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촉촉하게 무더위를 식혀주던 날,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그의 레스토랑에서 기타리스트 안형수(48)씨를 만났다. 투명한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를 기다리는 동안 떨린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동그스름한 얼굴. 예술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을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그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이도 했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단짝 친구 같기도 했으며, 때론 미소를 머금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 촬영도 있다고 해서 급하게 정리하고 나왔다며 늦은 것을 미안해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의 아집이나 독단 같은 단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발소에서 그렸던 나의 꿈
강원도 양구의 시골 마을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매우 가난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동네 이발소에서 일했다. 큰 공간이라고는 이발소와 탁구장 정도가 전부였던 어린 시절, 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접한 클래식 기타 음악에 매료되어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동네 형들을 통해 기타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앞집 사는 형의 낡은 기타를 빌렸어요. 수소문 끝에 일본에서 번역된 기타 교본 복사본들을 구해서 치고 또 쳤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었죠."
그렇게 기타에 빠져 지내던 사춘기 시절, 소년은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고 차례로 중, 고등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힘든 사춘기를 보내고 나서 군대를 다녀온 후, 경기도의 작은 기타 공방에서 기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기타리스트의 꿈을 잊지 않았다. 기타 없이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그는 기타와 관련된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자 했고 공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주에 몰두했다.
꿈을 향한 첫 단추를 끼우다
그는 틈틈이 연습했던 실력으로 1987년 당시 유일한 기타 콩쿠르였던 한국 기타 협회 콩쿠르에 시험 삼아 나갔다가 대상을 수상했다.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그를 눈여겨본 한 심사위원의 권유로 음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기타 만드는 일을 하고, 공부와 기타 연습을 반복하며 1인 3역을 맡았었다면서 힘들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 기타 연주만이 아니라 기타의 세세한 부분들까지 직접 제작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기타를 정말 잘 알게 되었죠. 그 때의 경험이 기타에 대한 시야를 넓혀 준 것 같네요."
그는 이 때 기타 제작소에서 번 돈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요즘에는 거리 음악가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처럼 관대하지 않다면서 자신이 거리의 악사로 활동하며 유학비용을 충당했던 이야기들도 살며시 풀어놓았다. 29살의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꿈에 그리던 스페인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보낸 6년의 시간은 그에게 왕립음악원 수석 졸업이라는 영예를 선물한다.
화려한 삶에 드리운 그림자
스페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데뷔 음반도 내고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된 2001년이었으나 그에게는 가장 힘든 한 해였다고 했다. 기타만을 사랑하여 기타만을 보고 달려온 그의 삶이었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스케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도 피로가 찾아왔다. 손을 많이 사용하는 연주자에게 찾아오는 증세인 포칼 디스토니아(Pocal Distonia). 금난새-유라시안 필과의 협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는 협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 펴지질 않았어요. 기타 연주를 그만두고 제작으로 방향을 돌릴까도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달 정도를 쉬고 나서 그는 어둠 속에서 기타를 다시 잡았다고 했다. 한 음을 치고 나서 손가락이 펴질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또 한 음을 치는 과정을 반복하며 꾸준히 재활을 한 결과 몇 달 뒤에는 간단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난이도 있는 곡들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완전한 회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화제를 돌려 봉사활동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어떻게 알았냐면서 자신의 일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병원에서 가끔 단독 연주회를 연다. 연락이 올 때마다 손수 기타를 들고 병원을 찾아가는 그는 로비나 홀에서 많은 환자들을 모아놓고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직접 병실로 찾아가 연주를 한다.
1대 1 연주회를 했을 때의 첫 환자. 의식도 없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 환자는 기타 연주를 듣고 나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한 손을 의자에 대고 박수를 쳐주었다고 했다. 그 때 느꼈던 감동이 커서 지금도 계속 간다는 그는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반응하지 않던 환자들이 기타 선율을 통해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면서 반복되는 병원 방문에서 늘 그 초심을 잊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대형 연주회는 저 말고도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저는 환자들과 개별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고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꿈이 뭐냐고요?
앞으로의 꿈을 묻는 질문에 그는 꿈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꿈은 없다는 그의 말에 그만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줄 알고 욕심을 내지 않는 순수한 영혼이었고, 때론 여리고 고독한 면도 있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난 한 예술가의 겸손함도 엿볼 수 있었다.
"전 가진 게 별로 없어요. 돈을 벌기 위해 기타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들이 부럽거나 하지도 않아요. 이렇게 기타를 계속 연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하고 충분합니다. 전 단순해서 별 거 없어요. 유치하죠?"
기타 연주를 하지 않을 때는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사원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매주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하거나 꽃꽂이도 하면서 삶을 즐기고 있다는 그.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그의 말에서, 그의 풍부한 미소 속에서 행복이란 진정 이러한 것이어야 함이 배어나왔다.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를 풍기는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좌우명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기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는다며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자신이 기억하는 말로 꼽았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잖아요. 어려운 것도 지나가고 좋았던 것도 지나가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도 힘들어질 때가 있고, 어려운 사람도 밝아질 수 있는 거니까요."
그는 직접 들고 온 기타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짧게나마 즉흥 연주를 들려주었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깨끗한 음색, 연주자의 내면을 통해 전달되는 기타 선율의 깊은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기타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들려주던 기타 연주는 빗소리와 어울려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안형수씨의 기타 연주에서 크고 웅장한 선율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처럼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듯 전해오는 기타의 울림을 느껴본다면 현의 속삭임이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을 딛고 그 상처를 승화시킨 그의 연주는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스스로를 낮출 줄 알고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결코 낮은 이들을 향한 배려심을 잃지 않는 진정한 기타리스트 안형수. 잔잔하고 떨리는 기타 선율만큼이나 그의 삶의 아름다움이 함께 묻어 나오기에 기타소리가 더 아름다운 이유이다.
감미로운 기타 선율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안형수
감미로운 기타 선율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안형수
비가 촉촉하게 무더위를 식혀주던 날,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그의 레스토랑에서 기타리스트 안형수(48)씨를 만났다. 투명한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를 기다리는 동안 떨린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동그스름한 얼굴. 예술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을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그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이도 했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단짝 친구 같기도 했으며, 때론 미소를 머금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 촬영도 있다고 해서 급하게 정리하고 나왔다며 늦은 것을 미안해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의 아집이나 독단 같은 단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발소에서 그렸던 나의 꿈
강원도 양구의 시골 마을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매우 가난했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동네 이발소에서 일했다. 큰 공간이라고는 이발소와 탁구장 정도가 전부였던 어린 시절, 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접한 클래식 기타 음악에 매료되어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동네 형들을 통해 기타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앞집 사는 형의 낡은 기타를 빌렸어요. 수소문 끝에 일본에서 번역된 기타 교본 복사본들을 구해서 치고 또 쳤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었죠."
그렇게 기타에 빠져 지내던 사춘기 시절, 소년은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고 차례로 중, 고등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힘든 사춘기를 보내고 나서 군대를 다녀온 후, 경기도의 작은 기타 공방에서 기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기타리스트의 꿈을 잊지 않았다. 기타 없이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그는 기타와 관련된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자 했고 공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주에 몰두했다.
꿈을 향한 첫 단추를 끼우다
그는 틈틈이 연습했던 실력으로 1987년 당시 유일한 기타 콩쿠르였던 한국 기타 협회 콩쿠르에 시험 삼아 나갔다가 대상을 수상했다.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그를 눈여겨본 한 심사위원의 권유로 음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기타 만드는 일을 하고, 공부와 기타 연습을 반복하며 1인 3역을 맡았었다면서 힘들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 기타 연주만이 아니라 기타의 세세한 부분들까지 직접 제작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기타를 정말 잘 알게 되었죠. 그 때의 경험이 기타에 대한 시야를 넓혀 준 것 같네요."
그는 이 때 기타 제작소에서 번 돈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요즘에는 거리 음악가들에 대한 인식이 예전처럼 관대하지 않다면서 자신이 거리의 악사로 활동하며 유학비용을 충당했던 이야기들도 살며시 풀어놓았다. 29살의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꿈에 그리던 스페인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보낸 6년의 시간은 그에게 왕립음악원 수석 졸업이라는 영예를 선물한다.
화려한 삶에 드리운 그림자
스페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데뷔 음반도 내고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된 2001년이었으나 그에게는 가장 힘든 한 해였다고 했다. 기타만을 사랑하여 기타만을 보고 달려온 그의 삶이었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스케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도 피로가 찾아왔다. 손을 많이 사용하는 연주자에게 찾아오는 증세인 포칼 디스토니아(Pocal Distonia). 금난새-유라시안 필과의 협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는 협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 펴지질 않았어요. 기타 연주를 그만두고 제작으로 방향을 돌릴까도 고민했었어요. 하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달 정도를 쉬고 나서 그는 어둠 속에서 기타를 다시 잡았다고 했다. 한 음을 치고 나서 손가락이 펴질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또 한 음을 치는 과정을 반복하며 꾸준히 재활을 한 결과 몇 달 뒤에는 간단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난이도 있는 곡들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완전한 회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화제를 돌려 봉사활동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어떻게 알았냐면서 자신의 일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병원에서 가끔 단독 연주회를 연다. 연락이 올 때마다 손수 기타를 들고 병원을 찾아가는 그는 로비나 홀에서 많은 환자들을 모아놓고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직접 병실로 찾아가 연주를 한다.
1대 1 연주회를 했을 때의 첫 환자. 의식도 없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 환자는 기타 연주를 듣고 나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한 손을 의자에 대고 박수를 쳐주었다고 했다. 그 때 느꼈던 감동이 커서 지금도 계속 간다는 그는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반응하지 않던 환자들이 기타 선율을 통해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면서 반복되는 병원 방문에서 늘 그 초심을 잊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대형 연주회는 저 말고도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저는 환자들과 개별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고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꿈이 뭐냐고요?
앞으로의 꿈을 묻는 질문에 그는 꿈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꿈은 없다는 그의 말에 그만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줄 알고 욕심을 내지 않는 순수한 영혼이었고, 때론 여리고 고독한 면도 있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난 한 예술가의 겸손함도 엿볼 수 있었다.
"전 가진 게 별로 없어요. 돈을 벌기 위해 기타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들이 부럽거나 하지도 않아요. 이렇게 기타를 계속 연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하고 충분합니다. 전 단순해서 별 거 없어요. 유치하죠?"
기타 연주를 하지 않을 때는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사원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매주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하거나 꽃꽂이도 하면서 삶을 즐기고 있다는 그.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그의 말에서, 그의 풍부한 미소 속에서 행복이란 진정 이러한 것이어야 함이 배어나왔다.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를 풍기는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좌우명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기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는다며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자신이 기억하는 말로 꼽았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잖아요. 어려운 것도 지나가고 좋았던 것도 지나가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도 힘들어질 때가 있고, 어려운 사람도 밝아질 수 있는 거니까요."
그는 직접 들고 온 기타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짧게나마 즉흥 연주를 들려주었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깨끗한 음색, 연주자의 내면을 통해 전달되는 기타 선율의 깊은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기타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들려주던 기타 연주는 빗소리와 어울려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안형수씨의 기타 연주에서 크고 웅장한 선율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처럼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듯 전해오는 기타의 울림을 느껴본다면 현의 속삭임이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을 딛고 그 상처를 승화시킨 그의 연주는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스스로를 낮출 줄 알고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결코 낮은 이들을 향한 배려심을 잃지 않는 진정한 기타리스트 안형수. 잔잔하고 떨리는 기타 선율만큼이나 그의 삶의 아름다움이 함께 묻어 나오기에 기타소리가 더 아름다운 이유이다.
글/사진 샘터 대학생 명예기자 성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