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관을 계승·옹호하는 한국주류사학의 이적사가(利敵史家)들 (3)

개마기사단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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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각 성(省) 박물관에 가 보면 큰 지도가 붙어 있다. 그 지도에는 예외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 끝을 한반도 깊숙한 황해도까지 연결해놓았다.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굳이 만리장성을 구경하러 중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 관광단처럼 만리장성 관광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북한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다는데 굳이 중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유사(有史) 이내 수천년간 한반도 내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했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많은 글을 남겼던 조선의 문인(文人)들도 조선 땅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시(詩)나 기행문(紀行文)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견해를 담고 있는『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그려놓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중국 고대 한나라[漢國]가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의 중심지가 낙랑군(樂浪郡)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나머지 군(郡)들도 대체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장을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사기(史記)』「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일제식민사학자(日帝植民史學者)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다. 이는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적 뿌리가 일제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임을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가자 정부가 만든 기구가 고구려사연구재단(高句麗史硏究財團)과 이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홈페이지)의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은 고조선에 대해서 “기원전 3~2세기 준왕(準王) 대(代)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도읍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기술(記述)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실제로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는 중국사의 영역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가 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수세적 방어네 나서야 할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만든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成縣)=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 설(說)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이런 문제점을 외면한 채 해방 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국 주류사학계의 뿌리도 일제식민사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준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국익을 위해 동북공정을 주장한다. 한국 학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위해 동북공정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일까? 그들은 이런 이론이 실증(實證)으로 찾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반대쪽의 실증이 더 많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하는가?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이 맞다고 생각하는 학자라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기구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 그 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적하라고 설립된 기구이지, 동북공정에 동조하라고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 개인의 학문적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낙랑군 평양 설치설’의 신봉자라면 개인 연구소를 차려 연구를 심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가기관에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와 반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三國史記)』초기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主流史學系)의 정설(定說)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韓國古代史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南滿州鐵道會社)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등의 저서에서 소우키치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樂浪郡)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우키치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사기』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며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과장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8·15 광복 후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고 비판해왔고 강단사학자들은 이들을 실증은 없이 주장만 있는 비전문가들이라고 비판해왔다. 같은 사(史)자를 쓰지만 양 진영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 사(史)에 대한 양자의 출발선이 전혀 다른 탓이다. 어느 진영에 속하든 해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 곧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다. 총론으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비판이니 타율성론(他律性論) 비판이니 하는 식으로 식민사학을 비판했지만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듯이 각론은 식민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는 비판은 상당 부분 한국의 주류 사학계가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한국 주류 사학계의 뿌리를 캐봐야 한다.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老論史觀)이다. 이 두 사관의 뿌리는 같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상당수 인사는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병탄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식민지 시대에도 지배계층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가문 출신 중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 전파에 일조했고 이들이 8·15광복 이후에도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한 결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요 관점이 된 것이다.

 

이율곡(李栗谷)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孝宗) 군왕의 북벌정책(北伐政策)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북벌론(北伐論)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正祖毒殺)의 혐의를 받는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정조의 우당(友黨)인 것처럼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민족해방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역사학적(反歷史學的) 명제가 지배해왔다.

 

현대사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지만 객관성은 역사학자의 양식과 연구 자세의 문제일 뿐 시기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거듭된 공격을 받는 것 자체가 고대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현대사는 비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사학의 숨은 의도였던 것처럼 현대사 연구를 금지한 속내 역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 연구 금지론’에 따라 역사학자들이 반일독립운동사를 외면하다 보니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쓸쓸하게 죽어갔고 동시에 반일독립운동사의 1차 사료도 사라졌다. 지금은 반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 해도 대부분 사망해 생생한 증언을 들을 방법이 없다.

 

이 네 가지 문제는 한 꿰미에 꿰어진다.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노론사관(老論史觀)에 의한 조선후기사(朝鮮後期史) 서술’,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에 의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 말살’은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8·15광복 이후에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행세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두 사관(史觀)의 소유자들이 한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다 보니 국가에서 어떤 역사학 연구 관련 기구를 만들어도 결국은 이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적하라고 만든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 누리집에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이 ‘올바른 역사’란 명목으로 버젓이 오르는 이상 현상이 필연적 귀결이 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이제 전혀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侵略史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閉鎖史觀)으로 두 사관이 사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적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적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始發點)은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지사(志士)는 1929년에 출간된『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통해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꼭 다 옳은 것이 아니지만 자기는 꼭 옳은 줄로 확신하는 것이라야 세상에 공포(空包)할 용기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단재가 확신을 갖고 세상에 공포한 많은 논설들은 식민사관과 대척점(對蹠點)에 있기에 현재 방치되어 있다. 몸은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 곧 정신도 해방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커진 몸집에 맞는 큰 정신을 가진 성숙한 대한민국이 절실할 때다.

 

2009년 8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溢) 기(記)

 

 

2. 낙랑군(樂浪郡)은 과연 평양(平壤)에 있었는가?

 

ⓐ 낙랑군 유적으로 조작된 고구려 유적

 

대동강(大同江) 일대를 낙랑군(樂浪郡) 지역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기관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다. 1906년에 문을 연 만철(滿鐵)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한 일제(日帝)의 전위조직이었다. 만철은 1907년 동경제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년~1942년]에게 만선역사지리(滿鮮歷史地理)를 편찬해달라고 요청했고, 구라키치는 츠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 조사를 맡겼다. 소우키치는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지리를, 히로시는 조선시대의 역사지리를 담당했는데 그렇게 편찬된 책이『만선역사지리연구(滿鮮歷史地理硏究)』다. 만선(滿鮮)이란 제목 자체가 조선 역사는 중국의 재만(在滿) 변경 민족의 한 부분이라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이 창안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을 그대로 반영했음을 말해준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는 1906년 도쿄대학교 공대의 세키노[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石巖洞) 고분을 비롯한 평양 일대의 전축분(塼築墳)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 명칭이 ‘고구려 고적(古蹟) 조사사업’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때만 해도 이 일대의 유적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수천년 동안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1909년 도쿄대학교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등장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류조는 만철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樂浪時代) 고적 조사사업’을 수행했다. 그는 1910년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한식(漢式) 기와를 근거로 이 일대를 낙랑군으로 비정하는 논지의 글을 발표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리이 류조가 총독부에 ‘고구려 고적 조사사업’을 ‘한 낙랑시대 고적 조사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한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고구려 유적’은 ‘한 낙랑군 유적’으로 재창조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역사를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만들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총독부는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하고, 그 위치를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작업에 조직적으로 뛰어들었다.

 

세키노는 조선총독부의 이런 방침을 알고 나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바꾸는 작업에 적극 가담했다. 총독부가 편찬한『낙랑군시대의 유적』은 세키노 등의 활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키노 등은) 대정(大正) 2년(서기 1913년) 9월 23일 대동강변의 토성을 답사하였다. 과연 흙으로 쌓은 성벽이 상존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한식 기와 파편 10수점을 체집하였다. 30일 우리는 평안남도 내무부장 조전치책(藻田治策)씨와 함께 평양세관의 작은 기선을 타고 대동강을 내려가 새로 발견한 토성을 보고 다수의 한식(漢式) 와당(瓦堂)을 체집하였다. 이 지점이 낙랑군시대의 고분 산포 지역의 중심지점에 위치한 것, 강변의 풍경이 아름다운 승지(勝地)인 것, 한대(漢代)의 양식을 가진 다수의 기와 파편과 벽돌조각들을 얻은 것 등의 일로써 이곳이 한대 낙랑군의 치지(治祉)라고 추상(抽象)하고 의외의 발견에 크게 기뻐하였다."

 

“한대 낙랑군의 치지라고 추상”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에 설치된 낙랑군(樂浪郡)을 2천년 후에 대동강변 일대로 비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낙랑군시대의 유적』도 이런 의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다만 다소 고려가 되는 것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는 점이다. 사면이 개활(開豁)하여 하등의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수(防守)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

 

전쟁이 많았던 고대 수도의 제일 조건은 관방(關防), 곧 방어시설이었다. 험지에 수도를 정하고 성을 쌓고 또 해자까지 파서 이중, 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낙랑군 치소로 규정한 토성은 들놀이하기에는 적당할지 몰라도 수도(首都)의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은 낙랑군 치소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것이 조선총독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훗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와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년~1932년]가 가세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대동강변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다가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자세를 바꿨다. 그는 1910년 11월 전축분(塼築墳)에서 출토된 ‘王○’가 새겨진 명문(銘文)을 낙랑군의 왕씨(王氏)와 연결시켜 낙랑군 유적이라고 주장했는데, 동경제국대학교 출신인 그의 주장은 이 지역을 낙랑군 치소로 바라보는 인식을 대거 확산시켰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중국 계통의 와당과 봉니(封泥), 비문 등을 발견하는 ‘신(神)의 손’이 된다. 1913년 류는 야쓰다 세이이치[谷井濟一]와 함께 평양 지역의 토성을 답사하던 중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고 쓰인 와당(瓦堂)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이 새겨진 봉니 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런 유물들이 발견된 것을 토대로 이 토성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했다.

 

또한 이마니시 류는 같은 해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은평동(현재의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 평야지대의 길 옆에서 화강함으로 된 ‘점제현비(岾蟬縣碑)’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후 점제현비는 ‘점제현신사비(岾蟬縣神詞碑)’로 불리는데, ‘평산군신사비(平山君神詞碑)’라고도 한다. 점제현은『한서(漢書)』「지리지(地理誌)」에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縣)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지역이 낙랑군(樂浪郡) 점제현(岾蟬縣)의 치소라는 것이 류의 주장이었다. 세키노 등은 당연히 이 설(說)을 지지했고 평남 용강군은 2천년 전 낙랑군의 점제현이 되었다.

 

한국 주류 사학계는 점제현신사비를 무조건 사실로 인정하지만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아니라면 당연히 수많은 문제점이 제기된다. 우선 2천년 전에 세워졌다는 비문을 2천년 동안 아무도 못 보았다는 점과, 그런 비문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 며칠만에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든다. 조선은 물론 고려도 문적(文蹟)의 나라였다. 이런 문(文)의 나라에서 이 비문에 대한 글을 남긴 문인이 아무도 없다. 이런 점제현신사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쉽게 띄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고분(古墳)조사위원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1892년~1960년]의『조선고고학연구(朝鮮考古學硏究:1948년)』에는 점제현신사비의 발견 경위가 실려 있다.

 

"용강군 해운면에 도착한 이마니시 류 박사는 어을동(於乙洞) 고분을 샅샅이 뒤졌으나 무늬 있는 와당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크게 실망한 이마니시 류 박사가 면장에게 고적(古蹟)이 없느냐고 물으니 면장이 ‘고비(古碑) 하나가 있으나 해독(解讀)할 수 없으며, 만일 그것을 읽는 자가 있으면 비 아래에 있는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했다. 이마니시 류 박사가 해가 질 무렵에 그곳에 가보았으나 이미 땅거미가 짙어 잘 알아보지 못하고 용강에 돌아와 유숙한 후 다음날 그곳으로 가서 비문(碑文)을 탁본(拓本)떠왔다. 평양 여사(旅舍)에서 여럿이 펴보니 그 비문 중에 ‘점제(岾蟬)’ 두 글자가 있음을 보고 이 비(碑)가 한대(漢代) 낙랑군(樂浪郡)의 점제현(岾蟬縣)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을동의 고성(古城)이 한대 낙랑군의 치지(治地)였음을 알게 되고 또한『한서(漢書)』「지리지(地理誌)」의 ‘열수(列水)가 이곳으로 나와서 서쪽으로 점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 한 그 열수가 바로 대동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로써 천고(千古)의 의혹이 일시에 풀리게 된 것이다."

 

점제현신사비(岾蟬縣神詞碑)의 발견 경과를 보면 ‘이마니시 류가 어을동 고분을 샅샅이 뒤졌으나 무늬 있는 와당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부분을 빼고는 모두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비가 2천년 동안 서 있었고, 그 아래 황금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면장까지 알고 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면장이 그 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용강군에 부임한 조선의 수많은 군수들이 이에 관한 글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또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실리지 않았을 리 없다.『한서』「지리지」를 인용한 것은 조작혐의를 더욱 짙게 해준다.『한서』「지리지」‘낙랑군 탄열현(呑列縣)조’는 “탄열현은 분려산(分黎山)이 있는데 열수(列水)가 이곳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점제현(岾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며 820리를 흐른다”고 가록되어 있다. 그러나『후한서(後漢書)』는 열수에 대해 “곽박(郭璞)이『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기를 ‘열(列)은 강의 이름인데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했다. 열수가『후한서』의 기록처럼 요동에 있어서는 평양 유역을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열수는 대동강이 되어야 했다. 이 구도에 따라 츠다 소우키치는『만선역사지리연구』에서 열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했고 이병도(李丙燾)가 이 설(說)을 추종함에 따라 현재까지 한국 주류사학계는 열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마니시 류가 실제로 면장의 말을 듣고 이 비를 발견했으면 그 면장의 이름을 공개하고 면장과 마을 원로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정작 사진은 동네 어린이를 곁에 세워놓고 찍었다. 점제현신사비가 아득한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면장과 마을 원로들의 증언과 함께 발표했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를 내세운 것이다.

 

점제현신사비가 2천년 동안 서 있었다는 용강군(龍岡郡)은 현재 온천군으로 개명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명한 온천지대다. 용강온천 곁에는 귀성온천이 있어 수많은 사대부들이 오가기도 했다. 게다가 그 비가 서 있던 곳은 깊은 산 속이 아니라 평야지대의 길 옆이었다. 우명 휴양지의 평야지대 길 옆에 2천년 이상 서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신기하게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불과 하루 만에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비(碑)가 서 있었다”는 말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발견 당시의 사람들은 다 죽었고 점제현신사비는 아직도 그곳에 서 있으므로 신사비 자체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한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점제현신사비는 높이 1·35미터, 두께 0·12미터이고 무게는 0·5톤 가량이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점제현신사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북한에서 발간된『조선고고연구』에는「물성 분석을 통하여 본 점제비와 봉니의 진면모」란 논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의 가치는 신사비의 글귀가 아니라 암석학적 조성을 갖고 분석한 과학적 논증이란 점에 있다.

 

이 논문은 “원래 육중한 비석을 세우자면 그 가공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점제비는 대충 다듬어졌으며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고 했다. 2천년 전에 비를 세우기 위해 시멘트를 썼다는 것이니 벌써 문제가 많다. 급하게 세우느라고 시멘트를 쓴 흔적이 역력한 것이다. 김교경을 비롯한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같은 논문에서 “점제비를 평가함에 있어서 문제로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화학조성에서 용강군 일대의 화강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점제현신사비는 근처 온천 지방의 마영 화강석이나 오석산 화강석, 룡강 화강석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점제비석과 마영 화강석, 오석산 화강석, 룡강 화강석의 화학조성을 비교한 표를 실었는데, 여기 따르면 은(Ag)은 주위 3개 화강석보다 2배에서 4배, 납(Ph)은 3배가량, 아연(Zn), 텅스텐(W), 니켈(Ni), 인(P)은 각각 2배가 많았다. 반면 바륨(bA)은 주위의 화강석보다 1/6이하였다. 한마디로 용강 일대에서 나오는 화강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점제현신사비의 화강석 조성연대도 주위의 화강석과는 다르다고 기술했다. 북한에서는 흑운모를 시료로 방사성동위원소측정(핵분열흔적연대측정)을 했는데 점제현신사비는 1억 2천 9백만년 전에, 주위의 화강석은 1억 1백만년~ 1억 7백만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2천 2백만년에서 2천 8백만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점제현신사비는 “료하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한 것으로서 료하지방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 매장된 화강석으로 만들어서 여기에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남한의 고고학자 손보기 박사는 1990년에『한배달』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점제현신사비도 지금 있는 곳은 2천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인데, 어떻게 그곳에 비를 세울 수 있겠어요? 옛 사람들은 비를 세우기도 하지만 산의 바위를 쪼아내고 그곳에다 꽉 끼어 맞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어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 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보면 딱 맞아요.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밖에 못 와서 그곳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 그러나 확실히 낙랑군이 아니냐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느닷없이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는 약간의 사료 비판만 가해도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조선총독부나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이 아니라면 이 비를 근거로 평안남도 용강군을 옛 점제현 지역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출처:{역사의 아침 版}『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2009년 纂)

 

▶ 해설:이덕일(李德溢)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