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의 정점은 주인공 엘리엇이 가족과의 복잡하게 꼬인 문제들과 눈앞에 산적한 현실 문제를 모두 뒤로하고 우드스탁이 열리는 무대를 향해 걸어갈 때다. 우드스탁에 참가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히피의 행렬들과 대마와 자유를 마치 동의어처럼 취급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세상에 각성을 촉구한다. 전쟁과 물질만연주의에 대한 분노가 피어낸 젊은이들의 목소리다. 엘리엇은 이 순간에야 비로써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정체되었던 자신의 내제된 욕망이 이곳에서는 활활이 피어나는 감정을 느낀 엘리엇은 세상을 향해 ‘아름답다!’고 외친다.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재산인 모텔을 넘겨야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디미트리 마틴)은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것을 유치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애를 쓰며,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수천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 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게 된다. 록 페스티벌 소식을 접한 전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다리와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된다.(네이버 영화 발췌)
우드스탁이 열린 1969년은 자연회귀를 주장하는 히피즘이 절정에 다다른 때이다. 베트남전의 참혹한 인명학살과 물질만연주의의 썩은 내가 곳곳에서 드러나던 때, 히피들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연의 그 본질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테이킹 우드스탁>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히피들과 그들이 가진 정신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열렬히 그 혼돈의 순간에서도 자유라는 하나의 이정표를 향해 고생길 마다하고 묵묵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특하고 고마웠다고할까? 설명할 수 없는 맘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드는 것을 보면 내가 참 우드스탁이라는 문화현상 자체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이할만한 점은 어쩌면 가장 미국적일 수 있는 우드스탁을 동양인 감독인 이안 감독이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안 감독은 가장 실제의 우드스탁을 그려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엘리엇의 고향 화이트레이크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난 왜 이안감독이 우드스탁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파산을 막기 위해 고향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엘리엇의 모습은 모습은 가족을 중시하는 동양의 장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모습은 동양의 장남에 대한 의존도와 닮아있다. 이것은 부모님의 봉양과 지역경제의 활성화(부잣집의 장남은 가업을 잇는다.)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저버리고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 속 장남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이런 동양적인 배경이 <테이킹 우드스탁>으로하여금 그 어느 히피를 그린 영화와 달리 이안 감독에게는 가장 적절한 설득력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우드스탁의 문화현상 그 자체에 강한 동경을 품게 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히피의 정신과 문화를 논하기 이전에 가족의 굴레(동양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엘리엇의 모습이 이안 감독에게는 가장 서구적인 우드스탁이라는 의식을 동양인으로 눈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구실 역할을 했으리란 것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동양인이 보통 거부감을 가지는 남(3)보다는 나(1)를 강조하는 히피들의 서구적인 시각에 큰 반감이 없이도 히피의 정신과 우드스탁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은 그의 전작 <아이스 스톰>,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물들은 모두 차오르는 욕망 앞에 윤리적인 사고를 하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불륜과 동성애 앞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욕망은 거세하고, 남루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낸다. 그런 가정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가 이안 영화의 최대의 매력이다. 이안 감독이 출세작 <결혼피로연>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헐리웃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가족이라는 윤리적 딜레마를 설득력있게 그려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테이킹 우드스탁>의 엘리엇 역시 자신의 꿈을 버리고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삶을 살아가는 설정이 이와 비슷한다. 다른 점은 엘리엇이 자신 몰래 돈을 모으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우드스탁의 무대를 향해 걸어가 그곳에서 히피 커플과 대마를 즐기며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때에 있다. 한껏 늘어져 대마를 피우며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엘리엇의 눈은 풀려있는지 몰라도, 눈동자 속 문향들은 행복의 흔적임에 분명하다. 이안 감독은 우드스탁이 가진 자유의 정신과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한국에도 우드스탁의 히피들과 비슷한 청년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대중가요가 지루한 이별과 사랑에 대한 노래로 인기를 끌면서 억압된 사회의 젊은이들은 그들을 표현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맘에 안든 인간의 글에다가 신나게 악플을 달수도 없었던 그들은 꽉 막힌 지배층에게 통기타 하나를 둘러매고는 음악으로 그들을 표출했다.
유신정권의 본격적인 검열이 시작되자 많은 가요 쇼가 폐지되거나 나올 수 있는 가수와 틀을 수 있는 음악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런 문화적인 억압은 가뜩이나 음악을 통해 세상에 많은 갈등을 분출하던 젊은이들을 통기타에 집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들을 수 없는 음악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며 그들은 자신들을 표출해갔다. 특히, 통기타 음악을 중심이 되었던 <음악 감상실>과 살롱문화 그리고 <청 개구리집> 같은 신인음악가 발굴에 힘쓰는 기관들은 청년들을 열광하게 했고, 그들의 저항정신을 본격화시켰다.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들은 더 갈증을 느꼈고, 김민기, 양희은, 조덕배, 권인하 같은 통기타 스타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터진 대마초 사건을 대중음악을 더욱 압박했고, 결국에는 금지곡이라는 규제와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같은 뮤지션을 구속되기 이르렀고, 현재는 명곡이라 불리는 <왜불러>, <고래사냥>, <불꽃>, <아침이슬>같은 곡들은 금지되었다. 그러한 규제는 ‘신중현’이라는 걸출한 뮤지션을 탄생시켰고, 포크에서 락으로 국민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저항이 삶이 되어버린 젊은이들이 신중현의 락을 통해서 그 정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들국화’같은 명가수들의 좋은 음악들이 세상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내지르고, 외치고, 두드리는 ‘락’이라는 음악은 분명 억압되고 정체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제격맞춤이었고, 바야흐로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이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포크음악과 락의 부흥은 우드스탁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자유에 대한 저항과 행복이라는 기본권을 사수하기 위한 사투. 그리고 현재 한국 락의 몰락이 곧 히피가 가졌던 자유 정신의 몰락과 같은 의미는 아닌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많던 히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국의 저항세력은 어디에 숨은 것인가. 경제위기와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자유가 중시되었는지는 몰라도, 저항정신은 약해졌는지 모른다. 오늘도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세상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히피의 정신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이안 감독이 우드스탁을 다시 생생이 극장에 재현시켰던 이유도 바로 이 사라져버린 자유에 대한 회귀 욕구가 아닐까?
<테이킹 우드스탁>내 눈에 비친 히피의 정신
내 눈에 비친 히피의 정신
이안 감독의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의 정점은 주인공 엘리엇이 가족과의 복잡하게 꼬인 문제들과 눈앞에 산적한 현실 문제를 모두 뒤로하고 우드스탁이 열리는 무대를 향해 걸어갈 때다. 우드스탁에 참가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히피의 행렬들과 대마와 자유를 마치 동의어처럼 취급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세상에 각성을 촉구한다. 전쟁과 물질만연주의에 대한 분노가 피어낸 젊은이들의 목소리다. 엘리엇은 이 순간에야 비로써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정체되었던 자신의 내제된 욕망이 이곳에서는 활활이 피어나는 감정을 느낀 엘리엇은 세상을 향해 ‘아름답다!’고 외친다.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재산인 모텔을 넘겨야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디미트리 마틴)은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것을 유치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애를 쓰며,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수천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 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게 된다. 록 페스티벌 소식을 접한 전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다리와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된다.(네이버 영화 발췌)
우드스탁이 열린 1969년은 자연회귀를 주장하는 히피즘이 절정에 다다른 때이다. 베트남전의 참혹한 인명학살과 물질만연주의의 썩은 내가 곳곳에서 드러나던 때, 히피들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연의 그 본질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테이킹 우드스탁>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히피들과 그들이 가진 정신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열렬히 그 혼돈의 순간에서도 자유라는 하나의 이정표를 향해 고생길 마다하고 묵묵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특하고 고마웠다고할까? 설명할 수 없는 맘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드는 것을 보면 내가 참 우드스탁이라는 문화현상 자체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이할만한 점은 어쩌면 가장 미국적일 수 있는 우드스탁을 동양인 감독인 이안 감독이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안 감독은 가장 실제의 우드스탁을 그려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엘리엇의 고향 화이트레이크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난 왜 이안감독이 우드스탁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파산을 막기 위해 고향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엘리엇의 모습은 모습은 가족을 중시하는 동양의 장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모습은 동양의 장남에 대한 의존도와 닮아있다. 이것은 부모님의 봉양과 지역경제의 활성화(부잣집의 장남은 가업을 잇는다.)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저버리고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 속 장남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이런 동양적인 배경이 <테이킹 우드스탁>으로하여금 그 어느 히피를 그린 영화와 달리 이안 감독에게는 가장 적절한 설득력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우드스탁의 문화현상 그 자체에 강한 동경을 품게 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히피의 정신과 문화를 논하기 이전에 가족의 굴레(동양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엘리엇의 모습이 이안 감독에게는 가장 서구적인 우드스탁이라는 의식을 동양인으로 눈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구실 역할을 했으리란 것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동양인이 보통 거부감을 가지는 남(3)보다는 나(1)를 강조하는 히피들의 서구적인 시각에 큰 반감이 없이도 히피의 정신과 우드스탁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은 그의 전작 <아이스 스톰>,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물들은 모두 차오르는 욕망 앞에 윤리적인 사고를 하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불륜과 동성애 앞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욕망은 거세하고, 남루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낸다. 그런 가정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가 이안 영화의 최대의 매력이다. 이안 감독이 출세작 <결혼피로연>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헐리웃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가족이라는 윤리적 딜레마를 설득력있게 그려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테이킹 우드스탁>의 엘리엇 역시 자신의 꿈을 버리고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삶을 살아가는 설정이 이와 비슷한다. 다른 점은 엘리엇이 자신 몰래 돈을 모으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우드스탁의 무대를 향해 걸어가 그곳에서 히피 커플과 대마를 즐기며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때에 있다. 한껏 늘어져 대마를 피우며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엘리엇의 눈은 풀려있는지 몰라도, 눈동자 속 문향들은 행복의 흔적임에 분명하다. 이안 감독은 우드스탁이 가진 자유의 정신과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부러웠는지 모른다.
한국에도 우드스탁의 히피들과 비슷한 청년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대중가요가 지루한 이별과 사랑에 대한 노래로 인기를 끌면서 억압된 사회의 젊은이들은 그들을 표현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맘에 안든 인간의 글에다가 신나게 악플을 달수도 없었던 그들은 꽉 막힌 지배층에게 통기타 하나를 둘러매고는 음악으로 그들을 표출했다.
유신정권의 본격적인 검열이 시작되자 많은 가요 쇼가 폐지되거나 나올 수 있는 가수와 틀을 수 있는 음악들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런 문화적인 억압은 가뜩이나 음악을 통해 세상에 많은 갈등을 분출하던 젊은이들을 통기타에 집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들을 수 없는 음악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며 그들은 자신들을 표출해갔다. 특히, 통기타 음악을 중심이 되었던 <음악 감상실>과 살롱문화 그리고 <청 개구리집> 같은 신인음악가 발굴에 힘쓰는 기관들은 청년들을 열광하게 했고, 그들의 저항정신을 본격화시켰다.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들은 더 갈증을 느꼈고, 김민기, 양희은, 조덕배, 권인하 같은 통기타 스타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터진 대마초 사건을 대중음악을 더욱 압박했고, 결국에는 금지곡이라는 규제와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같은 뮤지션을 구속되기 이르렀고, 현재는 명곡이라 불리는 <왜불러>, <고래사냥>, <불꽃>, <아침이슬>같은 곡들은 금지되었다. 그러한 규제는 ‘신중현’이라는 걸출한 뮤지션을 탄생시켰고, 포크에서 락으로 국민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저항이 삶이 되어버린 젊은이들이 신중현의 락을 통해서 그 정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들국화’같은 명가수들의 좋은 음악들이 세상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내지르고, 외치고, 두드리는 ‘락’이라는 음악은 분명 억압되고 정체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제격맞춤이었고, 바야흐로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이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포크음악과 락의 부흥은 우드스탁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자유에 대한 저항과 행복이라는 기본권을 사수하기 위한 사투. 그리고 현재 한국 락의 몰락이 곧 히피가 가졌던 자유 정신의 몰락과 같은 의미는 아닌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많던 히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국의 저항세력은 어디에 숨은 것인가. 경제위기와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자유가 중시되었는지는 몰라도, 저항정신은 약해졌는지 모른다. 오늘도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세상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히피의 정신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이안 감독이 우드스탁을 다시 생생이 극장에 재현시켰던 이유도 바로 이 사라져버린 자유에 대한 회귀 욕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