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은 만리구(萬里溝)에서 일본군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 산하 메시노[飯野] 대대(大隊)를 만나 4~5시간 가량 접전(接戰)을 벌인 끝에 약 3백여명의 적병을 살상하고 총기(銃器) 240정을 노획하였다. 이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으며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단독으로 교전을 수행하여 일본군을 대파한 승전(勝戰)이었다.
이 때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10월 21일 새벽 5시에 이도구(二道溝) 지역에 도착하고 척후병을 풀어 일본군의 동태를 탐색하도록 하였다. 척후병들의 철저한 수색 끝에 약 100여명의 일본군 기마대가 천수평(泉水坪)의 민가에서 숙영(宿營)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고개 넘어 8리쯤 떨어진 어랑촌(漁郞村) 일대에는 보병 2개 대대, 기마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여행단(旅行團)을 천수평 입구 양쪽 숲속에 잠복시키고 이민화(李敏華)·한근원(韓根源)·김훈(金勳) 중대(中隊)를 반대편 일본군의 배후에 배치시킨 다음 본대를 이끌고 고개의 능선에 포진했다.
이윽고 아침햇살이 천수평의 산봉우리를 훤히 밝히고 일본군 병사들은 조금도 독립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가롭게 이동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하여 천수평 어귀에 매복했던 이범석의 여행단이 먼저 맹렬한 사격을 개시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혹은 군마(軍馬)에 올라타려고 하고 혹은 엄폐할 장소로 몸을 숨기려고 하였다. 그 때 배후에서 또 다시 독립군의 총탄이 우박처럼 일본군에게 쏟아졌다.
일본군은 총기(銃器)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려고 산정을 향하여 도망치다가 독립군의 사격에 의해 무너졌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독립군의 총공세에 일본군은 대항할 틈도 없이 피주검이 되어 널브러졌다. 일본군 기병 120명 가운데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적군은 단 4명뿐이었다.
“장군님, 이 놈이 장교인 듯합니다.”
중대장 김훈이 사살된 시마다[島田] 중위(中尉)의 시체를 살피다가 계급장을 보고는 김좌진 장군에게 말했다. 그는 시마다 중위의 군복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해 김좌진 장군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독립군의 이동 경로를 예상하여 일본군의 진격 계획을 소상히 기록한 문서였다.
“음, 역시 예상대로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어랑촌으로 행군하라!”
김좌진은 병사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즉각 이동을 명령했다. 이미 날이 밝은 뒤였고 도망친 적군 기마병에 의하여 아군의 위치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에서 도주한 4명의 기마병은 이미 그들의 지휘부에 기병중대의 전몰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적군보다 병력에도 열세였고 화력도 뛰어나지 못한 독립군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투에 유리했다. 김좌진 장군은 적군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안정된 위치에서 적군이 추격해올때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북로군정서는 어랑촌 서남단 고지를 점령하고 일본군과의 격돌을 준비하였다.
아즈마[東正彦] 소장(小將)이 지휘하는 일본군의 주력부대도 같은 생각으로 어랑촌 서남단 고지 쪽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독립군이 높은 지역을 선점한 뒤였다. 아무리 일본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성능 좋은 중화기(重火器)를 지녔다 해도 독립군은 높은 고지에서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응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지형적으로 불리하게 된 쪽은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종일 쉬지 못하고 강행군과 총격전을 병행했던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에게는 체력 고갈이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적진을 향해 군도(軍刀)를 내뻗으면서 장엄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남아로 태어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는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이다. 내 목숨도 이 영광을 위해 죽을 때가 왔다고 판단된다. 제군은 이 전투가 남아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을 자리임을 명심하고 자랑스런 전사를 각오하라! 총구는 조국의 눈이며, 탄환은 민족의 선물이다. 적군을 한명이라도 더 사살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마침내 일본군은 카노우[加納] 기병연대(騎兵聯隊)를 선두로 일제히 고지를 오르며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독립군 병사들은 소총(小銃)·기관총(機關銃)·박격포(迫擊砲)를 쏘면서 수적 우세를 믿고 악착같이 올라오는 일본군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고지 위의 독립군을 향해 야포(野砲) 공격까지 가하며 포위망을 좁혀들었다. 이범석의 군도(軍刀)가 적탄(敵彈)에 맞아 두 동강이 나고 김좌진의 군모(軍帽)는 포탄 파편에 맞아 날아갈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독립군은 죽음을 각오하며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이 때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를 끝내고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행군하고 있던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은 북로군정서가 많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혈전을 치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어랑촌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은 응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사기가 더욱 올라 있는 힘을 다해 일본군을 향해 총격하였다.
★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일본군 3백여명을 살상하다.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바로 옆의 최고 표고(表高)의 고지에 당도하여 일본군의 배후에 맹렬한 공격을 시도했다. 이에 김좌진 부대를 압박하던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방향을 돌려 홍범도 장군의 부대 쪽으로 총부리를 돌리니 일본군의 대열은 둘로 분산되었다.
살펴보면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나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이나 모두 위에서 아래로 총격전을 전개하며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여유롭게 총살했으니 일본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직 병력과 화력에서 독립군보다 우세했으므로 기병대를 보내 천수평의 서·북방능선을 따라 독립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정면에서는 포병과 보병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는 치열해졌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넘을 무렵까지 그칠줄을 몰랐다.
특히 독립군 병사들은 20일부터 전투가 이어지는 고된 상황에서 22일은 종일 굶었으니 체력도 남아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 지역의 민간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먹밥을 만들어 소금을 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군 부대에 공급하였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주먹밥을 쥐던 독립군 병사들은 먹을 사이도 없이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일본군은 이번 기회에 독립군의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켜 한국 식민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반면 독립군도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패배한다면 독립군의 재기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세력이 와해될 것이라는 절박함 때문에 결사항전을 펼쳤다. 북로군정서의 기관총대(機關銃隊)를 이끌던 최인걸(崔認杰)은 복부에 총상을 입자 기관총을 자기 몸에 묶어매고 고지를 내려가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난사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마침내 청산리 일대의 초겨울 짧은 햇빛도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지기 시작하자 독립군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지 못한 채 많은 전사자를 낸 일본군이 패퇴하기 시작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진을 치고 있는 고지 쪽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퇴치하고 다시 부대를 나누어 정돈한 뒤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행군하였다.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는 1920년대 초반 만주에서 벌어진 무력충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튼 전투였다. 또 단일전투로는 독립군이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승전(勝戰)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어랑촌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를 약 3백명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보병 제19사단이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에 제출한 작전보고서에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 나왔다고 일본군의 피해를 매우 축소하여 기록했으며 독립군 측 사상자는 일체 밝히지 않고 기관총 1정, 소총 11정, 탄약 1200발, 쌍안경 1개를 노획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 일본 육군성에서는 10월 22일 봉밀구(蜂密溝)에서 벌어진 전투에 74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조사하였다. 그러므로 앞의 일본군 보고서가 허위(虛僞)의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더욱이 독립군 측 사상자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일본군이 패전(敗戰)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범석은 자신의 저서인「우등불」을 통해 “적군의 연대장을 비롯해 일병(日兵)이 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것이 부지기수(不知基數)”였다고 회고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주차군사령부에 보고할 때마다 독립군을 패퇴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그들이 패전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봉밀구 및 청산리 부근에서 아즈마 지대의 전투 조짐이 있는데, 이 방면에 있는 적도(賊徒)는 김좌진의 지휘하에 있는 군정서의 일파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일단(一團)과를 합하여 기관총 등의 신식병기를 갖고 약 6천명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며, 따라서 다른 방면과 달리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당시 독립군은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를 합쳐 총병력이 2천여명 정도였으며, 일본군은 평소 독립군의 병력을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패배하자 자기네 병력보다 독립군이 월등히 많은 6천여명이라서 패전한 것 같이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인『매일신보(每日申報)』도 1920년 10월 24일자에서 ‘22일의 대격전’이라는 소제목으로 기사를 뽑은 뒤 일본군과 독립군 양편의 사상자가 많았다고 보도하였다. 이범석은 어랑촌전투에서의 독립군의 피해가 가장 많았다고 하면서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우등불」에서 기술하였다. 이 때 싸웠던 일본군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가 며칠 뒤인 27일 아침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승인도 없이 함경북도 무산과 회령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개 중대와 1개 대대 병력을 구원병으로 요청하여 즉시 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즈마 지대가 홍범도 부대 및 김좌진 부대와의 전투에서 많은 인명손실을 입어 독립군 추격의 능력을 상실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어랑촌전투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가 공동으로 아즈마 지대를 맞아 싸워 3백명 이상의 일본군을 살상한 대승전(大勝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4.청산리대첩 ⑷
★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에서 일본군 기병 120명을 전몰시키다.
한편,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총지휘하는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은 만리구(萬里溝)에서 일본군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 산하 메시노[飯野] 대대(大隊)를 만나 4~5시간 가량 접전(接戰)을 벌인 끝에 약 3백여명의 적병을 살상하고 총기(銃器) 240정을 노획하였다. 이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으며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단독으로 교전을 수행하여 일본군을 대파한 승전(勝戰)이었다.
이 때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10월 21일 새벽 5시에 이도구(二道溝) 지역에 도착하고 척후병을 풀어 일본군의 동태를 탐색하도록 하였다. 척후병들의 철저한 수색 끝에 약 100여명의 일본군 기마대가 천수평(泉水坪)의 민가에서 숙영(宿營)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고개 넘어 8리쯤 떨어진 어랑촌(漁郞村) 일대에는 보병 2개 대대, 기마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여행단(旅行團)을 천수평 입구 양쪽 숲속에 잠복시키고 이민화(李敏華)·한근원(韓根源)·김훈(金勳) 중대(中隊)를 반대편 일본군의 배후에 배치시킨 다음 본대를 이끌고 고개의 능선에 포진했다.
이윽고 아침햇살이 천수평의 산봉우리를 훤히 밝히고 일본군 병사들은 조금도 독립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가롭게 이동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하여 천수평 어귀에 매복했던 이범석의 여행단이 먼저 맹렬한 사격을 개시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혹은 군마(軍馬)에 올라타려고 하고 혹은 엄폐할 장소로 몸을 숨기려고 하였다. 그 때 배후에서 또 다시 독립군의 총탄이 우박처럼 일본군에게 쏟아졌다.
일본군은 총기(銃器)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려고 산정을 향하여 도망치다가 독립군의 사격에 의해 무너졌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독립군의 총공세에 일본군은 대항할 틈도 없이 피주검이 되어 널브러졌다. 일본군 기병 120명 가운데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적군은 단 4명뿐이었다.
“장군님, 이 놈이 장교인 듯합니다.”
중대장 김훈이 사살된 시마다[島田] 중위(中尉)의 시체를 살피다가 계급장을 보고는 김좌진 장군에게 말했다. 그는 시마다 중위의 군복 속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해 김좌진 장군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독립군의 이동 경로를 예상하여 일본군의 진격 계획을 소상히 기록한 문서였다.
“음, 역시 예상대로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어랑촌으로 행군하라!”
김좌진은 병사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즉각 이동을 명령했다. 이미 날이 밝은 뒤였고 도망친 적군 기마병에 의하여 아군의 위치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에서 도주한 4명의 기마병은 이미 그들의 지휘부에 기병중대의 전몰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적군보다 병력에도 열세였고 화력도 뛰어나지 못한 독립군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투에 유리했다. 김좌진 장군은 적군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안정된 위치에서 적군이 추격해올때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북로군정서는 어랑촌 서남단 고지를 점령하고 일본군과의 격돌을 준비하였다.
아즈마[東正彦] 소장(小將)이 지휘하는 일본군의 주력부대도 같은 생각으로 어랑촌 서남단 고지 쪽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독립군이 높은 지역을 선점한 뒤였다. 아무리 일본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성능 좋은 중화기(重火器)를 지녔다 해도 독립군은 높은 고지에서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응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지형적으로 불리하게 된 쪽은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종일 쉬지 못하고 강행군과 총격전을 병행했던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에게는 체력 고갈이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적진을 향해 군도(軍刀)를 내뻗으면서 장엄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남아로 태어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는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이다. 내 목숨도 이 영광을 위해 죽을 때가 왔다고 판단된다. 제군은 이 전투가 남아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을 자리임을 명심하고 자랑스런 전사를 각오하라! 총구는 조국의 눈이며, 탄환은 민족의 선물이다. 적군을 한명이라도 더 사살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마침내 일본군은 카노우[加納] 기병연대(騎兵聯隊)를 선두로 일제히 고지를 오르며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독립군 병사들은 소총(小銃)·기관총(機關銃)·박격포(迫擊砲)를 쏘면서 수적 우세를 믿고 악착같이 올라오는 일본군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고지 위의 독립군을 향해 야포(野砲) 공격까지 가하며 포위망을 좁혀들었다. 이범석의 군도(軍刀)가 적탄(敵彈)에 맞아 두 동강이 나고 김좌진의 군모(軍帽)는 포탄 파편에 맞아 날아갈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독립군은 죽음을 각오하며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이 때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를 끝내고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행군하고 있던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은 북로군정서가 많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혈전을 치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어랑촌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은 응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사기가 더욱 올라 있는 힘을 다해 일본군을 향해 총격하였다.
★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일본군 3백여명을 살상하다.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바로 옆의 최고 표고(表高)의 고지에 당도하여 일본군의 배후에 맹렬한 공격을 시도했다. 이에 김좌진 부대를 압박하던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방향을 돌려 홍범도 장군의 부대 쪽으로 총부리를 돌리니 일본군의 대열은 둘로 분산되었다.
살펴보면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나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이나 모두 위에서 아래로 총격전을 전개하며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여유롭게 총살했으니 일본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직 병력과 화력에서 독립군보다 우세했으므로 기병대를 보내 천수평의 서·북방능선을 따라 독립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정면에서는 포병과 보병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는 치열해졌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넘을 무렵까지 그칠줄을 몰랐다.
특히 독립군 병사들은 20일부터 전투가 이어지는 고된 상황에서 22일은 종일 굶었으니 체력도 남아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 지역의 민간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먹밥을 만들어 소금을 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군 부대에 공급하였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주먹밥을 쥐던 독립군 병사들은 먹을 사이도 없이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일본군은 이번 기회에 독립군의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켜 한국 식민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반면 독립군도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패배한다면 독립군의 재기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세력이 와해될 것이라는 절박함 때문에 결사항전을 펼쳤다. 북로군정서의 기관총대(機關銃隊)를 이끌던 최인걸(崔認杰)은 복부에 총상을 입자 기관총을 자기 몸에 묶어매고 고지를 내려가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난사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마침내 청산리 일대의 초겨울 짧은 햇빛도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지기 시작하자 독립군의 거센 저항을 분쇄하지 못한 채 많은 전사자를 낸 일본군이 패퇴하기 시작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진을 치고 있는 고지 쪽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퇴치하고 다시 부대를 나누어 정돈한 뒤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행군하였다.
이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는 1920년대 초반 만주에서 벌어진 무력충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튼 전투였다. 또 단일전투로는 독립군이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승전(勝戰)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어랑촌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를 약 3백명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보병 제19사단이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에 제출한 작전보고서에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 나왔다고 일본군의 피해를 매우 축소하여 기록했으며 독립군 측 사상자는 일체 밝히지 않고 기관총 1정, 소총 11정, 탄약 1200발, 쌍안경 1개를 노획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 일본 육군성에서는 10월 22일 봉밀구(蜂密溝)에서 벌어진 전투에 74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조사하였다. 그러므로 앞의 일본군 보고서가 허위(虛僞)의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더욱이 독립군 측 사상자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일본군이 패전(敗戰)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범석은 자신의 저서인「우등불」을 통해 “적군의 연대장을 비롯해 일병(日兵)이 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것이 부지기수(不知基數)”였다고 회고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주차군사령부에 보고할 때마다 독립군을 패퇴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그들이 패전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봉밀구 및 청산리 부근에서 아즈마 지대의 전투 조짐이 있는데, 이 방면에 있는 적도(賊徒)는 김좌진의 지휘하에 있는 군정서의 일파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일단(一團)과를 합하여 기관총 등의 신식병기를 갖고 약 6천명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며, 따라서 다른 방면과 달리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당시 독립군은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를 합쳐 총병력이 2천여명 정도였으며, 일본군은 평소 독립군의 병력을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패배하자 자기네 병력보다 독립군이 월등히 많은 6천여명이라서 패전한 것 같이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인『매일신보(每日申報)』도 1920년 10월 24일자에서 ‘22일의 대격전’이라는 소제목으로 기사를 뽑은 뒤 일본군과 독립군 양편의 사상자가 많았다고 보도하였다. 이범석은 어랑촌전투에서의 독립군의 피해가 가장 많았다고 하면서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우등불」에서 기술하였다. 이 때 싸웠던 일본군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가 며칠 뒤인 27일 아침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승인도 없이 함경북도 무산과 회령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개 중대와 1개 대대 병력을 구원병으로 요청하여 즉시 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즈마 지대가 홍범도 부대 및 김좌진 부대와의 전투에서 많은 인명손실을 입어 독립군 추격의 능력을 상실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어랑촌전투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가 공동으로 아즈마 지대를 맞아 싸워 3백명 이상의 일본군을 살상한 대승전(大勝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