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만두고 몇 년 후 테크노 파크 근처로 이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문 앞에서 한 번 더 통화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잠시 후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쓴 지저분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이 우리를 맞이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 사장님 이었다.)
친근한 사투리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곧 가게 자랑을 하신다.
하루 매상이 얼마이니, 손님들이 2시간씩 줄을 서서 먹으러 온다느니, 근처 워커힐 호텔에서 유명 인사들도 자주 온다느니, 30분가량 쉴 세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일이 무척 고되니 지금이라도 힘들겠다 싶으면 미리 말을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먹여만 주고 재워만 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그곳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기다려 라고 하신다. 저녁에 전화를 주겠다고 하신다.
그날 저녁 형과 합의를 보았다. 마창 수산에서 연락이 안 오거나 퇴짜를 맞게 되면 내일 바로 집으로 내려가자는 데에 서로가 동의를 했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갈 무렵 전화가 울린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익숙한 사투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상경 한 뒤 처음으로 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지게 된다. 숙식 제공에 월급까지 든든히 챙겨 주시겠단다. 너무 기쁜 나머지 허기진 배가 포만감으로 가득한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장님이 경상도 분이셔서 우리를 뽑아 주셨다고 한다. 항상 지저분한 행색으로 다니시지만 타고난 장사꾼이자 인복을 소유한 분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늦지 않게 서둘러짐을 꾸리고 지옥 같았던 제기동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문을 닫고 나오며 그 골목을 한 번 더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 이곳 생활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훗날 다시 이곳을 찾게 되면 주인아주머니께 김치 값을 꼭 챙겨 드리리라'
전철을 타고 광장 역에 내린다. 언덕을 올라 간 뒤 가게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철역이 있고 사거리가 있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좋은 곳이다. '이러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겠지...... '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몇몇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그중 한명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건 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그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전도연'
그는 정말로 전도연과 똑같이 생겼었다. 친자매라 해도 믿을만한 정도이다. 가녀린 체격에 길게 묶어 놓은 생머리, 크고 둥근 눈망울에 조막만한 얼굴, 부끄럽지만 한눈에 반해 버렸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손님들 중에 그를 보러 오는 분들도 상당히 있다고 한다. 서빙을 보는 누님들 중 팁도 가장 많이 받으신단다.
그리고 훗날 이 여인은 나와 해서는 안 될 불같은 사랑 혹은 슬픈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며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가장 큰 파피용의 날갯짓을 팔락이는 여인이 된다.
내 인생을 지금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만든 장본인, 좋은 말로 하면 운명의 여인, 나쁜 말로 하면 불륜의 주인공. 뭐, 사실 불륜이라 하기에도 좀 그런 것이 그는 그 당시에 두 아이의 엄마이기는 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었고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과도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나의 사사로운 치부까지 들어내는 이유는 혹시나 현재 유부녀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있는 어린 청소년들이 있다면 나의 사례를 보고 한 번 더 생각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주위에 본인을 걱정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그 여인을 비방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로 인하여 잃게 되었던 것들과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었던 것에 굉장히 많은 반성을 하고 후회로 얼룩진 과거를 조용히 곱씹어 보며 앞으로 남은 인생에 있어서는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다.
곧 작은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뒤 그곳은 휴게실이자 개인 짐을 꾸려 놓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작은 캐비넷이 몇 개가 보이며 방은 그리 크지 않았고 한쪽 구석에 작은 티비 만이 달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같은 나이 또래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 낸다.
이름은 송x창이라고 하며 굉장히 잘생긴 외모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나이는 나보다는 한살 많았으며 성진이형과는 동갑이었다. 가수 지망생이라고는 하는 데 노래 실력은 꽤나 연습이 필요한 수준이었으며 항상 나와 성진이형의 노래 실력을 부러워하는 형이었다. 굉장히 성실했고 사장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항상 화장실 청소 중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에 심취해 "너는 여기에 있을 인물이 아니야" 라며 자화자찬하던 형이었다. 가수 보다는 연기자로 나갔으면 대성했을 타입이다.
어느 정도 외모였냐 하면 동대문 같은 곳에 쇼핑을 하러 가면 항상 엔터테이먼트 쪽의 명함을 서너 장 받아 오는 정도였다. 지금은 뭘 하고 사는 지 연락이 끊긴 상태이지만 그의 성실성과 외모 정도이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인정을 받으며 잘 먹고 잘살고 있으리라 짐작이 된다.
며칠 후 성진이형은 주방으로 재배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주방 사람들이 나보다는 힘이 좋게 생긴 형을 탐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홀 서빙을 하게 되었는데 말이 서빙이지 이건 뭐 웬만한 막노동 판 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의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하루 평균 손님이 2000명이며 보통 500상 이상은 거뜬히 채우는 데 서빙을 송x창 형과 둘이서 했으며 각 방마다 상을 치우는 누나들이 있었고 나와 형은 평균 500개 이상의 회와 매운탕과 각종 음식들을 잠시 서 있을 틈도 없이 나르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놈에 물통은 얼마나 또 자주 채워줘야 하는지 1000통 이상은 채워서 배달을 해야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과를 다 끝내고 나면 우리는 숙식을 하는 입장이라 나머지 뒷정리 까지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의 시작은 오전 8시에서 시작되며 끝은 항상 12시가 넘어야만 모든 것이 정리가 다 되어 있었다.
- 하루 평균 16시간의 노동, 토머스 모어가 가슴아파 할 상황이다.
홀의 상황은 그러 했으며 주방의 상황은 더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훗날 나도 청해수산이라는 횟집 주방에서 2년을 근무하게 되어 알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성진이형은 힘들다는 불만을 토해 내었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말수도 적어지며 웃음기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남을 웃기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그렇게 밝은 형이었는데 주방으로 들어 간 뒤로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다크서클로 인해 판다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어느 아침 성진이형은 은행에 갔다 온다는 말을 남긴 체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내게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일주일 후 걸려온 전화로 울산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적잖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도망을 갈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오죽했으면 매일 밤 주방 형들과 천호대교 밑에서 깡 소주로 하루를 달랬을까 하는 뒤늦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여인과의 러브스토리가 이어진다.
먼저 소개한 전도연을 닮은 그 여인의 이름은 '장x아'
나이는 72년 생 개띠이다. 본인과 정확히 10살 차이가 난다. 생일 또한 2월 달 이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내 나이 19, 그녀의 나이 29, 하지만 29살이라는 나이를 못 믿게 만드는 외모와 체격을 소유했었다. 아니, 믿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 차이란 것과 유부녀였었다는 낙인으로 인해 나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매일 밤 청소를 다 끝내고 아무도 없는 컴컴한 홀에서 달빛과 가로등 빛을 받으며 주방에서 몰래 꺼내 온 싱싱한 회와 매취순 잔을 기울였으며 서로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꽃피우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고된 육체노동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으며 그 당시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항상 그녀가 있는 방의 테이블을 치워주며 그녀의 일을 도왔었고 손님과의 분쟁이 발생되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해결 해주고는 했었다.
사실 그녀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유부녀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귀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결코 그녀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삶에 일부였었기 때문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라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사랑을 꽃피워 갔으며 운명의 8월 달이 찾아오게 된다.
그녀와의 사랑이 아버지의 귓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사촌형을 보내어 나를 잡아 오라고 하셨다. 성공하라고 올려 보냈더니 웬 유부녀와 바람이 나서 인생의 삐딱선을 타게 될 까봐 내리신 방침이셨다.
8월의 어느 날 나는 사촌형의 손에 끌려 울산으로 내려가게 된다. 결코 형이 밉지는 않았다. 다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그토록 미울 수 없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반항심만 커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뼈져리게 반성을 하는 부분이다.)
마창수산의 모든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녀에게는 작별을 고했다. 떠나기 전날 광장 사거리에서 그녀의 눈물을 보며 어린 나의 가슴 속에도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 그리고 어린 거위의 꿈을 접고 다시 끌려 내려온 울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함 때문에 하루하루를 우울함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찌됐던 일은 해야 하므로 사촌형이 운영하는 샷시 공장에서 성진이형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사촌형은 울산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샷시 기술자이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오로지 샷시 기술에만 매달려 온지 십 수 년.
울산에서 샷시 공장을 하는 사람들 중 사촌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최고의 기술력은 곧 최고의 수입을 의미하며 여기저기서 각종 러브콜이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다. 만약 어릴 때부터 공부에 뜻이 없는 이들이 있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기술을 쌓아 나가는 것이 좋다는 것은 뭐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언양에 있는 아파트 베란다 공사. 한여름의 땡볕에서 우리는 정말 죽어라 일을 했다.
작업은 신축 아파트 베란다에 하이샷시 창을 시공하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게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려 그 무거운 하이샷시 창을 끌어 올리는 작업을 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한 일을 십 수 년째 하고 있고 현재까지 하고 있는 사촌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밧줄에 묶여 있는 40키로 이상 나가는 강화유리창을 어린 청년 둘이서 땡볕에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으로 끌어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도저히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다가온다.
그녀를 잊기 위해 낮에는 일에 목숨을 바쳤으며 저녁에는 소주에 목숨을 바쳤다.
매일 밤 사촌형과 성진이형과 소주를 마시며 인생을 논했으며 앞날을 설계해 나갔다.
그리고 두 달 후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이다.
그녀 또한 광장동을 떠났으며 지금은 인천에 있다고 한다.
가슴 속 가장 깊은 곳, 마치 지옥의 7층과도 같은 곳에 묶어 두었던 그 무엇이 또 꿈틀거린다.
닫아두었던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나는 또 참지 못한 체 그 뚜껑을 열어 버리고 만다.
- 비오는 어느 가을 밤.
나는 또 한 번의 상경을 결심한다.
이번에는 출가가 아닌 무단가출.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골목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집을 쳐다 보며 한 가지 다짐을 하고 고개를 돌린 체 발걸음을 땐다.
- 인천터미널.
마중 나와 있던 그녀와 재회를 한다.
지금쯤 아버지도 알게 되셨겠지...... 생각한다.
전화기를 꺼둔다. 철없던 어린 시절, 불장난 같은 사랑으로 인해 내 인생은 이렇게 바뀌게 된다.
며칠 후 그녀가 소개해 준 부천 시청 맞은편에 있는 청해 수산이라는 횟집 주방에 취직을 하게 되며 그곳에 숙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반년 정도 더 그녀를 만나다가 그녀와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나의 불장난은 끝을 맺고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 이번에는 도박.
부천 시청 앞 청해 수산, 지금은 횟집이 철거가 되고 그 자리에 냉면집과 치과가 들어 선 상태이다. 이런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8년 전 내가 청해 수산에 숙식을 할 당시에 그 건물의 4층에는 나를 포함한 횟집 직원들이 묵는 방이 여러 개가 있었다.
시설은 깔끔하고 좋았으며 그곳 주방장 또한 그곳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일 저녁 거액의 포커 판이 벌어진다.
그 당시 나는 포커를 전혀 치지 못하는 상태였었다. 매일 밤 형들이 벌이는 포커 판을 뒤에서 구경만 하는 수준이었으며 족보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매운탕을 가르쳐 주던 형이 있는데 그 형 에게 포커를 배우게 된다.
기본적인 족보와 룰과 거창하게 포커 판의 예절까지도 배우게 된다.
포커 판에 빼놓을 수 없는 말. "호구는 왕이다." 라는 말 또한......
그 형이 좋은 의미로 나를 가르친 것인지, 아니면 된장 한명을 키워서 호구로 삼을 속셈으로 나를 가르친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 형으로 인하여 내 인생에 황금기가 접어들게 되며 아주 소중한 경험과 내공을 쌓게 된다.
포커 판은 사람의 인생과 비슷하다.
인생의 굴곡이 있듯이 포커 판에도 일정한 주기가 있다. 이른바 ‘끗빨’ 이라고 칭한다.
포커는 엄연히 실력으로 좌우되나 이 끗빨 이라는 것을 무시 할수는 없다. 엄연히 존재하며 이 끗빨로 인해 하수가 고수를 무너뜨리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포커는 바둑과 같다. 바둑 또한 초급자가 9단을 무너뜨리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포커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이 끗빨의 흐름을 읽을 줄 알게 된다. 이 흐름과 상대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게 되면 70% 이상의 승률을 올릴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패가 아니다. 족보를 맞추려고 하지마라. 족보는 미끼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상대가 그 미끼에 휘둘리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본인처럼 미끼를 던지며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자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나의 패를 거의 보지 않고 해서 이긴적도 많다. 속칭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어찌 알수 있겠느냐. 전법이다. 꽤 좋은 방법이다. 나의 패를 맞추어 볼 수록 나의 패배는 늘어만 간다. 본인의 패를 확인하기 전에, 상대방이 배팅은 언제 했는지, 배팅 후 손의 모양은 어떠한지, 패를 어떤 식으로 정렬하는지, 담배연기가 콧구멍으로 나오는지 입으로 나오는지, 누가 언제 기침을 하였는지, 누가 언제 졸았는지, 누가 언제 하품을 했는지, 눈동자는 어디에 꽂혀 있는지, 레이스를 감을 때 목소리가 어떠한지,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본인의 족보 맞추기 식의 패는 말 그대로 패배를 불러오는 자양분이 된다.
포커 고수들 에게는 상식 수준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 상식이 승부를 가르는 가장 큰 요소가 된다. 평정심을 유지한 체 기본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무기이다 라고 자부하는 바이다.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게임을 즐기고 있는 듯한 표정을 말한다. 실제로 엄청난 내공의 고수들은 무표정이 아니라 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소 뒤에는 엄청난 칼을 품고 있다. "얼굴에는 꽃 마음에는 칼" 허영만 선생의 타짜에 나오는 대사이다. 살벌한 고수들 속의 포커 판에서 살아 남을려면은 미소 속에 있는 칼을 볼줄아는 내공도 길러야 한다.
일을 시작한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돈이 별로 없었으므로 처음 한 두 달 정도는 작은 판에서 경험을 쌓았다. 작은 판이라 해도 1인당 20~30만 원 정도는 보유하고 있는 판이다. 다섯 명이 치면 판돈 백만 원짜리 판이 된다.
여담이지만 만약 뉴스에서 수십 억 원 대의 도박판이 벌어진 현장을 적발하였습니다. 라는 속보가 나오면 그건 판돈이 수십 억 원 이라는 것이 아니다. 1인당 천만 원씩 들고 다섯 명이 치면 5천, 그것을 한 두 달 내내 치면 수십 억 원이 된다. 이것을 수십 억 원대 도박판이라 칭하며 과장된 기사를 내보내는 데 그리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잡혀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조금 억울한 기사일 것이다. 실제로 한 타임 당 수십 억 원이 오고가는 도박판은 흔하지가 않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말이다.
-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하룻밤에 수백 만 원을 오고가는 판을 휩쓸고 다니게 된다.
타짜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타짜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타짜를 기술자로 설명한다. 허나, 나는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오로지 포커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일명 ‘백지 꾼’ 이라고 통한다.
1년 가까이 높은 승률을 유지한 결과 대충 1억 정도는 넘게 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억이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내게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다.
포커 판이 끝난 다음날 항상 모든 직원에게 피자와 통닭과 돌렸고 저녁에는 또래 애들을 모아서 술파티를 벌였다. 직원들과 또래 아이들은 나의 무용담을 듣고 싶어 했고 아침만 되면 항상 속보 다루듯이 내게 기삿거리를 듣고 가는 게 일수였다. 누가 무엇을 잡고 왜 죽었는지, 최대 배팅은 누가 얼마나 때렸는지, 포커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이런 유치한 무용담은 좋은 얘깃거리가 되는 것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여지껏 도박을 해본 적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도박은 나쁜것이므로 혹시나 도박 중독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다면 힘들겠지만 그곳에 발을 끊기를 바란다. 포커를 하나의 스포츠 문화로 만들어 놓은 미국의 문화가 부럽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그러한 여건이 못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친구들끼리 속된말로 '삥바리' 라는 것을 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파악하기에 포커만한 게임도 없으므로 말이다.
- 쉽게 벌지는 않았지만 너무 쉽게 써버린 젊은 날의 정신 상태에 실망감을 않고 있는 지금의 나를 발견한다.
낮에는 요리를 밤에는 도박을 배웠으며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일주일을 하루 평균 2시간 정도의 수면을 유지한 적도 있었으며 졸면서 칼질을 하다가 손을 베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호박을 가는 기계에 손가락이 말려 들어갈 뻔 했던 적도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장갑이 쉽게 벗겨져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으며, 꽁치 굽는 야끼 바와 찜통에 손가락을 데이는 일은 밥 먹듯이 흔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하루 평균 생선을 수 백 마리 많게는 천 마리 가까이 대가리를 치는데, 막말로 성기뺑이 치는 일이 따로 없다. 실수로 우럭 가시에라도 찔리는 날에는 손가락이 발가락이 되어 있으며 그 붓기로 잠을 설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생선 대가리를 따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생선의 피로 물들어 있는데 그 광경이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온통 피바다 이며 굴러다니는 생선 대가리는 아직 신경이 살아 있어 입을 뻐끔뻐끔 거리고 간혹 도미의 큰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착각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그 일을 한 후로는 살아있는 생명을 일절 죽이지 않았다. 정말로 지나가는 개미도 피해 밟고 가는 경우도 있다. 살아 가면서의 살생을 그 당시에 다 했는 듯하여 앞으로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반성으로 삶을 이어 나갈 것이다.
- 그리고 군대 문제가 닥쳐서 횟집을 그만두게 되었다.
송내역에 작은 월세 집을 구한 뒤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역시 교차로를 뒤져서 방위산업체를 물색한다. 그 당시 나의 마인드는 군대는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돈과 사회경험을 더 쌓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는 현역이었으므로 군대를 안가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방위산업체'
다행이 고등학교 때 따놓은 자격증으로 충분한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는 틀리 게 방위산업체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었다.
정말로 20군데 정도는 다닌 듯하다. 부천의 모든 방위산업체를 다 훑은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 CCTV 제조업체.
내가 처음 이곳에 입사를 했을 당시 회사 규모는 직원 30명 정도의 소규모 회사였었다.
하나, 8년이 지난 지금은 그 10배 규모의 중기업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몇 달 전 코스닥에도 상장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꽤나 전망이 있는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에피소드는 초창기 소기업 일 때의 사장의 횡포, 우리를 거의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를 부리듯이 취급했었던 관리자들, 주말도 없이 강제로 출근해서 수당도 못 받고 일했던 특례시절, 혼자서 수 백 개의 박스를 나르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디스크 치료를 받으면서 일했던 것 등이 있는데 지금은 사장님이 바뀌어서 꽤나 안정된 직장으로 평가 받는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근래로 와서는 제 작년 야간 대를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도 순수 100% 창작품을 만들어 낸 것에 굉장히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었다. 훗날 카지노 사업이 번창하게 되면 내가 만든 기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 날 것이리라 예측을 해본다. 그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었고 교수들도 인정을 했었던 부분이라 졸업작품전에 메인으로 전시를 시켰던바가 있다.
지금까지 지난 10년을 열거 해 보았다.
앞으로 다가 올 10년은 또 어떠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작은 흥분감과 기대감을 몰고 오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그 어떠한 길을 택하더라도 본인이 택한 결정을 최고의 판단이었다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솔솔한 재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상 이곳에 잠시 잃어버린 10년을 잊어버리지 않을 10년으로 만들기 위해 조용히 기록해두는 바이다.
[단편소설] ♣ 잃어버린 10년 - part 3 <완결>
- 광나루 마창 수산.
통화 버튼을 누른다. 굵은 목소리의 중년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길게 통화 할 수 없으니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신다.
- 다음날.
형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5호선 광나루역에 내렸다.
몇 번 출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단 밖으로 나갔다.
광장 사거리 한 쪽 블록 언덕에 위치한 ‘마창 수산’ 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현재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만두고 몇 년 후 테크노 파크 근처로 이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문 앞에서 한 번 더 통화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잠시 후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쓴 지저분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이 우리를 맞이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 사장님 이었다.)
친근한 사투리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곧 가게 자랑을 하신다.
하루 매상이 얼마이니, 손님들이 2시간씩 줄을 서서 먹으러 온다느니, 근처 워커힐 호텔에서 유명 인사들도 자주 온다느니, 30분가량 쉴 세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일이 무척 고되니 지금이라도 힘들겠다 싶으면 미리 말을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먹여만 주고 재워만 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그곳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기다려 라고 하신다. 저녁에 전화를 주겠다고 하신다.
그날 저녁 형과 합의를 보았다. 마창 수산에서 연락이 안 오거나 퇴짜를 맞게 되면 내일 바로 집으로 내려가자는 데에 서로가 동의를 했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갈 무렵 전화가 울린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익숙한 사투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상경 한 뒤 처음으로 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지게 된다. 숙식 제공에 월급까지 든든히 챙겨 주시겠단다. 너무 기쁜 나머지 허기진 배가 포만감으로 가득한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장님이 경상도 분이셔서 우리를 뽑아 주셨다고 한다. 항상 지저분한 행색으로 다니시지만 타고난 장사꾼이자 인복을 소유한 분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늦지 않게 서둘러짐을 꾸리고 지옥 같았던 제기동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문을 닫고 나오며 그 골목을 한 번 더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 이곳 생활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훗날 다시 이곳을 찾게 되면 주인아주머니께 김치 값을 꼭 챙겨 드리리라'
전철을 타고 광장 역에 내린다. 언덕을 올라 간 뒤 가게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철역이 있고 사거리가 있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좋은 곳이다. '이러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겠지...... '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몇몇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그중 한명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건 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그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전도연'
그는 정말로 전도연과 똑같이 생겼었다. 친자매라 해도 믿을만한 정도이다. 가녀린 체격에 길게 묶어 놓은 생머리, 크고 둥근 눈망울에 조막만한 얼굴, 부끄럽지만 한눈에 반해 버렸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손님들 중에 그를 보러 오는 분들도 상당히 있다고 한다. 서빙을 보는 누님들 중 팁도 가장 많이 받으신단다.
그리고 훗날 이 여인은 나와 해서는 안 될 불같은 사랑 혹은 슬픈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며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가장 큰 파피용의 날갯짓을 팔락이는 여인이 된다.
내 인생을 지금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만든 장본인, 좋은 말로 하면 운명의 여인, 나쁜 말로 하면 불륜의 주인공. 뭐, 사실 불륜이라 하기에도 좀 그런 것이 그는 그 당시에 두 아이의 엄마이기는 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었고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과도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나의 사사로운 치부까지 들어내는 이유는 혹시나 현재 유부녀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있는 어린 청소년들이 있다면 나의 사례를 보고 한 번 더 생각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주위에 본인을 걱정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그 여인을 비방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로 인하여 잃게 되었던 것들과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었던 것에 굉장히 많은 반성을 하고 후회로 얼룩진 과거를 조용히 곱씹어 보며 앞으로 남은 인생에 있어서는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다.
곧 작은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뒤 그곳은 휴게실이자 개인 짐을 꾸려 놓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작은 캐비넷이 몇 개가 보이며 방은 그리 크지 않았고 한쪽 구석에 작은 티비 만이 달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같은 나이 또래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 낸다.
이름은 송x창이라고 하며 굉장히 잘생긴 외모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나이는 나보다는 한살 많았으며 성진이형과는 동갑이었다. 가수 지망생이라고는 하는 데 노래 실력은 꽤나 연습이 필요한 수준이었으며 항상 나와 성진이형의 노래 실력을 부러워하는 형이었다. 굉장히 성실했고 사장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항상 화장실 청소 중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에 심취해 "너는 여기에 있을 인물이 아니야" 라며 자화자찬하던 형이었다. 가수 보다는 연기자로 나갔으면 대성했을 타입이다.
어느 정도 외모였냐 하면 동대문 같은 곳에 쇼핑을 하러 가면 항상 엔터테이먼트 쪽의 명함을 서너 장 받아 오는 정도였다. 지금은 뭘 하고 사는 지 연락이 끊긴 상태이지만 그의 성실성과 외모 정도이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인정을 받으며 잘 먹고 잘살고 있으리라 짐작이 된다.
며칠 후 성진이형은 주방으로 재배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주방 사람들이 나보다는 힘이 좋게 생긴 형을 탐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홀 서빙을 하게 되었는데 말이 서빙이지 이건 뭐 웬만한 막노동 판 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의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하루 평균 손님이 2000명이며 보통 500상 이상은 거뜬히 채우는 데 서빙을 송x창 형과 둘이서 했으며 각 방마다 상을 치우는 누나들이 있었고 나와 형은 평균 500개 이상의 회와 매운탕과 각종 음식들을 잠시 서 있을 틈도 없이 나르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놈에 물통은 얼마나 또 자주 채워줘야 하는지 1000통 이상은 채워서 배달을 해야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과를 다 끝내고 나면 우리는 숙식을 하는 입장이라 나머지 뒷정리 까지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의 시작은 오전 8시에서 시작되며 끝은 항상 12시가 넘어야만 모든 것이 정리가 다 되어 있었다.
- 하루 평균 16시간의 노동, 토머스 모어가 가슴아파 할 상황이다.
홀의 상황은 그러 했으며 주방의 상황은 더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훗날 나도 청해수산이라는 횟집 주방에서 2년을 근무하게 되어 알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성진이형은 힘들다는 불만을 토해 내었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말수도 적어지며 웃음기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남을 웃기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그렇게 밝은 형이었는데 주방으로 들어 간 뒤로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다크서클로 인해 판다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어느 아침 성진이형은 은행에 갔다 온다는 말을 남긴 체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내게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일주일 후 걸려온 전화로 울산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적잖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도망을 갈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오죽했으면 매일 밤 주방 형들과 천호대교 밑에서 깡 소주로 하루를 달랬을까 하는 뒤늦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여인과의 러브스토리가 이어진다.
먼저 소개한 전도연을 닮은 그 여인의 이름은 '장x아'
나이는 72년 생 개띠이다. 본인과 정확히 10살 차이가 난다. 생일 또한 2월 달 이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내 나이 19, 그녀의 나이 29, 하지만 29살이라는 나이를 못 믿게 만드는 외모와 체격을 소유했었다. 아니, 믿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 차이란 것과 유부녀였었다는 낙인으로 인해 나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매일 밤 청소를 다 끝내고 아무도 없는 컴컴한 홀에서 달빛과 가로등 빛을 받으며 주방에서 몰래 꺼내 온 싱싱한 회와 매취순 잔을 기울였으며 서로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꽃피우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고된 육체노동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으며 그 당시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항상 그녀가 있는 방의 테이블을 치워주며 그녀의 일을 도왔었고 손님과의 분쟁이 발생되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해결 해주고는 했었다.
사실 그녀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유부녀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귀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결코 그녀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삶에 일부였었기 때문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라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사랑을 꽃피워 갔으며 운명의 8월 달이 찾아오게 된다.
그녀와의 사랑이 아버지의 귓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사촌형을 보내어 나를 잡아 오라고 하셨다. 성공하라고 올려 보냈더니 웬 유부녀와 바람이 나서 인생의 삐딱선을 타게 될 까봐 내리신 방침이셨다.
8월의 어느 날 나는 사촌형의 손에 끌려 울산으로 내려가게 된다. 결코 형이 밉지는 않았다. 다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그토록 미울 수 없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반항심만 커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뼈져리게 반성을 하는 부분이다.)
마창수산의 모든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녀에게는 작별을 고했다. 떠나기 전날 광장 사거리에서 그녀의 눈물을 보며 어린 나의 가슴 속에도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 그리고 어린 거위의 꿈을 접고 다시 끌려 내려온 울산.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함 때문에 하루하루를 우울함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찌됐던 일은 해야 하므로 사촌형이 운영하는 샷시 공장에서 성진이형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사촌형은 울산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샷시 기술자이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오로지 샷시 기술에만 매달려 온지 십 수 년.
울산에서 샷시 공장을 하는 사람들 중 사촌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최고의 기술력은 곧 최고의 수입을 의미하며 여기저기서 각종 러브콜이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다. 만약 어릴 때부터 공부에 뜻이 없는 이들이 있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기술을 쌓아 나가는 것이 좋다는 것은 뭐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언양에 있는 아파트 베란다 공사. 한여름의 땡볕에서 우리는 정말 죽어라 일을 했다.
작업은 신축 아파트 베란다에 하이샷시 창을 시공하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게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려 그 무거운 하이샷시 창을 끌어 올리는 작업을 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한 일을 십 수 년째 하고 있고 현재까지 하고 있는 사촌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밧줄에 묶여 있는 40키로 이상 나가는 강화유리창을 어린 청년 둘이서 땡볕에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으로 끌어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도저히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다가온다.
그녀를 잊기 위해 낮에는 일에 목숨을 바쳤으며 저녁에는 소주에 목숨을 바쳤다.
매일 밤 사촌형과 성진이형과 소주를 마시며 인생을 논했으며 앞날을 설계해 나갔다.
그리고 두 달 후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이다.
그녀 또한 광장동을 떠났으며 지금은 인천에 있다고 한다.
가슴 속 가장 깊은 곳, 마치 지옥의 7층과도 같은 곳에 묶어 두었던 그 무엇이 또 꿈틀거린다.
닫아두었던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나는 또 참지 못한 체 그 뚜껑을 열어 버리고 만다.
- 비오는 어느 가을 밤.
나는 또 한 번의 상경을 결심한다.
이번에는 출가가 아닌 무단가출.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골목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집을 쳐다 보며 한 가지 다짐을 하고 고개를 돌린 체 발걸음을 땐다.
- 인천터미널.
마중 나와 있던 그녀와 재회를 한다.
지금쯤 아버지도 알게 되셨겠지...... 생각한다.
전화기를 꺼둔다. 철없던 어린 시절, 불장난 같은 사랑으로 인해 내 인생은 이렇게 바뀌게 된다.
며칠 후 그녀가 소개해 준 부천 시청 맞은편에 있는 청해 수산이라는 횟집 주방에 취직을 하게 되며 그곳에 숙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반년 정도 더 그녀를 만나다가 그녀와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나의 불장난은 끝을 맺고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 이번에는 도박.
부천 시청 앞 청해 수산, 지금은 횟집이 철거가 되고 그 자리에 냉면집과 치과가 들어 선 상태이다. 이런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8년 전 내가 청해 수산에 숙식을 할 당시에 그 건물의 4층에는 나를 포함한 횟집 직원들이 묵는 방이 여러 개가 있었다.
시설은 깔끔하고 좋았으며 그곳 주방장 또한 그곳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일 저녁 거액의 포커 판이 벌어진다.
그 당시 나는 포커를 전혀 치지 못하는 상태였었다. 매일 밤 형들이 벌이는 포커 판을 뒤에서 구경만 하는 수준이었으며 족보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매운탕을 가르쳐 주던 형이 있는데 그 형 에게 포커를 배우게 된다.
기본적인 족보와 룰과 거창하게 포커 판의 예절까지도 배우게 된다.
포커 판에 빼놓을 수 없는 말. "호구는 왕이다." 라는 말 또한......
그 형이 좋은 의미로 나를 가르친 것인지, 아니면 된장 한명을 키워서 호구로 삼을 속셈으로 나를 가르친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 형으로 인하여 내 인생에 황금기가 접어들게 되며 아주 소중한 경험과 내공을 쌓게 된다.
포커 판은 사람의 인생과 비슷하다.
인생의 굴곡이 있듯이 포커 판에도 일정한 주기가 있다. 이른바 ‘끗빨’ 이라고 칭한다.
포커는 엄연히 실력으로 좌우되나 이 끗빨 이라는 것을 무시 할수는 없다. 엄연히 존재하며 이 끗빨로 인해 하수가 고수를 무너뜨리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포커는 바둑과 같다. 바둑 또한 초급자가 9단을 무너뜨리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포커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이 끗빨의 흐름을 읽을 줄 알게 된다. 이 흐름과 상대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게 되면 70% 이상의 승률을 올릴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패가 아니다. 족보를 맞추려고 하지마라. 족보는 미끼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상대가 그 미끼에 휘둘리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본인처럼 미끼를 던지며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자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나의 패를 거의 보지 않고 해서 이긴적도 많다. 속칭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어찌 알수 있겠느냐. 전법이다. 꽤 좋은 방법이다. 나의 패를 맞추어 볼 수록 나의 패배는 늘어만 간다. 본인의 패를 확인하기 전에, 상대방이 배팅은 언제 했는지, 배팅 후 손의 모양은 어떠한지, 패를 어떤 식으로 정렬하는지, 담배연기가 콧구멍으로 나오는지 입으로 나오는지, 누가 언제 기침을 하였는지, 누가 언제 졸았는지, 누가 언제 하품을 했는지, 눈동자는 어디에 꽂혀 있는지, 레이스를 감을 때 목소리가 어떠한지,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본인의 족보 맞추기 식의 패는 말 그대로 패배를 불러오는 자양분이 된다.
포커 고수들 에게는 상식 수준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 상식이 승부를 가르는 가장 큰 요소가 된다. 평정심을 유지한 체 기본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무기이다 라고 자부하는 바이다.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게임을 즐기고 있는 듯한 표정을 말한다. 실제로 엄청난 내공의 고수들은 무표정이 아니라 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소 뒤에는 엄청난 칼을 품고 있다. "얼굴에는 꽃 마음에는 칼" 허영만 선생의 타짜에 나오는 대사이다. 살벌한 고수들 속의 포커 판에서 살아 남을려면은 미소 속에 있는 칼을 볼줄아는 내공도 길러야 한다.
일을 시작한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돈이 별로 없었으므로 처음 한 두 달 정도는 작은 판에서 경험을 쌓았다. 작은 판이라 해도 1인당 20~30만 원 정도는 보유하고 있는 판이다. 다섯 명이 치면 판돈 백만 원짜리 판이 된다.
여담이지만 만약 뉴스에서 수십 억 원 대의 도박판이 벌어진 현장을 적발하였습니다. 라는 속보가 나오면 그건 판돈이 수십 억 원 이라는 것이 아니다. 1인당 천만 원씩 들고 다섯 명이 치면 5천, 그것을 한 두 달 내내 치면 수십 억 원이 된다. 이것을 수십 억 원대 도박판이라 칭하며 과장된 기사를 내보내는 데 그리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잡혀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조금 억울한 기사일 것이다. 실제로 한 타임 당 수십 억 원이 오고가는 도박판은 흔하지가 않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말이다.
-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하룻밤에 수백 만 원을 오고가는 판을 휩쓸고 다니게 된다.
타짜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타짜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타짜를 기술자로 설명한다. 허나, 나는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오로지 포커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일명 ‘백지 꾼’ 이라고 통한다.
1년 가까이 높은 승률을 유지한 결과 대충 1억 정도는 넘게 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억이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내게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다.
포커 판이 끝난 다음날 항상 모든 직원에게 피자와 통닭과 돌렸고 저녁에는 또래 애들을 모아서 술파티를 벌였다. 직원들과 또래 아이들은 나의 무용담을 듣고 싶어 했고 아침만 되면 항상 속보 다루듯이 내게 기삿거리를 듣고 가는 게 일수였다. 누가 무엇을 잡고 왜 죽었는지, 최대 배팅은 누가 얼마나 때렸는지, 포커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이런 유치한 무용담은 좋은 얘깃거리가 되는 것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여지껏 도박을 해본 적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도박은 나쁜것이므로 혹시나 도박 중독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다면 힘들겠지만 그곳에 발을 끊기를 바란다. 포커를 하나의 스포츠 문화로 만들어 놓은 미국의 문화가 부럽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그러한 여건이 못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친구들끼리 속된말로 '삥바리' 라는 것을 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파악하기에 포커만한 게임도 없으므로 말이다.
- 쉽게 벌지는 않았지만 너무 쉽게 써버린 젊은 날의 정신 상태에 실망감을 않고 있는 지금의 나를 발견한다.
낮에는 요리를 밤에는 도박을 배웠으며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일주일을 하루 평균 2시간 정도의 수면을 유지한 적도 있었으며 졸면서 칼질을 하다가 손을 베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호박을 가는 기계에 손가락이 말려 들어갈 뻔 했던 적도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장갑이 쉽게 벗겨져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으며, 꽁치 굽는 야끼 바와 찜통에 손가락을 데이는 일은 밥 먹듯이 흔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하루 평균 생선을 수 백 마리 많게는 천 마리 가까이 대가리를 치는데, 막말로 성기뺑이 치는 일이 따로 없다. 실수로 우럭 가시에라도 찔리는 날에는 손가락이 발가락이 되어 있으며 그 붓기로 잠을 설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생선 대가리를 따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생선의 피로 물들어 있는데 그 광경이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온통 피바다 이며 굴러다니는 생선 대가리는 아직 신경이 살아 있어 입을 뻐끔뻐끔 거리고 간혹 도미의 큰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착각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그 일을 한 후로는 살아있는 생명을 일절 죽이지 않았다. 정말로 지나가는 개미도 피해 밟고 가는 경우도 있다. 살아 가면서의 살생을 그 당시에 다 했는 듯하여 앞으로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반성으로 삶을 이어 나갈 것이다.
- 그리고 군대 문제가 닥쳐서 횟집을 그만두게 되었다.
송내역에 작은 월세 집을 구한 뒤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역시 교차로를 뒤져서 방위산업체를 물색한다. 그 당시 나의 마인드는 군대는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돈과 사회경험을 더 쌓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는 현역이었으므로 군대를 안가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방위산업체'
다행이 고등학교 때 따놓은 자격증으로 충분한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는 틀리 게 방위산업체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었다.
정말로 20군데 정도는 다닌 듯하다. 부천의 모든 방위산업체를 다 훑은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 CCTV 제조업체.
내가 처음 이곳에 입사를 했을 당시 회사 규모는 직원 30명 정도의 소규모 회사였었다.
하나, 8년이 지난 지금은 그 10배 규모의 중기업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몇 달 전 코스닥에도 상장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꽤나 전망이 있는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에피소드는 초창기 소기업 일 때의 사장의 횡포, 우리를 거의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를 부리듯이 취급했었던 관리자들, 주말도 없이 강제로 출근해서 수당도 못 받고 일했던 특례시절, 혼자서 수 백 개의 박스를 나르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디스크 치료를 받으면서 일했던 것 등이 있는데 지금은 사장님이 바뀌어서 꽤나 안정된 직장으로 평가 받는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근래로 와서는 제 작년 야간 대를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도 순수 100% 창작품을 만들어 낸 것에 굉장히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었다. 훗날 카지노 사업이 번창하게 되면 내가 만든 기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 날 것이리라 예측을 해본다. 그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었고 교수들도 인정을 했었던 부분이라 졸업작품전에 메인으로 전시를 시켰던바가 있다.
지금까지 지난 10년을 열거 해 보았다.
앞으로 다가 올 10년은 또 어떠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작은 흥분감과 기대감을 몰고 오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그 어떠한 길을 택하더라도 본인이 택한 결정을 최고의 판단이었다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솔솔한 재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상 이곳에 잠시 잃어버린 10년을 잊어버리지 않을 10년으로 만들기 위해 조용히 기록해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