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지자

j2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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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tax Super program

kodak 200

Photographed by J

 

 

 

우리 헤어지자.

 

싱거울만치 현실감 없는 단어를 또박또박하게 내뱉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나는 놀라웠었다.

 

함께 골랐던 폴로 가디건과 피케 셔츠를 가지런하게 입고

나란히 주문한 핫초코 위의 생크림을 장난스럽게 휘젓던 네 손가락이

우뚝, 멈추는 걸 가만히 바라 보았다.

 

당황한 네가 한참이나 내게 눈을 똑바로 맞추어 오고.

슬픈 얼굴로 테이블 모서리를 응시하다 또다시 내게 눈을 맞추어 오기까지,

퍽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잔이 식을 즈음에서야 그 눈동자가 나를 또렷하게 마주하는데

의지와 상관 없이 마음이 덜컥하고 움직였다.

 

클로즈 타임을 앞둔 텅 빈 커피빈에는 촌스러운 경음악이 시끄럽게 울렸다.

비도 내리지 않고, 우울하고 세련된 배경 음악도 없이

아무래도 형편없는 이별을 하는구나, 하는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히터의 뜨겁고 답답한 바람에 뺨이 생채기가 난듯이 아팠다.

더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백기를 들고 만 것은 이쪽인데

되려 당신이 상처 입은 눈을 하는 것이 못내 불쾌했다.

 

 

너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밤새 내 허리를 껴안고 허겁지겁 뺨을 보다듬고

달뜬 얼굴로 목덜미에 키스를 남기던 너의 그 붉은 입술이

마치 레스토랑 메뉴를 초이스 하듯 건조한 어조로

결혼한 여자가 있다고 말하던 밤이 있었다.

한치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네 지갑을 열어 카드 명세서를 확인하고

네가 잠든 사이 머리맡에 놓인 네 전화의 착발신 목록을 뒤지고

관심에도 두지 않던 네 미니홈피 방명록까지 샅샅이 훑어야 했던 밤이, 내게 있었다.

 

그녀의 흔적은 우스울 정도로 구석구석에서 발견 되었다.

네가 아끼는 셔츠를 꼼꼼하게 다림질 했다는 메시지가 참 귀여웠다.

우리가 자주 들르던 호텔의 스파가 사실은 그녀의 오랜 취미였다는 것부터

몇 달 전 길었던 해외 출장이 결혼식 때문이었다는 것까지 모조리

조금만 의심 했어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뻔뻔하게 담겨져 있던 너의 커플링을 발견하던 날 밤에는 

그동안 행거치프와 타이의 컬러에만 온통 신경을 쏟아 왔던 

멍청하리만큼 행복했던 순간들의 내 자신을

죽도록 비난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긍하려 애써도 도저히 너를 잃을 자신이 없어서,

현실과 타협해 보려고 마음을 누르고 눌러도 네가 지워지지 않아서

배신감으로 눈물 흘릴 시간도 없이 우리가 사랑해 온 순간들을 내세워

구걸하는 기분으로 절박하게 매달렸었다.

 

 

초조했고, 너를 지키고 싶었다.

먼저 사과할 줄 모르던 드센 자존심도 발밑에 짓이기고

조금의 비교도 당하기 싫어 메이크업에 신경을 기울이곤 하였다.

그녀의 연주회에 가지고 갈 꽃다발을 함께 고르고 홀로 돌아 오는 길에는

피아노 학원을 충동적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네가 그녀와의 집으로 귀가하는 날에는

다른 남자와 못하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너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워하며 엉엉 울었다.

 

 

함께 해 온 시간들이 뭐 그리 대수라고,

내가 없어도 건강한 생활이 가능한 너를 잘 아는데도

맹세컨대, 가장 먼저였다.

이렇게 마음이 너덜해질때까지 버티면서도

당신을 보고파 하는 이 마음이, 

한순간도 빠짐 없이 제일 간절했다.

 

 

우리, 헤어지자.

 

아침에 나오는 길에는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고 눈매를 깨끗하게 닦았다.

도망치듯 일어서려는데 손가락 사이로 네 손이 안겨온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부옇게 차오르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