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평화의 집' 장은경의 장호원 어릴 적 장애를 입어 평생 앉아서 산다조막발 창피해 양말도 안 벗고 지냈다지금은 공동체 만들어 가족처럼 산다봉사 오는 사람들 보며 마음을 열었다사통팔달한 장호원처럼 활짝 열었다 입력 : 2010.10.06 23:13 경기도 여주 장호원에는 해발 402m짜리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발 100개를 가진 지네가 살았다는 지네굴이 있기에 이름이 백족산(百足山)이다. 白足山이라고도 한다. 백족산에 구름이 앉으면 장호원 사람들은 임박한 강우(降雨)를 알아차리고 준비를 한다. 백족산은 장호원을 수호하는 산이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 요지 장호원의 길은 백족산 기슭에서 사라진다. 장은경(48)은 그 수호산을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혀 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그 기억 하나뿐이다. 그녀는 걷지 못한다. 소아마비를 방치했다가 어디에선가 떨어져 척추를 다친 이래 그러하다. 가끔 맨발로 거리에 나서는 꿈을 꾸면 장은경은 두렵다. 그녀가 말했다. “조막발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죽도록 창피했다. 늘 양말을 신고 살았다. 집에서도 언니들 잠들면 그제야 기어다니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스피드 스케이터를 꿈꿨던 소녀는 스무 살 넘도록 병원에 누워서 맨발에 가위눌리는 꿈을 꿔야 했다. 그러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고통받는 옆 침대 사람들을 보면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훗날 모교인 부원기술학교 담임선생과 친구들은 이렇게 추억했다. “은경이 너, ‘나보다 불행한 사람 위해 살겠다’고 편지를 보냈었다”라고.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20대 초반 병원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장은경은 올케 언니 권유로 미장원집 한쪽에 가게를 차렸다. 움직일 수도 없되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는, 휠체어 하나 딱 들어가는 공간에서 그녀는 실핀과 레코드판을 팔았다. 어느 날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와 가게에 온 아줌마가 이러는 것이었다. “당신이 정말 부럽다.” 장은경이 말했다. “내가 부럽다니? 자립해서 살고 있으니 자기 아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즉각 결심해버렸다. 양말 벗고 살아도 안 부끄러운 그런 장애인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야겠다고.” 1990년 8월 그렇게 중증장애인공동체 ‘작은 평화의 집’이 탄생했다. 가게 보증금 빼고 빚 1500만원 얹어서 조립식 가건물로 집을 지었다. 그 무렵 가톨릭 사제를 희구하던 청년 최병규가 자원봉사를 왔다. 중학교 때 그녀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가던 아이였다. ‘몸을 파도처럼 흔들며 걷고 기는’ 아이들을 한참 끌어안던 최병규는 며칠 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신부의 길을 거부한 청년은 지금 마흔한 살이 됐다. 장은경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아들이 사제 되길 원했던 홀어머니도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이러구러한 사연으로 평화의 집을 찾아와 장은경과 삼촌과 가족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열다섯 명이다. 2005년 장은경은 10년 넘게 키워온 뇌성마비 소년 대현이를 하늘로 보냈다. 그 사이에 그녀는 어깨 인대가 여섯 군데 찢어지고 근육이 뜯어졌다. 뜯어지고 찢어진 육신이야 고치면 되지만 피폐해진 마음은 고칠 길이 없다. 그렇게 하늘로 간 아이들이 여섯 명이었다. “삼촌 없었으면 나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가 속삭인다.온 가족 먹고 살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선물가게, 피아노 레슨, 서점 기타 등등. 그녀가 일하러 나가면 삼촌 최병규가 집안일을 했고, 다음날은 역할을 바꾸며 20년째 살고 있다. 그 사이에 법이 바뀌었다. 미인가 수용시설은 모두 인가시설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복지사가 필요하고, 영양사가 필요했다. 걷지 못하는 그녀, 지난 8월에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나, 이제부터 밥해주는 아줌마가 되기로 했다. 세상에서 밥 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삼촌 최병규는 복지사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1994년 작은 평화의 집은 후원자들 도움으로 백족산이 바라보이는 어석리로 이사를 했다. 입구에는 버려진 양변기를 모아 꽃을 심어서 담벼락에 도열시켰다. 저 밑바닥을 책임지는 도구가 아름다운 미학으로 변신했다. 왼편으로는 타조, 사슴, 말들이 산다. 가족들을 먹여 살릴 동물들이며 맑되 성장하지 못한 가족들 마음을 보듬을 친구들이다. “나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이기적으로 세상 돌아다니며 잘난 척하고 살았겠지? 조막발 보여주는 게 창피해서, 창피한 사람들 모여 사는 집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이리도 따뜻한 거라. 밥해주고 씻겨주고 놀아주는 사람들, 처음엔 내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저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생기면서 내 마음이 열려버렸다.” 걷지 못하는 여자가 사연 많은 가족들과 함께 마음을 열며 산다. 집 앞 산에는 다리 백 개를 가진 지네가 살았는데, 이 여자는 이 세상에서 딱 한 번 엄마 등에 업혀 산에 오른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어느 틈에 사방에서 천사들이 몰려들었고, 그녀는 마음을 열게 되었다. 사통팔달한 길을 가진 도시 장호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일보에서.... 1
조막박소녀가 사는 법
조막발 창피해 양말도 안 벗고 지냈다
지금은 공동체 만들어 가족처럼 산다
봉사 오는 사람들 보며 마음을 열었다
사통팔달한 장호원처럼 활짝 열었다
입력 : 2010.10.06 23:13
경기도 여주 장호원에는 해발 402m짜리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 발 100개를 가진 지네가 살았다는 지네굴이 있기에 이름이 백족산(百足山)이다.
白足山이라고도 한다. 백족산에 구름이 앉으면 장호원 사람들은 임박한 강우(降雨)를 알아차리고 준비를 한다.
백족산은 장호원을 수호하는 산이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 요지 장호원의 길은 백족산 기슭에서 사라진다.
장은경(48)은 그 수호산을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혀 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그 기억 하나뿐이다.
그녀는 걷지 못한다. 소아마비를 방치했다가 어디에선가 떨어져 척추를 다친 이래 그러하다.
가끔 맨발로 거리에 나서는 꿈을 꾸면 장은경은 두렵다. 그녀가 말했다.
“조막발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죽도록 창피했다. 늘 양말을 신고 살았다.
집에서도 언니들 잠들면 그제야 기어다니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스피드 스케이터를 꿈꿨던 소녀는 스무 살 넘도록 병원에 누워서 맨발에 가위눌리는 꿈을 꿔야 했다.
그러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고통받는 옆 침대 사람들을 보면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훗날 모교인 부원기술학교 담임선생과 친구들은 이렇게 추억했다.
“은경이 너, ‘나보다 불행한 사람 위해 살겠다’고 편지를 보냈었다”라고.
20대 초반 병원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장은경은 올케 언니 권유로 미장원집 한쪽에 가게를 차렸다.
움직일 수도 없되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는, 휠체어 하나 딱 들어가는 공간에서 그녀는 실핀과 레코드판을 팔았다.
어느 날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와 가게에 온 아줌마가 이러는 것이었다. “당신이 정말 부럽다.”
장은경이 말했다. “내가 부럽다니? 자립해서 살고 있으니 자기 아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즉각 결심해버렸다. 양말 벗고 살아도 안 부끄러운 그런 장애인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야겠다고.”
1990년 8월 그렇게 중증장애인공동체 ‘작은 평화의 집’이 탄생했다.
가게 보증금 빼고 빚 1500만원 얹어서 조립식 가건물로 집을 지었다.
그 무렵 가톨릭 사제를 희구하던 청년 최병규가 자원봉사를 왔다.
중학교 때 그녀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가던 아이였다.
‘몸을 파도처럼 흔들며 걷고 기는’ 아이들을 한참 끌어안던 최병규는 며칠 뒤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신부의 길을 거부한 청년은 지금 마흔한 살이 됐다. 장은경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아들이 사제 되길 원했던 홀어머니도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이러구러한 사연으로 평화의 집을 찾아와 장은경과 삼촌과 가족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열다섯 명이다.
2005년 장은경은 10년 넘게 키워온 뇌성마비 소년 대현이를 하늘로 보냈다.
그 사이에 그녀는 어깨 인대가 여섯 군데 찢어지고 근육이 뜯어졌다.
뜯어지고 찢어진 육신이야 고치면 되지만 피폐해진 마음은 고칠 길이 없다.
그렇게 하늘로 간 아이들이 여섯 명이었다. “삼촌 없었으면 나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가 속삭인다.
온 가족 먹고 살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선물가게, 피아노 레슨, 서점 기타 등등. 그녀가 일하러 나가면 삼촌 최병규가 집안일을 했고,
다음날은 역할을 바꾸며 20년째 살고 있다.
그 사이에 법이 바뀌었다. 미인가 수용시설은 모두 인가시설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복지사가 필요하고, 영양사가 필요했다. 걷지 못하는 그녀, 지난 8월에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나, 이제부터 밥해주는 아줌마가 되기로 했다. 세상에서 밥 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삼촌 최병규는 복지사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1994년 작은 평화의 집은 후원자들 도움으로 백족산이 바라보이는 어석리로 이사를 했다.
입구에는 버려진 양변기를 모아 꽃을 심어서 담벼락에 도열시켰다.
저 밑바닥을 책임지는 도구가 아름다운 미학으로 변신했다. 왼편으로는 타조,
사슴, 말들이 산다. 가족들을 먹여 살릴 동물들이며 맑되 성장하지 못한 가족들 마음을 보듬을 친구들이다.
“나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이기적으로 세상 돌아다니며 잘난 척하고 살았겠지? 조막발 보여주는 게 창피해서,
창피한 사람들 모여 사는 집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이리도 따뜻한 거라.
밥해주고 씻겨주고 놀아주는 사람들, 처음엔 내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저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생기면서 내 마음이 열려버렸다.”
걷지 못하는 여자가 사연 많은 가족들과 함께 마음을 열며 산다.
집 앞 산에는 다리 백 개를 가진 지네가 살았는데,
이 여자는 이 세상에서 딱 한 번 엄마 등에 업혀 산에 오른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어느 틈에 사방에서 천사들이 몰려들었고, 그녀는 마음을 열게 되었다.
사통팔달한 길을 가진 도시 장호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