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 굿바이 벤쿠버!

쾌락여행마법사2010.10.04
조회232

 

나는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긴 긴 시간을 화장실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다리가 저리도록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변은... 글쎄.

어느 정도 장을 비웠지만 그다지 시원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을 마친 거 같다는 점이다.

반드시 들러야만 했던 화장실 같은 거다.

비유가 좀 그렇다면.... 다른 뭐가 있을까...

그냥 머릿 속에 화장실 말고는 좀처럼 그럴싸한 비교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화장실이야 아무래면 어떨까,

이제 생활이 되어버린 이곳을 떠나 새롭게 모든 것들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설렌다.

다시 내가 처음으로 간다.

 

나는 영어를 아주 못하는 아이였다.

워낙 형편이 없어서,

BC주 동쪽 끝의 작은 도시 캐슬가의 셀컥컬리지 어학스쿨에 등록할 때도

서울에서 그럭저럭 대학을 다니다 온 놈이라고 좀처럼 믿어주지 않았다.

가장 낮은 레벨의 클래스.

내 밑의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이라곤,

한국말도 좀 서툴었던 형 한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캐나다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봤던 토익점수는 550점.

정말 깜깜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날아와서,

살아남기 위해 제법 용을 썼다.

캐슬가에서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그야말로 암울하고 비탄에 잠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영어선생님이었던 로빈의 한마디는 나를 살렸다.

'너는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곳으로 지금 가야해'

그리고 나는 벤쿠버에서 나름 방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일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 6시까지 인터넷을 하고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서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것이나,
파티에서 넋을 놓고 놀았던 것이나,

한달 용돈을 모두 쇼핑하는 데 날려버리는 등

아주 사소한 일탈 전부가 허락되었다.

조금 더 야만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최대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코 빼먹을 수 없는 아주 매력적인 여인이 하나 있다.

그녀의 이름이 마르티나였던가, 아니면 그 비슷한 무엇.

로브의 베프면서,

소위 말하는 콜걸이면서, 또 트렌스젠더(그녀가 완전히 성을 전환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이기도 한

그녀와의 만남은 벤쿠버에서의 가장 특별한 인연 중 하나라고 해야할 것 같다.

거칠고 야성적이면서 모든면에서 약간 과도한 타입이었던 그녀는

아무것도 내게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녀를 통해 모든 것들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필리핀 출신으로 약간 검은 피부에, 기름기가 많은 얼굴, 비교적 굵은 이목구비, 아주 짙은 화장, 큰 키와 큰 가슴과 긴 머리,

치렁치렁한 장식과 가끔은 마법사나 제사장 같은 느낌의 옷들;

이런 것으로 그녀를 설명하거나 규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헤이, 쏘........"

라면서 항상 내 위아래를 훑어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는

자신이 하는 섹스 스타일과 자신의 손님들에 대해 당당하고 용감하다.

그녀는 아주 전위적이었다.

전위적이라는 것은 사람을 압도하곤 한다.

그녀는 내게 작은 용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번은 그녀가 지난 밤 손님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그 체위와 도구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해주는 게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서 나는 입을 쩍 벌리고만 있었다.

그녀는 최전방 전선에 나가있는 군인이면서,

오지의 통신원이기도 했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나의 스파이기도 했다.

 

 

모든 게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날마다 반짝반짝 거리는 곳.

그건 아마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지 같은 것들을 매번 깨끗하게 씻어주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게 너무 맑다.

하늘도 맑고 바다도 맑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늘어진 그늘도 맑았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되었을까. 

맑은 공기 덕에 뇌까지도 하얗게 탈색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짐을 싼다.

옷, 신발, 가방 따위가 아주 많이 생겼고, 의외로 책다운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몇 통의 편지는 챙기고 몇 통의 편지는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보드를 옮기다가 놓쳐서 룸메이트의 탁자 모서리에 보기 싫은 자국이 생겼다.

보상이 될 턱이 만무하지만, 어쨌든 파렴치한 놈이라는 말을 들을지 겁나

짧은 메모와 함께 50불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파랗고 차가운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캐나다를 떠난다. 다시 한국으로, 어머니께로, 학교로, 친구들에게로;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크다.

'나를 기다려주었을까'

이렇게 묻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내가 그들을 아주 오래 기다려 준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종이를 접는다-서랍을 닫는다-마침표를 찍는다-지퍼를 잠근다-전화를 끊는다-문을 닫는다-컴퓨터를 끈다;

그런 것이다.

이 장을 끝내고 다음 장의 처음으로 가는 거다.

 

Vancou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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