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무언가 하고 싶었던 대학생입니다. 2010년에, 대학생으로서, 내가 전태일을 포함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 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을 때에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 전태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선 전태일이 그토록 분노했던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을 간략히 얘기하겠습니다. 전태일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1.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참혹한 1960~70‘s 평화시장의 노동현실
1960~70‘s 평화시장의 시다는 주로 12~15~17세, 미싱사와 미싱보조는 4000명으로 주로 19~38세의 여공이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안 생계 좀 도와보고자, 동생의 학비를 벌고자 일자리를 찾은 것이다. 재단보조와 재단사가 700명의 남성. 평화시장 일대를 통틀어 80~90%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업주는 좁은 작업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3m 높이를 반으로 잘라 1.5m의 다락방을 만든다. 다락방에선 몸을 바로 펴지 못하고 허리를 구부리고 다녀야 했다. 또 채광이 되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웠고 눈앞에 백열전등으로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었으며 햇살 아래서 눈뜨기도 힘들었다. 뿐 아니라 기름냄새, 땀냄새, 원단더미에선 온 종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옷감을 자르고 재봉할 때마다 쉴 새 없이 풍기는 먼지 속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야 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장 3면이 벽이고 1만 명을 수용하는 평화시장에 환기시설 하나 없었다. 또 2000명 이상의 인원이 변소 3개를 함께 사용했고(1976년까지) 평화시장 400여 공장에 상수도가 세 곳이다. 그마저도 제한급수라 세면도, 물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면 각혈을 토해버린 여공이 손에 묻은 피마저 씻을 곳이 없다)
피복제조업이 얼마나 3D업종인지 말하자면. 종일 허리를 꾸부리고 앉아서 미싱사는 행여 1mm라도 착오가 없도록, 시다는 무거운 다리미를 들고 옷감이 눌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지퍼를 달 때에는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이 빨개져서 누르면 피가 솟아나온다. 아무리 숙련되었다 해도 이렇게 오전 몇 시간을 일하고 나면 예외 없이 어깨와 등허리가 결려오고 손목이 시어서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 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다. 하루 일을 끝내고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다.
아침 8시 출근해 11시 퇴근. 하루 평균 14~16시간이다. 일거리가 밀려 야간작업을 하는 일이 허다했고 심한 경우 사흘을 연거푸 밤낮으로 일했다. 업주들은 잠 안 오는 약이나 주사를 놓아가며 억지로 밤일을 시켰다(그렇게 약을 먹고 2,3일 새어 일하고 나면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휴일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고 여공이 80~90%인데도 생리휴가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요컨대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한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어땠을까? ‘평화시장 여공은 데려가도(결혼) 3년 밖에 못 써 먹는다’는 말이 돌 정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의 모든 노동자가 ①영양실조 ②밥 먹고 소화시킬 여유 없이 곧바로 신경을 쓰는 노동에 시달리니 만성소화불량증, 신경성 위장병 ③잠도 제대로 못자니 몸 전체가 쇠약하고 얼굴이 누렇고 항상 피로함 ④온 종일 먼지구덩이에서 일해 진폐증, 기관지염, 폐결핵 등 각종 호흡기질환 ⑤조명시설이 나빠 시력이 나빠지는 등 각종 눈병(눈꼽 끼는 안질 등) ⑥종일 허리를 못 피고 일을 하니 다리가 붓고 허리, 어깨, 다리에 각종 신경통 ⑦여공들의 경우 월경불순 등 각종 부인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럼, 이런 노동환경에서 그토록 일을 하고 받는 저임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평화시장은 제품을 만들어낸 만큼 임금을 주는 도급제였다. 하지만 제품 1매당 얼마 준다는 합의를 분명히 하지 않고 일을 끝낸 후 업주와 재단사가 적당히 타협해서 임금을 주기 때문에 날 새서 일을 해도 평균월급보다 조금 더 받을 뿐이다. 시다가 한 달에 받는 돈은 1,800~3,000원. 12~17살 여자아이가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받는 하루수당이 고작 70원이다. 차비를 제하고 집안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은 1원하는 풀빵 몇 개로 때우거나 아예 굶으면서 일한다. (미싱사가 되어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가자는 꿈을 꾸지만 미싱사라고 해도 평화시장 8년의 세월과 함께 위에서 봤던 각종 질병이란 질병은 모두 떠안고 평화시장을 떠나게 된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고된 일을 하루 14~16시간 동안 일해서 노동과 합당치 못한 끔직한 저임금을 받고는 병이란 병은 다 떠안고 마는 시다가 평화시장만 4000명, 미싱보조와 미싱사가 4000명이었다.
위에서 보았듯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저렇게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비인간적이고 어깨가 축 쳐질 만큼 암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태일은 이 노동현실 한 가운데, 희망 없는 생을 살고 있는 시다들의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들의 가난과 노동과 억울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을 너무나 뜨겁게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 순수하고 어린 동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2. “불쌍한 내 형제,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 어린 동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전태일이 바친 ‘나약한 나’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을 위해, 원래 힘든 일이었지만 남보다 더욱 고되게 몸을 놀렸다. 시다들이 2층에 부속을 가지러 올 때 기다리는 일 없고, 찾는 일 없도록 잘 정돈해두고 주머니, 후다, 싱 같은 것을 언제든지 풍부하게 잘라두었다.(보통 재단사나 재단보조는 시다들에게 가급적 여러 잔심부름을 시키고 귀찮은 일을 그들에게 미루어버렸는데, 재단보조가 도리어 시다들의 일손을 하나라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비 30원을 털어 풀빵 30개를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2,3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늦게 일이 끝나는 날은 12시 통금시간이 지나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는 그냥 통과시켜 밤 1,2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이것이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 되었다).
또, 한겨울 어머니가 춥지 말라고 주신 잠바를 자신의 작업복보다 얇은 옷을 입고 있다던 재단보조에게 주기도 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편집
전태일은 정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시다들의 임금을 올리자고 하기엔 미싱사로서는 힘이 약해서 재단사(사장과 임금을 타협하는)가 되었고, 사장이 시다들 버릇 나빠진다고 해고하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밤을 지샜다. 평화시장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바보회’를 만들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기위해 설문조사를 하고, 하지만 노동청에선 봐주지도 않았고, 설문조사하는 것을 업주에게 들켜 평화시장에서 ‘바보회’회원들의 입장만 나빠졌다. 평화시장주식회사(시장 내의 경비, 청소, 및 관계관청을 상대로 하는 외부와의 교섭을 도맡아 처리하던 곳. 실질적으로 노동운동을 제약하기 위한 업주들의 대변기관 노릇을 했었다.), 노동청(근로감독관 포함), 업주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가능케 하려고 정경유착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디에 알려도 바뀌지 않자, 근로기준법을 지키고도 장사를 할 수 있음을 증명코자 모범업체 설립의 꿈을 구상했다. 하지만 자본금 3000만원이 필요한 불가능한 꿈이었고 그런 꿈을 꾸는 전태일 역시 황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끝끝내 평화시장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게 되자 임시직이나 공사장 등을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꼭 평화시장에 자주 들러 시다, 미싱사, 재단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의 불쌍한 내 형제,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 어린 동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다시 설문조사를 시도하고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나 역시 또 무시당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조건을 실을 수 있게 되고 노동청에서도 국정감사를 신경써 조치를 취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국정감사가 끝나자 노동청은 입을 싹 닫아버렸고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한다.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데 근로기준법이 있어서 뭐하냐. 이런 쓸데없는 근로기준법 따윈 태워버리자.’
그리고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분신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외쳤던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1970년 초의 전태일 글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의 수기에서(분신자살을 각오했을 때로 추정)
우리가 전태일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시대도 상황도 다르니까요. 전 이글을 쓰면서 모두에게 ‘전태일처럼 살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아직 이 책을 읽고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외면하지 말아야지’라는 것 이외에 어떤 ‘내가 어떻게 살아야 겠다’라는 삶의 방향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무언가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전태일을 알리기로 한 거거든요. 제가 이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도 전태일 이야기를 알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삶의 방향을 찾길 바라서입니다.
올해는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 되는 해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소외되어 갑니다. 비정규직이라는 구조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처지 안에서, 자본주의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상처받고 소외되어 갑니다. 아직 전태일과 우리들이 함께해야 할 소외된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11월 7일 일요일 서울 광장에서 전태일 40주년 기념집회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겠다’라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했지만 노동자대회에 가서 전태일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내가 전태일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습니다. 11월 7일 시청광장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11월 13일, 전태일이 분신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내가 말하고 싶은 것
저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무언가 하고 싶었던 대학생입니다. 2010년에, 대학생으로서, 내가 전태일을 포함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 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을 때에 나와 같은 대학생들에게 전태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선 전태일이 그토록 분노했던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을 간략히 얘기하겠습니다. 전태일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1.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참혹한 1960~70‘s 평화시장의 노동현실
1960~70‘s 평화시장의 시다는 주로 12~15~17세, 미싱사와 미싱보조는 4000명으로 주로 19~38세의 여공이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안 생계 좀 도와보고자, 동생의 학비를 벌고자 일자리를 찾은 것이다. 재단보조와 재단사가 700명의 남성. 평화시장 일대를 통틀어 80~90%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업주는 좁은 작업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3m 높이를 반으로 잘라 1.5m의 다락방을 만든다. 다락방에선 몸을 바로 펴지 못하고 허리를 구부리고 다녀야 했다. 또 채광이 되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웠고 눈앞에 백열전등으로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었으며 햇살 아래서 눈뜨기도 힘들었다. 뿐 아니라 기름냄새, 땀냄새, 원단더미에선 온 종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옷감을 자르고 재봉할 때마다 쉴 새 없이 풍기는 먼지 속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야 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장 3면이 벽이고 1만 명을 수용하는 평화시장에 환기시설 하나 없었다. 또 2000명 이상의 인원이 변소 3개를 함께 사용했고(1976년까지) 평화시장 400여 공장에 상수도가 세 곳이다. 그마저도 제한급수라 세면도, 물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면 각혈을 토해버린 여공이 손에 묻은 피마저 씻을 곳이 없다)
피복제조업이 얼마나 3D업종인지 말하자면. 종일 허리를 꾸부리고 앉아서 미싱사는 행여 1mm라도 착오가 없도록, 시다는 무거운 다리미를 들고 옷감이 눌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지퍼를 달 때에는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이 빨개져서 누르면 피가 솟아나온다. 아무리 숙련되었다 해도 이렇게 오전 몇 시간을 일하고 나면 예외 없이 어깨와 등허리가 결려오고 손목이 시어서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 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다. 하루 일을 끝내고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다.
아침 8시 출근해 11시 퇴근. 하루 평균 14~16시간이다. 일거리가 밀려 야간작업을 하는 일이 허다했고 심한 경우 사흘을 연거푸 밤낮으로 일했다. 업주들은 잠 안 오는 약이나 주사를 놓아가며 억지로 밤일을 시켰다(그렇게 약을 먹고 2,3일 새어 일하고 나면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휴일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고 여공이 80~90%인데도 생리휴가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요컨대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한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어땠을까? ‘평화시장 여공은 데려가도(결혼) 3년 밖에 못 써 먹는다’는 말이 돌 정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의 모든 노동자가 ①영양실조 ②밥 먹고 소화시킬 여유 없이 곧바로 신경을 쓰는 노동에 시달리니 만성소화불량증, 신경성 위장병 ③잠도 제대로 못자니 몸 전체가 쇠약하고 얼굴이 누렇고 항상 피로함 ④온 종일 먼지구덩이에서 일해 진폐증, 기관지염, 폐결핵 등 각종 호흡기질환 ⑤조명시설이 나빠 시력이 나빠지는 등 각종 눈병(눈꼽 끼는 안질 등) ⑥종일 허리를 못 피고 일을 하니 다리가 붓고 허리, 어깨, 다리에 각종 신경통 ⑦여공들의 경우 월경불순 등 각종 부인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럼, 이런 노동환경에서 그토록 일을 하고 받는 저임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평화시장은 제품을 만들어낸 만큼 임금을 주는 도급제였다. 하지만 제품 1매당 얼마 준다는 합의를 분명히 하지 않고 일을 끝낸 후 업주와 재단사가 적당히 타협해서 임금을 주기 때문에 날 새서 일을 해도 평균월급보다 조금 더 받을 뿐이다. 시다가 한 달에 받는 돈은 1,800~3,000원. 12~17살 여자아이가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받는 하루수당이 고작 70원이다. 차비를 제하고 집안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은 1원하는 풀빵 몇 개로 때우거나 아예 굶으면서 일한다. (미싱사가 되어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가자는 꿈을 꾸지만 미싱사라고 해도 평화시장 8년의 세월과 함께 위에서 봤던 각종 질병이란 질병은 모두 떠안고 평화시장을 떠나게 된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고된 일을 하루 14~16시간 동안 일해서 노동과 합당치 못한 끔직한 저임금을 받고는 병이란 병은 다 떠안고 마는 시다가 평화시장만 4000명, 미싱보조와 미싱사가 4000명이었다.
위에서 보았듯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저렇게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비인간적이고 어깨가 축 쳐질 만큼 암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태일은 이 노동현실 한 가운데, 희망 없는 생을 살고 있는 시다들의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들의 가난과 노동과 억울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을 너무나 뜨겁게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 순수하고 어린 동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2. “불쌍한 내 형제,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 어린 동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전태일이 바친 ‘나약한 나’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을 위해, 원래 힘든 일이었지만 남보다 더욱 고되게 몸을 놀렸다. 시다들이 2층에 부속을 가지러 올 때 기다리는 일 없고, 찾는 일 없도록 잘 정돈해두고 주머니, 후다, 싱 같은 것을 언제든지 풍부하게 잘라두었다.(보통 재단사나 재단보조는 시다들에게 가급적 여러 잔심부름을 시키고 귀찮은 일을 그들에게 미루어버렸는데, 재단보조가 도리어 시다들의 일손을 하나라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비 30원을 털어 풀빵 30개를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2,3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늦게 일이 끝나는 날은 12시 통금시간이 지나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는 그냥 통과시켜 밤 1,2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이것이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 되었다).
또, 한겨울 어머니가 춥지 말라고 주신 잠바를 자신의 작업복보다 얇은 옷을 입고 있다던 재단보조에게 주기도 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편집
전태일은 정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시다들의 임금을 올리자고 하기엔 미싱사로서는 힘이 약해서 재단사(사장과 임금을 타협하는)가 되었고, 사장이 시다들 버릇 나빠진다고 해고하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밤을 지샜다. 평화시장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바보회’를 만들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기위해 설문조사를 하고, 하지만 노동청에선 봐주지도 않았고, 설문조사하는 것을 업주에게 들켜 평화시장에서 ‘바보회’회원들의 입장만 나빠졌다. 평화시장주식회사(시장 내의 경비, 청소, 및 관계관청을 상대로 하는 외부와의 교섭을 도맡아 처리하던 곳. 실질적으로 노동운동을 제약하기 위한 업주들의 대변기관 노릇을 했었다.), 노동청(근로감독관 포함), 업주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가능케 하려고 정경유착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디에 알려도 바뀌지 않자, 근로기준법을 지키고도 장사를 할 수 있음을 증명코자 모범업체 설립의 꿈을 구상했다. 하지만 자본금 3000만원이 필요한 불가능한 꿈이었고 그런 꿈을 꾸는 전태일 역시 황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끝끝내 평화시장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게 되자 임시직이나 공사장 등을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꼭 평화시장에 자주 들러 시다, 미싱사, 재단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의 불쌍한 내 형제,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 어린 동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다시 설문조사를 시도하고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나 역시 또 무시당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조건을 실을 수 있게 되고 노동청에서도 국정감사를 신경써 조치를 취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국정감사가 끝나자 노동청은 입을 싹 닫아버렸고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한다.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데 근로기준법이 있어서 뭐하냐. 이런 쓸데없는 근로기준법 따윈 태워버리자.’
그리고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분신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외쳤던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1970년 초의 전태일 글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의 수기에서(분신자살을 각오했을 때로 추정)
우리가 전태일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시대도 상황도 다르니까요. 전 이글을 쓰면서 모두에게 ‘전태일처럼 살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아직 이 책을 읽고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외면하지 말아야지’라는 것 이외에 어떤 ‘내가 어떻게 살아야 겠다’라는 삶의 방향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무언가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전태일을 알리기로 한 거거든요. 제가 이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도 전태일 이야기를 알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삶의 방향을 찾길 바라서입니다.
올해는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 되는 해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소외되어 갑니다. 비정규직이라는 구조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처지 안에서, 자본주의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상처받고 소외되어 갑니다. 아직 전태일과 우리들이 함께해야 할 소외된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11월 7일 일요일 서울 광장에서 전태일 40주년 기념집회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겠다’라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했지만 노동자대회에 가서 전태일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내가 전태일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습니다. 11월 7일 시청광장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가실 분은 연락부탁드릴게요!ㅎㅎ!!함께가요!!
제가 지금..ㅠ 핸드폰을 분실한 상태이고.. 내일 새로 개통을 할건데..
일단은 같이가는 분의 번호를 남길게요!!ㅠㅠ
봉인권 010 2366 2412
('세상에 도전하는 대학희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