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이박고`s 유석201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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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오늘 습도는 80%까지 오를 전망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채비를 하고 있던 나는 기상캐스터의 습도 예고에 몸이 움찔해진다. '아 오늘은 또 얼마나 더울까?' 출근을 해도 책상 앞에 앉아있는 화이트 컬러를 동경해야만 하는 나는 영업직 회사원이다. 넥타이를 매고 있지만 넥타이를 풀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그런 영업직 사원이다. 오늘도 열대야 예고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서 양복 마이 안에 셔츠가 몸에 얼마나 달라붙을 것인지 기대가 된다.

 

 하루 종일 거래처를 돌아다녔더니 아니나 다를까 녹초가 되었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갑자기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고, 함께 마셔줄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집근처 동네 공원을 찾았다. 이미 열대야 예고에 아예 집을 나와 돗자리를 펴고 누워계신 분들이 많았다. 양복이면 어떠냐 싶은 마음에 나도 그냥 잔디밭에 누웠다. 의외로 시원하다. 한 손에 들려있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잠시 뒤에 한 여자 분이 다가왔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맥주를 마시자고 자신이 사온 맥주를 권한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이 청승맞아 보이기도 했던 터라 은근히 반가운 손님이었다. 여자 분도 한 여름의 더위를 이기지 못해서 밖에 나왔는데 마침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 편의점에서 혼자 마시기엔 좀 많아 보이는 양을 사왔다고 한다. 여러 개를 사야 누군가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는 자신만의 생각에 말이다. 우리는 찌는 듯 한 더위 속에 이런 저런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여자분 또한 직장 생활의 애로 사항과 한 여름에도 부채로 견디며 에어컨을 절대로 틀지 못하게 하는 직장 상사의 뒷담 화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서로 어찌나 이야기가 잘 통하던지 아마도 이 날 밤의 안주는 서로 공감하고 있는 한 여름의 찌는 듯 한 무더위가 아니었나싶다. 술을 부르는 더위라면 말이 될까?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서로의 연애사까지 풀어놓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 길,저 길을 돌며 우회했지만 그래도 결국 결론은 서로가 현재 외로운 솔로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회생활에 심리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했던 나는 술기운에? 아니 더위를 먹은 김에 과감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사귈래요?" ....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녀 또한 술기운에 그랬는지 더위를 먹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녹초가 되어 그리 상쾌해 보이지 않던 내 첫인상을 좋게 받아주었다. 아~이게 웬 한여름 밤의 꿈인가? 나는 지독한 무더위가 가져다준 이 행운이 너무 달콤했다. 우리를 이어준 이 열대야가 이젠 그 무엇보다 시기적절한 연애 환경이 되었다. 우리는 둘 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잔디에 누워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갑자기 어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각! 총각" 아는 엉겁결에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총각! 왜 여기서 이래?" "보기엔 멀쩡하게 생겼는데, 빨리 집에 들어가서 자!"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한 여름 밤 나의 달콤한 연인은 어디로 가고, 내게 호통을 치는 이 아저씨는 또 누구인가? 그런데 이곳에 누웠을 때랑 바뀐 것이 하나가 더 있었다. 날이 밝은 것이다. 아뿔사 ! 그렇다! 노숙을 한 것이다. '아~어제의 일은 그저 한 여름의 밤의 꿈이었던 것인가' 열대야가 가져다 준 일장하몽이었던 것이다. '아~ 남은 것은 잔디의 눅눅함과 마치 물먹는 하마처럼 습기를 다 빨아들인 내 양복뿐이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맥주를 마시고 잠시 누웠을 때가 현실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이다.

 

 "열대야! 너 정말 꿈과 현실, 24시간을 함께 했구나! 이젠 니가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