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바로 인근 지하철역애서 열차를 타고 호국 영령들이 잠들고 숨쉬고 계신 성스러운 국립 대전현충원에 도착했다.
날씨가 덥고, 습했는지, 오전임이 불구하고 필자의 옷은 금새 땀에 젖어 불쾌했지만, 걷는 마음만은 한 걸음 한 걸음 바쁘기만 했다. 바로 오늘은 과거 30여년전 정치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하극상적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그룹을 막기 위해 혼심의 힘을 쏟다, 끝내 막지 못한 바로 장태완 前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의 안장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장태완 육군수도경비사령관 취임식.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도경비사령부 지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장태완 장군은 1931년 9월 13일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고자, 단기장교배출학교인 육군종합학교 11기로 졸업, 소위 임관과 더불어 육군 수도사단에 배치되어,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중령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한국군의 용맹과 위상을 전 세계 만방에 떨쳤고, 귀국하여 5군단 작전참모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육군본부 교육참모차장을 지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발탁으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사령관 취임 한달도 안되어, 12.12신군부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하고, 갖은 수모끝에 1980년 1월 13일자로 강제 예편 당했다. 예편 후, 한국전산증권 사장.회장을 지내고 1994년 첫 직선제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내고, 2000년 민주당 전국구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뜻있는 지인들이 장태완 장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다.
(고인과 인연이 있었던, 김영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있다. 반면 그와 무력대결의 장본인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화는 보이지 않았다. 고인이 돌아가기 전날 사망한 윤필용 전 육군수도경비사령관의 영전에 30여명의 리더를 이끌고 조문하러 온 것에 비하면...)
故 장태완 장군의 유가족과 고인 지기들 그리고 향군 관계자들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의 영결식에서 관이 안장되는 이곳 대전 국립현충원까지 故人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자 왔다. 재향군인회 대표로 박세환 재향군인회장(2야전군 사령관과 국회의원 역임)과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그리고 미망인 이병호 여사와 사위 박용찬님 딸 현리 그리고 손녀들, 그와 생사고락을 했던 전우들 등 많은 분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
(유족 및 많은 이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관이 오기를 학수고대 한 끝에 고인의 관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 2묘역에 도착하자 그를 맞았고, 고인의 안장식은 엄숙하게 치루어졌다. 육군 군악대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이 시대 마지막 용장을 떠나보내서인지 군악대에서 울려 퍼진 진혼곡은 엄숙하고, 필자의 마음을 혼돈속에 빠지게 하였다. 과거 그의 상관 그리고 후임 군 출신들은 참군인의 마지막 모습에 거수 경례하며, 그의 관을 맞았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필자는 감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이 시대 진정한 참군인의 표상이었던지, 감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다만 그의 관이 안장 되는 그 순간까지 엄숙하게 고인의 명복을 빌뿐이었다. 고인이 믿었던 카톨릭의 예식으로 명동성당의 박신언 신부께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박세환 재향군인회장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그리고 유족 대표로 사위 박용찬님의 고인에 대한 추도식이 있은 후, 고인의 안장식이 있었다.
"아이고..이 더운데 더워서리 어찌할꼬..덥고 깝깝할텐데..".
(고인의 미망인 이병호 여사)
(고인의 유가족들이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
(왼쪽부터.고인의 손녀2 그리고 딸 현리)
장태완 장군의 미망인인 이병호 여사는 남편이자 평생지기였던, 장 장군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한 동안 눈물만 흘리다 입관식이 끝나고, 남편을 흙으로 묻는 순간에도.장 장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이고..이 더운데 더워서리 어찌할꼬,,덥고 깝깝할텐데...눈물과 걱정만이 여사님의 얼굴을 뒤덮였다.
(고인의 무덤에 유족들이 흙을 뿌리고, 이제 그는 모든 근심을 버리고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갈 수 있었다.)
다니던 중학교의 음악교사를 그만두고, 평생 직업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이기에.. 12.12라는 큰 사건에 남편의 감금과 그 후, 연이은 시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죽음에 평생의 한으로 남으실 그이기에..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필자는 이병호 여사의 눈물을 애써 외면해 보려고 해도, 외면치 못하고, 그의 아픔을 같이 나누었다.
(안장식이 끝나고,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지인들과 과거 그의 전우들.)
(안장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사위 박용찬님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고인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를 참군의 표상 그리고 불의와 당당히 대결한 진정한 군인 중의 군인이라고 평하였다. 이렇듯,고인은 살아 생전에 권력찬탈을 위한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의 발호를 막고자 응징을 하였고, 끝내 막지 못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 그리고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불행이 자기 책임이라며 책망하는 등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고진감래 자업자득이라는 옛 고사가 있듯, 이들 정치군인들의 말로를 지켜 보셨다. 평생을 직업군인이라는 직책아래 아래로는 일개 사병들에게는 어버이 같은 강직한 군 지휘관으로,위로는 국가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안보를 지킨 그는 僭軍人의 표상이며, 진정한 국가 원로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분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날 남.북이 분단되어 평화와 전쟁 위험이 교차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길이 무엇인지? 군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고인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어느 참군인의 뒤안길...
"따르릉..따르릉.."
느닫없는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덜컥 일어나 확인을 해보니..아뿔싸!!..AM 09:45
필자는 본인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하니 AM 09:47 ...ㅜ.ㅜ"
일어나자마자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바로 인근 지하철역애서 열차를 타고 호국 영령들이 잠들고 숨쉬고 계신 성스러운 국립 대전현충원에 도착했다.
날씨가 덥고, 습했는지, 오전임이 불구하고 필자의 옷은 금새 땀에 젖어 불쾌했지만, 걷는 마음만은 한 걸음 한 걸음 바쁘기만 했다. 바로 오늘은 과거 30여년전 정치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하극상적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그룹을 막기 위해 혼심의 힘을 쏟다, 끝내 막지 못한 바로 장태완 前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의 안장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장태완 육군수도경비사령관 취임식.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도경비사령부 지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장태완 장군은 1931년 9월 13일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고자, 단기장교배출학교인 육군종합학교 11기로 졸업, 소위 임관과 더불어 육군 수도사단에 배치되어,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중령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한국군의 용맹과 위상을 전 세계 만방에 떨쳤고, 귀국하여 5군단 작전참모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육군본부 교육참모차장을 지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발탁으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사령관 취임 한달도 안되어, 12.12신군부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하고, 갖은 수모끝에 1980년 1월 13일자로 강제 예편 당했다. 예편 후, 한국전산증권 사장.회장을 지내고 1994년 첫 직선제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내고, 2000년 민주당 전국구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뜻있는 지인들이 장태완 장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다.
(고인과 인연이 있었던, 김영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있다. 반면 그와 무력대결의 장본인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화는 보이지 않았다. 고인이 돌아가기 전날 사망한 윤필용 전 육군수도경비사령관의 영전에 30여명의 리더를 이끌고 조문하러 온 것에 비하면...)
故 장태완 장군의 유가족과 고인 지기들 그리고 향군 관계자들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의 영결식에서 관이 안장되는 이곳 대전 국립현충원까지 故人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자 왔다. 재향군인회 대표로 박세환 재향군인회장(2야전군 사령관과 국회의원 역임)과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그리고 미망인 이병호 여사와 사위 박용찬님 딸 현리 그리고 손녀들, 그와 생사고락을 했던 전우들 등 많은 분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
(유족 및 많은 이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관이 오기를 학수고대 한 끝에 고인의 관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 2묘역에 도착하자 그를 맞았고, 고인의 안장식은 엄숙하게 치루어졌다. 육군 군악대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이 시대 마지막 용장을 떠나보내서인지 군악대에서 울려 퍼진 진혼곡은 엄숙하고, 필자의 마음을 혼돈속에 빠지게 하였다. 과거 그의 상관 그리고 후임 군 출신들은 참군인의 마지막 모습에 거수 경례하며, 그의 관을 맞았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필자는 감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이 시대 진정한 참군인의 표상이었던지, 감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다만 그의 관이 안장 되는 그 순간까지 엄숙하게 고인의 명복을 빌뿐이었다. 고인이 믿었던 카톨릭의 예식으로 명동성당의 박신언 신부께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박세환 재향군인회장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그리고 유족 대표로 사위 박용찬님의 고인에 대한 추도식이 있은 후, 고인의 안장식이 있었다.
"아이고..이 더운데 더워서리 어찌할꼬..덥고 깝깝할텐데..".
(고인의 미망인 이병호 여사)
(고인의 유가족들이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
(왼쪽부터.고인의 손녀2 그리고 딸 현리)
장태완 장군의 미망인인 이병호 여사는 남편이자 평생지기였던, 장 장군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한 동안 눈물만 흘리다 입관식이 끝나고, 남편을 흙으로 묻는 순간에도.장 장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이고..이 더운데 더워서리 어찌할꼬,,덥고 깝깝할텐데...눈물과 걱정만이 여사님의 얼굴을 뒤덮였다.
(고인의 무덤에 유족들이 흙을 뿌리고, 이제 그는 모든 근심을 버리고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갈 수 있었다.)
다니던 중학교의 음악교사를 그만두고, 평생 직업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이기에.. 12.12라는 큰 사건에 남편의 감금과 그 후, 연이은 시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죽음에 평생의 한으로 남으실 그이기에..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필자는 이병호 여사의 눈물을 애써 외면해 보려고 해도, 외면치 못하고, 그의 아픔을 같이 나누었다.
(안장식이 끝나고,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지인들과 과거 그의 전우들.)
(안장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사위 박용찬님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고인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를 참군의 표상 그리고 불의와 당당히 대결한 진정한 군인 중의 군인이라고 평하였다. 이렇듯,고인은 살아 생전에 권력찬탈을 위한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의 발호를 막고자 응징을 하였고, 끝내 막지 못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 그리고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불행이 자기 책임이라며 책망하는 등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고진감래 자업자득이라는 옛 고사가 있듯, 이들 정치군인들의 말로를 지켜 보셨다. 평생을 직업군인이라는 직책아래 아래로는 일개 사병들에게는 어버이 같은 강직한 군 지휘관으로,위로는 국가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안보를 지킨 그는 僭軍人의 표상이며, 진정한 국가 원로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분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날 남.북이 분단되어 평화와 전쟁 위험이 교차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길이 무엇인지? 군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고인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다시 한번 故 장태완 장군의 영령에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2010년 7월 29일
국립 대전 현충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