
소설에는 작가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어 있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의 정치, 경제적 환경과 문화’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 있고, 작가의 사고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체코는 ‘자유분방해서 가벼운 서유럽’과 ‘무거운 이데올로기의 동유럽’이 기괴하게 섞인 나라다. 성은 서유럽처럼 자유스럽게 허용되지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무겁게 강요된다. 가볍다는 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으로 그래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무겁다는 것은 ‘반드시 그래야 되는 것’으로 그것의 의미가 너무 무겁게 삶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이 삶을 지배하면, 인간은 무의미의 허무로 괴로워하게 되고, 무거움이 지배하면, 그 무거움이 주는 억압 때문에 숨막혀한다. 그런데, 이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장소가 바로 체코였고, 그 갈등을 철학적으로 보여준 소설이 바로 밀란 쿤데라의 이 소설인 것이다.
토마스와 사비나는, 서유럽의 가벼움을 나타내고 테레사와 프란츠는 동유럽의 무거움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토마스와 테레사가 ‘성적 자유’와 ‘사랑과 일치된 성’으로 대립하고, 사비나와 프란츠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거부’와 ‘이데올로기의 꿈’으로 대립된 모습을 보여준다.
섹스을 통해 여성을 알아가는 미학적 취향을 가진 토마스. 그에겐 성적 억압을 의미하는 사랑이란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테레사를 만나면서 그녀만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적 취향을 버리기 어려웠다. 테레사를 만나 비로서 사랑이란 것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사랑과 섹스가 별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테레사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취미생활인 섹스를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레사는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 때문에 토마스도 괴로웠지만,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바람둥이로 운명지워져 태어났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사랑해서 그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여자의 체취로 괴로워했던 테레사. 그녀는 자신이 약하고 토마스는 강해서 토마스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마스가 자신처럼 나약해지기만을 소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시 체코로 돌아와서 정치적 탄압을 받아야만 했던 토마스는, 덕분에 유망한 외과의사에서 평범한 촌로로 변신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순간, 그녀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었고 토마스를 그렇게 만든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의 인생에 그녀가 뛰어들어 화려한 인생 망쳤다는 자괴감이 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권위’ 아래에서 반항심을 키웠던 사비나. 그녀의 삶의 목적은 오직 반란이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극단적 자유를 꿈 꾸었던 그녀’에겐 그녀의 삶을 누르는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츠를 떠났다. 반란이 그녀 삶의 주된 동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사비나를 여신처럼 섬겼던 프란츠.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사비나가 극단적 개인주의를 추구한 반면, 그는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행진’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비나를 잃고, 다른 여자를, ‘그의 여신인 사비나’가 보낸 것으로 믿고 사랑한다. 그것만이 그의 비현실적 사랑을 현실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선 무거움과 가벼움의 교차를 보여주고 있지만, 점점 가벼워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흐름인 것 같다. ‘반드시 그래야 되는 것’은 점점 없어지고 있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들이 우리 삶을 채워가면서,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삶의 이상인 것처럼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벼움만으로 인간의 삶을 채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얼마동안은 편하고 자유롭기는 하겠지만, 곧 그 가벼움이 가져오는 무의미로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헉헉대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중 하나를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조화로운 동거를 추구하는 것’이, 어느 하나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중용의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