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김명기200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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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나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금방이라도 분해 되어 쏟아질 것 같이 낡은 자동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을 때, 한동안 나와 잘 알고 지냈지만 이제는 서로 불편해져서 만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화그림처럼 한 덩어리로 뭉그러진 군중 속에서 몇 몇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여서 한결 같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한 목조건물 일층의 유리창안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그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지금까지 나와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100%의 타인이 되어 내가 마음속으로 온당하지 못하다는 불편함을 들어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끔씩 나를 바라보는 그들은 시선은 차갑고, 길로틴의 칼날위에 쏟아지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개미떼에게 물어뜯기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희고 느린 굼벵이처럼, 나는 완전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였다. 말없이 양쪽 눈썹의 꼬리를 낮게 드리운 채, 당신의 눈동자에서는 반짝이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슬픈 눈물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세수라도 하듯이 얼굴을 쓸었다. 비누냄새, 치약냄새, 스킨로션의 냄새, 당신의 에스떼로더. 지나간 시간의 복잡한 향기들이 얽혀 있었다.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으면 천둥치는 밤에도 무섭지 않아요.”


폭풍우가 심한 밤이면, 당신은 풀잎처럼 바스락거리면서 내게 안겨왔다. 내가 없을 때면 늘 안고 자던 그 커다란 곰 인형처럼, 머리를 조금 흔들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눈도 뜨지 않고 천연스런 얼굴로 내 목 언저리에 조금 더 깊숙이 안겨오곤 했다.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당신을 안고, 당신의 중심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당신의 따듯한 이마에 코를 대고 당신의 향기를 영혼 깊숙이 빨아들이곤 했었다. 나는 내 품에서 잠든 당신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깊은 한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천둥이 심한 오늘 밤, 당신은 어깨를 흠칫거리지 않고 편안한 잠을 이루고 있을까? 비바람이 심한 밤이면 나는 아직도 당신의 향기를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공허한 밤, 공허한 들녘, 공허한 두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빗방울은 홀로그램처럼 잔영만 남아있는 사내를 통과하여, 심장을 조각조각 갈라놓는다. 이런 것은 저주다.


꿈속의 나는, 어딘가 외딴집에서 홀로 잠에서 깨었다. 어두운 들녘의 멀고 먼 곳에서 몇 번이고 번개가 거칠게 땅에 내려앉았다.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번갯불에 비친 새파란 실루엣의 잔상이 사라지자, 이윽고 먹물 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잠시 후 나는 꿈속에서 현실로 깨어났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알지 못할 외딴 곳에 홀로 깨어났고, 당신의 향기가 어두운 공간을 떠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정말 꿈이었으면, 하는 그런 꿈에서 다행스럽게 깨어난 것이다.


오전 1시 7분. 빗소리는 드럼 독주처럼 지붕을 두드리고, 해변의 짙은 안개처럼 그리움이 몰려왔다.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 위에 깔린 어둠 속에 앉아 다시 한번 얼굴을 쓸었다. 거친 손바닥에서 메마른 담배 향기가 났다. 매일 다가오는 이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전의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이기도 했다.


잠시 비가 멎었다. 빗소리가 떠난 자리에는 적막이 밀려든다. 귀퉁이가 낡아 노랗게 퇴색한 케이스에서 L.P.를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지직! 거리는 잡음과 함께 낡은 노래, Chet Atkins의 애잔한 기타 연주로 An old fashioned love song 이 들려온다. 엎드린 자는 엎드린 채로, 누운 자들은 누운 채로 잠이 든다. 그러나 가슴에 공허한 추억을 담아 둔 자는 어떤 모습으로도 잠들지 못한다. 나는 다른 생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이 진공의 공간에, 초음파 사진의 태아와 같은 모습으로 침대위의 사막에 버려져 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밤이다. 그러나 아무 곳으로도 떠날 수 없다. 혹시 무작정 떠난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당신으로 인하여, 거대한 달팽이집속으로 언제까지고 빙글빙글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내게 걸려있는 이 저주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과 그리움 속에서 맴도는 어지러운 밤. 잠시 멎었던 비는 다시 자박거리며 들녘을 지난다.


문을 열고 테라스에 나가 섰다. 검은 하늘에서 날아온 차가운 빗방울이 표창처럼 얼굴을 때렸다. 잠깐사이 안경이 비에 젖었다. 먼 곳에서 달려온 전깃줄이 비에 젖고,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무생물의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깊은 밤, 세상에는 비가 내리고 나는 구천의 일상을 정리하지 못한 유령처럼, 아직 잠들지 못한다. ‘당신도 비 오는 한밤에 깨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을까?’ 비 오는 한밤에 깨어나 이런 쓸쓸하고 어리석은 의문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랑에 관한 어떤 매뉴얼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들 재빨리 사랑에 빠지라고 강요할 뿐이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였던 오직 한 사람, 당신은 잠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열한 고독을 내게 주었다. 장마 비에 눅눅해져버린 티슈처럼, 그리움은 비를 타고 가슴에 스며든다. 이러려고, 당신의 눈물만을 기억하려고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는데...



들녘의 고요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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