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의 정치참여를 통해 본 '정치적 무관심'의 시대

민진201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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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의 정치참여

 

올해 가장 재밌는 영화였던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은 쓸쓸히 산을 내려가는 문성근의 뒷모습으로 장식된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가장 잘 서술하는 결정적 등판이다. 노사모 활동으로 인해 정치냄새가 강하게 나는 정치참여 배우가 되어버린 문성근이 새삼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 관련 보도 자료를 살펴보던 도중 문성근이 씨네21에서 한 인터뷰를 봤다. 그는 “정치적 의사표현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하지만 본업인 배우로서의 실이 많아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배우를 택하겠다.”고 한 자신의 2년 전 발언에 대해 현재로서의 생각을 말했다. 문성근은 “그분은 죽었는데 내가 왜 배우를 하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 싶더라. 내가 배우를 안 하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극우 애들이 민주진영을 지지했던 문화예술인들의 밥줄을 끊겠다고 하는 지금 상황에서 말이다.”하며 배우로서의 정치참여가 어느 정도는 숙명이라고 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다. 배우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정치를 포기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문성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며 참 멋진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그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에 대해 깊게 관여해서 소신 있게 발어하는 그의 모습에서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치적 무관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위대한 배우 문성근은 노사모 활동을 통해 배우로서의 많은 것을 잃었다. 후배 배우들에게 정치참여형 배우로서의 반면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 죽을둥 연기한다는 그의 자세는 무척이나 강렬하다.

 

정치적 무관심

 

문성근이 2년 전 인터뷰에서 잠시나마 배우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을 보이려 했던 것은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탈 정치형 무관심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굴절적 무관심으로도 불리는데, 문성근의 경우 자신이 지지하던 정부가 지탄받는 상태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보수진영이 새로운 집권을 함에 따라 본래 강렬한 정치적 관심이 존재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로 인해 정치적 관심이 얕아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굴절적 무관심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굴절의 원인이 제거되면 다시 정치적 관심이 불붙게 된다. 문성근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그 계기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배우 문성근이 보여주는 정치적 무관심은 건강하다. 이는 자신의 뜻이 분명하고,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무관심은 심각하다.

 

원더걸스도 투표율 하락을 막진 못한다. 미안하다 소희야.ㅠ

 

우리의 무관심

 

이번 6·2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4.5%로 15년 만에 최고 수치라고 한다. 국민의 반 정도가 투표한 것이 15년만의 최대다. 20,30대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이다. 우리의 무관심은 소비형 무관심과 같다.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전문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전체를 깊이 주목하든가 혹은 어느 문제를 사회 전체와의 관련에서 파악하든지 하는 일은 점점 곤란해졌다. 거대한 조직과 기구가 우리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맛보인다. 이러한 거대사회 안에 있어서 우리는 자칫하면 사생활의 도피를 계획한다. 현대사회의 사막 속에서 사생활은 오아시스가 된다. 그래서 사생활에 대한 관심은 사회전체에 대한 무관심과 비례하기에 이른다. 그저 눈앞의 욕망에 충실하고, 정치는 뒷전이 된다. 이것은 내 이익과 불이익의 사이에 관련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회피하는 형태의 무관심으로서, 가장 큰 문제는 전통적인 무관심의 형태가 아닌, 욕구에 충실한 비이성적인 청치참여 형태로서, 회복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20, 30대의 경우 경제난과 취업률의 저하로 인한 불만표출이 컸을 뿐, 그것이 정책에 대한 점검이라든지 시대적 사명과 같은 건강한 정치판단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서서히 끓어오르다 한방에 폭발한다. 자식을 잃고 미친듯 밭일을 하던 김복남(서영희 분)이 뜨거운 태양을 한번 쳐다보고는 무언가를 결심한듯 낫의 시퍼런 날로 가해자, 방관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은 올해의 카타르시스다.

 

 

김복남에 대한 무관심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 된 작품이다. 작은 섬의 김복남은 폭력과 천대의 대우 속에서 십 수 년을 살아온다. 섬에서 도망칠 기회만 찾던 김복남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서울 여자 해원을 통해 구원받으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죽자 복남은 돌아버린다.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 자를 죽인다.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자도 똑같이 처벌한다. 전형적인 처형의 자세로 목을 잘라낸다. 악을 방관한 자 역시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한 자와 같다. 그 칼의 끝은 복남의 딸이 죽는 장면을 보고도 경찰에게 무관심의 행태를 보인 해남에게도 겨누어진다. 해남은 그저 폭력의 고발이 자신에게 오는 이득에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에 복남의 억울함을 증언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악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복남에게 악이 된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소비형 무관심의 전형적인 경우다. 작은 섬을 주 무대로 한 이야기지만, 그건 곧 영화의 마지막 극적으로 목숨을 지킨 해남의 실루엣과 섬이 하나로 겹쳐지며 섬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포개어진다. 전형적인 서울 여자 해남이 악의 주체로 되는 모습을 목격하는 우리는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 그건 비적극적인 정치참여로 인해 소외감을 얻고 있다고 믿고 있는 우리가 곧 폭력을 행사하는 악의 주최가 될 수도 있다는 암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관심의 마이너스면을 강조하는 논자의 말에 의하면 불참가로 인해서 본래 정부가 받아들여 활용하여야 할 국민의 경험이 정부에 의해서 대표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또 지배자는 불참가자의 필요와 이해를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된다. 더욱이 실제문제로서는 이렇게 해서 대표되지 못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은 실은 그 이익이 가장 대표될 필요가 있는 사회적 약자와 빈곤자이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눈 앞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사회적 약자는 정치에 소외되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고 투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관심이 정부의 무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체 현 정부를 비난하는 데만 날카로운 낫을 들고 설친다.  

 

무관심이 곧 악의 축이 되는 시대. 현대사회의 정치적 무관심은 곰곰이 생각해야 할 문제로 다가온다. 한 노배우의 지나칠 정도의 정치참여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과연 우리는 정치에 수수방관하며 무얼 논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