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金宗鎭)은 김좌진(金佐鎭)의 지시에 따라 북만주는 물론이요, 백두산 기슭의 안도현(安圖縣), 장백현(長白縣)·무송현(撫松縣)을 거쳐 화전현(樺甸縣)·화룡현(和龍縣)·연길현(延吉縣)·왕청현(汪淸縣)까지 순방하고 8개월만에 해림(海林)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산시(山市)로 찾아가서 신민부(新民府)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 장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형님, 지금 각지 동포들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생활이 궁핍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지 못한 관계로 미개상태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어떤 동포들은 기아선상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보면 중국인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당하고 지방관청의 박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진아,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김좌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김종진의 설명을 경청했다.
“중국인 지주와 관원들이 우리 동포들을 망국민이라 깔보고 무한정 세도를 부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중국인들은 너무 메마른 땅이라 거들떠 보지도 않던 황무지를 조선인들이 땀과 눈물로 힘들게 일해 옥토로 만들자 그제서야 찾아와서 자기 땅이라며 쫓아내거나 혹은 소작료를 턱없이 올려 동포들의 피를 빨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비 출신의 군벌인 장학량은 조선인 농민들을 억압하는 훈시령과 비밀 지령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중국인 지주들은 마음대로 조선인들의 농토를 가로채거나 수확물을 빼앗고 반동적인 지방 관리들도 그 지주들을 보호하면서 동포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돌아다닌 지역 모두가 그러하더냐?”
“독립군의 힘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는 지역은 그런대로 피해가 적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동포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김좌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치단체를 만들어야 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중국인 지주와 관헌에게 유린당하는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렇지요? 제가 이번 순회에서 느낀 바 역시 그러합니다.”
김종진은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목격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설명했다. 김종진의 보고를 받은 김좌진은 그동안 각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구호만 요란하게 외쳐댔을 뿐 너무도 무기력했음을 깨닫고 통탄했다.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도(大倧敎徒)였고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라 자부하고 있었다. 평생을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며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던 그였다.
독립운동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을때 그 내부에서는 주도권 장악을 위한 암투로 원래의 조직목적은 뒷전에 두고 표면적으로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방해했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도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의 입장에서 통합기구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최호(崔灝)·김돈(金墩)·박관해(朴觀海) 등 민정파(民政派)는 군정파(軍政派)의 우두머리인 김좌진을 ‘독재자’라고 비방하면서 헐뜯었다.
김좌진은 원래 사유재산제도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계급 타파에는 누구보다 앞서서 실천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가 멸망하고 국토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빼앗겼으니 조국 독립부터 먼저 이루고 난 다음에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김좌진의 생각이었다.
김좌진은 조국 독립을 이룬다면 과거와 같이 봉건왕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선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하고 끝까지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항거해야 할 때인데, 아직 나라를 되찾지 못한 민족으로서 계급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선후당착(先後撞着)이요, 혼란만 조장할 뿐이라고 경계하였다. 김좌진은 어느 누구의 주의·주장을 막론하고 먼저 한 덩어리가 되어 일본에게 강탈당한 국토와 주권부터 되찾자는 주장을 하며 통합에 노력했지만, 그의 듯은 관철되지 않고 파벌 싸움으로 골만 깊어지고 있었다.
김좌진은 신민부내의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 단결된 조직체로 운영하자면 먼저 동지들 가운데 중견이 될 만한 핵심 인물들을 이념적으로 새로 결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비치면서 새 정책과 강령을 재삼 검토하여 신민부를 재건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김종진은 적극적으로 무정부주의 노선을 김좌진에게 주창했다.
“형님, 무정부주의는 남을 극단적으로 비방하는 자유주의가 아니고 조직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독재적인 강권을 배격하고 권력의 집중을 거부하며 자치적인 연합적 합의로써 자유연합조직을 통하여 상부상조하자는 정치사상입니다. 공산주의와는 그 이념이 완전히 틀립니다.”
김종진은 무정부주의에 대해 자세한 내역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부분을 덧붙여 이야기했다.
“무정부주의는 공통기조로 하여 그 토대 위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자주적 자치활동을 하는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런 뒤에 동포들의 교육과 훈련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동안 분열이 심했고 동포들에게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신민부를 조선인들이 다 호응하고 어느 특정인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도록 신민부를 재조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신민부내에서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분열로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구상하거나 계획하기 힘들었고 밖에서는 신민부와 김좌진에 대한 모략과 중상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장기간을 끌고 있던 민족유일당운동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신민부는 내부적으로 긴장이 풀려서 존폐의 위기마저 맞게 되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김좌진은 점차 만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맞설 새로운 이념으로 신민부를 개편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석두하자, 해림, 신안진 등에는 유자명(柳子明)·이강훈(李康勳)·김야운(金野雲)·유림(柳林) 등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주 산시를 찾아 김종진의 소개를 받고 김좌진과 만났다. 김좌진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고 또한 깊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수양도 많이 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처음에 자강주의(自强主義)를 내세워 일제의 식민통치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강주의를 고수한다면 결국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다른 약소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강주의는 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며 이를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일제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였고 이를 위하여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대하여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기구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종진은 길림에 간 지 2개월만에 대표적인 한국인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정규(李丁奎)와 유림을 데리고 해림으로 돌아왔다. 산시에서 연락을 받은 김좌진은 해림소학교에 가서 푸짐한 잔치를 열고 이정규와 유림을 초청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 장래를 위하여 술잔을 들면서 독립운동의 확대 문제와 앞으로 추진해야 할 모든 난제들에 대하여 토론을 벌여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김종진이 작성한 보고서를 주제로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논의했다. 사실 김종진의 계획안은 완전무결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만주 땅에 도착하면서 구상했던 방안이라 약간 모순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묘안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담한 구상이었기에 다소의 이견은 있었으나 좋은 방안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안건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문제에 대해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내놓은 방침에 대해 갑론을박으로 시비가 시작되어 결론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에 대하여 무정부주의자인 유림은 “사상은 사상으로만이 막을 수 있으니 공산주의에 맞서려면 그보다 한 걸음 앞선 무정부주의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그러한 유림의 주장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그 동안 우리가 이 지경에 도달하게 된 원인은 제각기의 주의(主義)를 내세우면서 맞섰기 때문이오. 주의는 주의로써 대항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주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고 우리는 다같이 항일투쟁에 힘써 하루 속히 광복을 맞자는 것이 자싱의 염원인 이상에야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목적을 이루는데 전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전체 독립운동자들이 합심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론만 내세워 주의만 주장하고 있다면 무슨 일이 성사되겠소?”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역시 일제 타도를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해왔고 지금도 조국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목표 아래서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민족해방운동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모순된 일이다. 관용하고 포용하여 서로 적대시하는 인식을 갖지 말자는 것이다. 이로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 되었고 앞으로 독립운동 방향도 무력을 길러 일제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결심에서 한 걸음 후퇴하여 이제부터는 모든 민족이 함께하는 독립운동으로 노선을 바꿀 각오가 생겼다.
★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하다.
신민부(新民府)의 중앙집행위원인 황학수(黃學秀)는 김좌진(金佐鎭)과 협의하여 우선 3부의 중견인물들이 극비리에 화합하기로 결론짓고 장소는 신안에 있는 이규동(李圭東)의 거처로 정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3부 대표들을 살펴보면 정의부(正義府)의 김동삼(金東三)·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 신민부의 김좌진·김칠돈(金七敦)·이연(李淵)·송상하(宋尙夏)·황학수·여호림(呂虎林), 참의부(參議府)의 심용준(沈龍俊)·김소하(金篠厦)·임병무(林炳武) 등이 모였다.
그런데 3부 통합을 위한 회의에서도 처음부터 의견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의부와 신민부 측은 3부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하고 촉성회와 협의회간의 대립을 타파하여 만주 일대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행할 것이며 이주 조선인의 귀화를 힘써 시행하여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정의부 측은 만주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을 고집하여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여기에 신민부의 민정파는 또 다시 빈주사변(賓州事變)를 거론하며 군정파를 비판하고 정의부 측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게다가 참의부의 중앙의회 의장 백시관(白時觀), 군사부위원장 마창덕(馬昌德) 등이 김소하에게 일본군의 밀정 노릇을 한 혐의가 있다면서 파견 대표 전원을 소환하겠으니 김소하를 체포하여 처단하라는 요구를 정의부 측에 의뢰하였다.
회의장이 살벌한 변론장으로 변하자, 정의부 측에서는 서로의 대립을 조정해 보려는 대책안으로 재길운동간담회(在吉運動懇談會)를 열어 화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극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안촌내에서도 자리를 자주 옮기며 회의를 열었지만 길림성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는 3부 대표들의 합동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대 정보원 3명과 조선인 밀정 2명을 변장시켜 동상수구(東上水溝)에 잠입시켰다. 그러나 이 자들은 회의장을 지켰던 마을 청년들에게 붙잡혀 생매장당했다. 김동삼이 후환을 고려하여 살려서 돌려 보내라고 했지만 청년들은 말을 듣지 않고 다섯 명 모두 살해했던 것이다.
길림성 영사관 소속 일본 경찰대는 정보원들이 모두 살해되어 돌아오지 않자 중국 길림성 경무청에 전말을 통지하고 신안촌 수색을 의뢰했다. 그러나 경무청에서 근무하던 이인화(李仁華)란 조선인 경찰관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비밀리에 연락을 해주었기 때문에 3부 대표들은 미리 몸을 피하여 위험을 모면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다시 모인 3부통합회의도 무산되고 신민부도 사실상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좌진은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신민부를 해체하기로 결심하고 공문을 통해 해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3부의 병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군정부(軍政府)을 세울 계획이었다. 이에 정의부의 행정위원이던 김동삼도 김좌진의 뜻에 찬동하고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 세력간의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김좌진은 황학수·정신·김종진 등과 더불어 박석현(薄石縣)으로 이동, 호란양창자(呼蘭梁廠子)에서 정의부 출신의 김동삼·김원식·김상덕(金尙德), 참의부를 떠난 김승학(金承學), 공산주의 계열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在中國韓人靑年同盟)에서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하는 최환(崔煥)·김문(金文) 등과 만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민족유일당의 이름으로 동맹규약(同盟規約)을 발표했다. 뜻이 맞는 동지들끼리 모였으니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 때부터 한달이 지난 12월 하순에 이르러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의 촉성회 계열, 참의부의 주류파는 길림에 다시 모여 동맹규약에 기초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민족적 3부 통합이 아니라 부분적인 3부 통합에 불과했다. 신민부의 민정파는 김좌진이 발표한 신민부 해체 선언에 반발하고 있었고,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백시관·계담(桂擔) 등도 이를 거부하면서 그대로 동부(同府)의 존속과 활동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통합돼 구성된 혁신의회도 사실상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면서 1년을 기한으로 하는 과도기적인 단체로서 최종 목적은 군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혁신의회는 임원을 선임했다.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되고 김원식이 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김승학·황학수·정신 등을 비롯한 16명이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민정위원장에 김승학이 각각 임명되었다. 혁신의회는 관할구역을 원래대로 3부의 기존 행정구역에 따라 잠정적인 통치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혁신의회는 대당촉성의 적극적인 방조, 군사력을 정비하여 국내침투를 계획하고 일본군의 침입을 방지, 중국 영토내에서 합법적인 기관을 설치하고 잡무를 처리하는 일 등을 핵심 수행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민족유일당재만촉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열어 군정부 성립에 필요한 요건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벌어지던 시기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대에게 체포되었고, 김소하·김승학·박창식 등도 총하현에서 장학량 휘하의 치안대 병사들에게 붙잡혀 길림성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김좌진·정신·황학수를 비롯한 신민부의 영수급들도 봉천경찰서에 수색·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길림에서 열렸던 3부통합회의가 결렬되자 신민부의 민정파와 정의부의 협의회 지지 세력, 참의부의 심용준 계열은 통일된 자치정부의 구성과 유일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4월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최동오(崔東旿) 등을 중심으로 군정위원회 성격의 국민부(國民府)가 수립되었다. 이 국민부는 촉진회에 대항하면서 3부를 계승하여 만주의 자치행정과 독립운동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로 나뉘어 각자의 실력에 따라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진행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일환으로 3부통합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끝없는 이념 대립과 파벌 싸움으로 실패하고 결국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재편성되어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된 것이었다.
1929년 5월에 중동철도의 소유권을 두고 중국과 소련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진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이것을 구실로 7월 하순에 2천여명의 군경 병력을 중동로 연변에 배치해 ‘누에가 뽕잎 먹듯’ 만주를 잠식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일본군의 불법적인 만주 주둔에 항거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을 모아 대대적인 반일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중국 동북지역의 군벌 세력은 장학량의 지시에 따라 불법적인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전투병력을 급파해 무고한 조선 농민 1백여명을 학살하였다.
이 같은 중동로사건으로 인한 친일군벌 세력의 살인만행은 중국 동북지방의 민중은 물론 조선인들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켜 반일운동을 더 한층 고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동삼과 김좌진이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혁신의회를 발족시켰으나 부득이 해체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었다.
장학량을 위시한 중국 동북지방의 군벌 세력은 자국의 영토를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일제와 야합하여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분멸하려고 노력하였다. 김좌진은 이러한 개탄스럽고 답답한 상황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무이사인 조소앙(趙素昻)에게 편지를 써 보내어 호소한 바 있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7.동방무정부주의연맹과의 합작⑶
★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들과 손잡다.
김종진(金宗鎭)은 김좌진(金佐鎭)의 지시에 따라 북만주는 물론이요, 백두산 기슭의 안도현(安圖縣), 장백현(長白縣)·무송현(撫松縣)을 거쳐 화전현(樺甸縣)·화룡현(和龍縣)·연길현(延吉縣)·왕청현(汪淸縣)까지 순방하고 8개월만에 해림(海林)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산시(山市)로 찾아가서 신민부(新民府)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 장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형님, 지금 각지 동포들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생활이 궁핍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지 못한 관계로 미개상태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어떤 동포들은 기아선상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보면 중국인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당하고 지방관청의 박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진아,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김좌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김종진의 설명을 경청했다.
“중국인 지주와 관원들이 우리 동포들을 망국민이라 깔보고 무한정 세도를 부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중국인들은 너무 메마른 땅이라 거들떠 보지도 않던 황무지를 조선인들이 땀과 눈물로 힘들게 일해 옥토로 만들자 그제서야 찾아와서 자기 땅이라며 쫓아내거나 혹은 소작료를 턱없이 올려 동포들의 피를 빨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비 출신의 군벌인 장학량은 조선인 농민들을 억압하는 훈시령과 비밀 지령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중국인 지주들은 마음대로 조선인들의 농토를 가로채거나 수확물을 빼앗고 반동적인 지방 관리들도 그 지주들을 보호하면서 동포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돌아다닌 지역 모두가 그러하더냐?”
“독립군의 힘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는 지역은 그런대로 피해가 적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동포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김좌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치단체를 만들어야 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중국인 지주와 관헌에게 유린당하는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렇지요? 제가 이번 순회에서 느낀 바 역시 그러합니다.”
김종진은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목격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설명했다. 김종진의 보고를 받은 김좌진은 그동안 각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구호만 요란하게 외쳐댔을 뿐 너무도 무기력했음을 깨닫고 통탄했다.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도(大倧敎徒)였고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라 자부하고 있었다. 평생을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며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던 그였다.
독립운동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을때 그 내부에서는 주도권 장악을 위한 암투로 원래의 조직목적은 뒷전에 두고 표면적으로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방해했던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도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의 입장에서 통합기구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최호(崔灝)·김돈(金墩)·박관해(朴觀海) 등 민정파(民政派)는 군정파(軍政派)의 우두머리인 김좌진을 ‘독재자’라고 비방하면서 헐뜯었다.
김좌진은 원래 사유재산제도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계급 타파에는 누구보다 앞서서 실천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가 멸망하고 국토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빼앗겼으니 조국 독립부터 먼저 이루고 난 다음에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김좌진의 생각이었다.
김좌진은 조국 독립을 이룬다면 과거와 같이 봉건왕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선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하고 끝까지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항거해야 할 때인데, 아직 나라를 되찾지 못한 민족으로서 계급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선후당착(先後撞着)이요, 혼란만 조장할 뿐이라고 경계하였다. 김좌진은 어느 누구의 주의·주장을 막론하고 먼저 한 덩어리가 되어 일본에게 강탈당한 국토와 주권부터 되찾자는 주장을 하며 통합에 노력했지만, 그의 듯은 관철되지 않고 파벌 싸움으로 골만 깊어지고 있었다.
김좌진은 신민부내의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 단결된 조직체로 운영하자면 먼저 동지들 가운데 중견이 될 만한 핵심 인물들을 이념적으로 새로 결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비치면서 새 정책과 강령을 재삼 검토하여 신민부를 재건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김종진은 적극적으로 무정부주의 노선을 김좌진에게 주창했다.
“형님, 무정부주의는 남을 극단적으로 비방하는 자유주의가 아니고 조직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독재적인 강권을 배격하고 권력의 집중을 거부하며 자치적인 연합적 합의로써 자유연합조직을 통하여 상부상조하자는 정치사상입니다. 공산주의와는 그 이념이 완전히 틀립니다.”
김종진은 무정부주의에 대해 자세한 내역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부분을 덧붙여 이야기했다.
“무정부주의는 공통기조로 하여 그 토대 위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자주적 자치활동을 하는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런 뒤에 동포들의 교육과 훈련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동안 분열이 심했고 동포들에게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신민부를 조선인들이 다 호응하고 어느 특정인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도록 신민부를 재조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신민부내에서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분열로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구상하거나 계획하기 힘들었고 밖에서는 신민부와 김좌진에 대한 모략과 중상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장기간을 끌고 있던 민족유일당운동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신민부는 내부적으로 긴장이 풀려서 존폐의 위기마저 맞게 되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김좌진은 점차 만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맞설 새로운 이념으로 신민부를 개편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석두하자, 해림, 신안진 등에는 유자명(柳子明)·이강훈(李康勳)·김야운(金野雲)·유림(柳林) 등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주 산시를 찾아 김종진의 소개를 받고 김좌진과 만났다. 김좌진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고 또한 깊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수양도 많이 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처음에 자강주의(自强主義)를 내세워 일제의 식민통치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강주의를 고수한다면 결국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다른 약소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강주의는 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며 이를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일제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였고 이를 위하여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대하여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기구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종진은 길림에 간 지 2개월만에 대표적인 한국인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정규(李丁奎)와 유림을 데리고 해림으로 돌아왔다. 산시에서 연락을 받은 김좌진은 해림소학교에 가서 푸짐한 잔치를 열고 이정규와 유림을 초청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 장래를 위하여 술잔을 들면서 독립운동의 확대 문제와 앞으로 추진해야 할 모든 난제들에 대하여 토론을 벌여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김종진이 작성한 보고서를 주제로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논의했다. 사실 김종진의 계획안은 완전무결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만주 땅에 도착하면서 구상했던 방안이라 약간 모순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묘안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담한 구상이었기에 다소의 이견은 있었으나 좋은 방안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안건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문제에 대해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내놓은 방침에 대해 갑론을박으로 시비가 시작되어 결론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에 대하여 무정부주의자인 유림은 “사상은 사상으로만이 막을 수 있으니 공산주의에 맞서려면 그보다 한 걸음 앞선 무정부주의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그러한 유림의 주장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그 동안 우리가 이 지경에 도달하게 된 원인은 제각기의 주의(主義)를 내세우면서 맞섰기 때문이오. 주의는 주의로써 대항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주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고 우리는 다같이 항일투쟁에 힘써 하루 속히 광복을 맞자는 것이 자싱의 염원인 이상에야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목적을 이루는데 전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전체 독립운동자들이 합심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론만 내세워 주의만 주장하고 있다면 무슨 일이 성사되겠소?”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역시 일제 타도를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해왔고 지금도 조국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목표 아래서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민족해방운동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모순된 일이다. 관용하고 포용하여 서로 적대시하는 인식을 갖지 말자는 것이다. 이로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 되었고 앞으로 독립운동 방향도 무력을 길러 일제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결심에서 한 걸음 후퇴하여 이제부터는 모든 민족이 함께하는 독립운동으로 노선을 바꿀 각오가 생겼다.
★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하다.
신민부(新民府)의 중앙집행위원인 황학수(黃學秀)는 김좌진(金佐鎭)과 협의하여 우선 3부의 중견인물들이 극비리에 화합하기로 결론짓고 장소는 신안에 있는 이규동(李圭東)의 거처로 정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3부 대표들을 살펴보면 정의부(正義府)의 김동삼(金東三)·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김이대(金履大)·김원식(金元植), 신민부의 김좌진·김칠돈(金七敦)·이연(李淵)·송상하(宋尙夏)·황학수·여호림(呂虎林), 참의부(參議府)의 심용준(沈龍俊)·김소하(金篠厦)·임병무(林炳武) 등이 모였다.
그런데 3부 통합을 위한 회의에서도 처음부터 의견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의부와 신민부 측은 3부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하고 촉성회와 협의회간의 대립을 타파하여 만주 일대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행할 것이며 이주 조선인의 귀화를 힘써 시행하여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정의부 측은 만주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을 고집하여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여기에 신민부의 민정파는 또 다시 빈주사변(賓州事變)를 거론하며 군정파를 비판하고 정의부 측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게다가 참의부의 중앙의회 의장 백시관(白時觀), 군사부위원장 마창덕(馬昌德) 등이 김소하에게 일본군의 밀정 노릇을 한 혐의가 있다면서 파견 대표 전원을 소환하겠으니 김소하를 체포하여 처단하라는 요구를 정의부 측에 의뢰하였다.
회의장이 살벌한 변론장으로 변하자, 정의부 측에서는 서로의 대립을 조정해 보려는 대책안으로 재길운동간담회(在吉運動懇談會)를 열어 화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극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안촌내에서도 자리를 자주 옮기며 회의를 열었지만 길림성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는 3부 대표들의 합동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대 정보원 3명과 조선인 밀정 2명을 변장시켜 동상수구(東上水溝)에 잠입시켰다. 그러나 이 자들은 회의장을 지켰던 마을 청년들에게 붙잡혀 생매장당했다. 김동삼이 후환을 고려하여 살려서 돌려 보내라고 했지만 청년들은 말을 듣지 않고 다섯 명 모두 살해했던 것이다.
길림성 영사관 소속 일본 경찰대는 정보원들이 모두 살해되어 돌아오지 않자 중국 길림성 경무청에 전말을 통지하고 신안촌 수색을 의뢰했다. 그러나 경무청에서 근무하던 이인화(李仁華)란 조선인 경찰관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비밀리에 연락을 해주었기 때문에 3부 대표들은 미리 몸을 피하여 위험을 모면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다시 모인 3부통합회의도 무산되고 신민부도 사실상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좌진은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신민부를 해체하기로 결심하고 공문을 통해 해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3부의 병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군정부(軍政府)을 세울 계획이었다. 이에 정의부의 행정위원이던 김동삼도 김좌진의 뜻에 찬동하고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 세력간의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김좌진은 황학수·정신·김종진 등과 더불어 박석현(薄石縣)으로 이동, 호란양창자(呼蘭梁廠子)에서 정의부 출신의 김동삼·김원식·김상덕(金尙德), 참의부를 떠난 김승학(金承學), 공산주의 계열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在中國韓人靑年同盟)에서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하는 최환(崔煥)·김문(金文) 등과 만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민족유일당의 이름으로 동맹규약(同盟規約)을 발표했다. 뜻이 맞는 동지들끼리 모였으니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 때부터 한달이 지난 12월 하순에 이르러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의 촉성회 계열, 참의부의 주류파는 길림에 다시 모여 동맹규약에 기초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민족적 3부 통합이 아니라 부분적인 3부 통합에 불과했다. 신민부의 민정파는 김좌진이 발표한 신민부 해체 선언에 반발하고 있었고,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백시관·계담(桂擔) 등도 이를 거부하면서 그대로 동부(同府)의 존속과 활동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통합돼 구성된 혁신의회도 사실상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면서 1년을 기한으로 하는 과도기적인 단체로서 최종 목적은 군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혁신의회는 임원을 선임했다.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되고 김원식이 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김승학·황학수·정신 등을 비롯한 16명이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민정위원장에 김승학이 각각 임명되었다. 혁신의회는 관할구역을 원래대로 3부의 기존 행정구역에 따라 잠정적인 통치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혁신의회는 대당촉성의 적극적인 방조, 군사력을 정비하여 국내침투를 계획하고 일본군의 침입을 방지, 중국 영토내에서 합법적인 기관을 설치하고 잡무를 처리하는 일 등을 핵심 수행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민족유일당재만촉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열어 군정부 성립에 필요한 요건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벌어지던 시기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대에게 체포되었고, 김소하·김승학·박창식 등도 총하현에서 장학량 휘하의 치안대 병사들에게 붙잡혀 길림성 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김좌진·정신·황학수를 비롯한 신민부의 영수급들도 봉천경찰서에 수색·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길림에서 열렸던 3부통합회의가 결렬되자 신민부의 민정파와 정의부의 협의회 지지 세력, 참의부의 심용준 계열은 통일된 자치정부의 구성과 유일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4월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최동오(崔東旿) 등을 중심으로 군정위원회 성격의 국민부(國民府)가 수립되었다. 이 국민부는 촉진회에 대항하면서 3부를 계승하여 만주의 자치행정과 독립운동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로 나뉘어 각자의 실력에 따라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진행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 일환으로 3부통합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끝없는 이념 대립과 파벌 싸움으로 실패하고 결국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재편성되어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된 것이었다.
1929년 5월에 중동철도의 소유권을 두고 중국과 소련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진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이것을 구실로 7월 하순에 2천여명의 군경 병력을 중동로 연변에 배치해 ‘누에가 뽕잎 먹듯’ 만주를 잠식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일본군의 불법적인 만주 주둔에 항거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을 모아 대대적인 반일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중국 동북지역의 군벌 세력은 장학량의 지시에 따라 불법적인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전투병력을 급파해 무고한 조선 농민 1백여명을 학살하였다.
이 같은 중동로사건으로 인한 친일군벌 세력의 살인만행은 중국 동북지방의 민중은 물론 조선인들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켜 반일운동을 더 한층 고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동삼과 김좌진이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혁신의회를 발족시켰으나 부득이 해체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었다.
장학량을 위시한 중국 동북지방의 군벌 세력은 자국의 영토를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일제와 야합하여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분멸하려고 노력하였다. 김좌진은 이러한 개탄스럽고 답답한 상황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무이사인 조소앙(趙素昻)에게 편지를 써 보내어 호소한 바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