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순간이지만 하지 않으면 평생 갑니다.

교과서는교과서일뿐2010.11.14
조회74,832

안녕하세요

 

요즘 참 세상 흉흉하죠?

판에 들어오면 여성분들 조심하시라는 얘기들, 경험담들 항상 보입니다.

그것도 새로운 이야기들로요-_-;;

대체 얼마나 많은 피해자와, 얼마나 많은 범죄자들이 있다는 걸까요.

게다가 범죄자가 잡혔다는 얘기는 쉽사리 들려오질 않으니 바로 이 거리에 그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뭐, 굳이 판을 보지 않아도 각종 성범죄 통계, 뉴스만 봐도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지 얼마나 주변에서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건 남들 얘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얘기가 되버립니다.

저도 제 얘기 한 번 해보려구요.

 

이 얘기를 꺼내는 목적은 '의심'때문입니다.

몇몇 남자분들께서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고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의심 받아서 불쾌하고 억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이죠.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나마 자신이 범죄자로 취급되고 경계하는 행동을 보는 것, 정말 불쾌하실 겁니다.

결백하신 남자분들께는 참 죄송한 일이에요.

 

그러나 남자분들- 그런 불쾌함 일순간만 눈감아주시고 배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심과 불쾌한 감정은 순간이지만, 그것이 없었을 경우에는 평생 가는 상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20대 여성이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밤 늦은 시간 귀가하는 길이었습니다.

집은 아파트였고 집으로 빨리 들어가기 위해서 큰 길을 에둘러서가 아닌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단지 안에 테니스 코트가 있고 그 옆에 집으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길 옆에는 나무가 주욱 늘어서있었습니다. 나무 건너편에는 아파트들이 있었죠.

늦은 시간이라 인적도 없고 가로등도 많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죠.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걸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제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걸음 소리와 뭔지 모를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열쇠일 거라고 추정되지만..

신경이 쭈뼛 곤두서며 긴장이 되었습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나와 내 뒤의 사람 둘 뿐.

가슴이 두근거리고 뒤의 사람이 매우 신경 쓰이더군요.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나 험한 일 당하면 어떡하나 여긴 도움을 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저 쇠붙이 소리는 혹시 칼이 아닐까 저 칼로 위협하면 어떻게 하나 머릿속에서 오만 상상이 다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문득, 얼마전 교과서에서 읽었던 수필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계용묵의 '구두'라는 수필이었죠.

계용묵은 백치 아다다의 작가이십니다..

모르시는 분이 있으실까봐 밑에 계용묵의 구두를 올려놓았습니다.

이 수필을 불과 며칠 전에 읽었고 그 때 이 수필을 읽으면서 한 여자의 마음 속에 '불량배'로 남아버린 작가를 동정하며 괜한 의심이 다른 사람을 이렇게 불쾌하게 하고 결백한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게 하는 구나 라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나는 사람을 쉽게 의심하면 안되겠다! 괜한 사람이 나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수필과 했던 생각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저 사람은 자신의 갈 길을 가는 사람이다.

나는 괜한 사람을 의심하여 내 마음에서나마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자..

 

그렇게 불안을 다스리는 사이에 집에 거의 다왔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공터를 지나면 경비실이 있는 아파트의 입구입니다.

아파트의 입구와는 정말 채 50m도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것봐,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괜한 사람 의심할 뻔 했어..

라고 안심하며 공터를 가로지르는데-

 

 

 

 

 

뒤에서 저를 껴안으며 제 가슴을 만지더군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 귓가에 들리던 더러운 숨소리

 

여담으로 말씀드리자면 제 키 170입니다.

고등학교때 키라서 고등학교때도 이 키였고 머리도 짧았고 옷도 그냥 반팔 티셔츠에 긴바지였습니다. 외모에 관심 많을 때인데 전 딱히 여성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아서 정말 그냥 평범~한 옷만 입고 다녔어요.

평소에 친구들 사이에 씩씩한 오빠로 통했습니다.

여고를 다녔는데 친구들하고 변태 얘기 할 때마다 그런 놈 내 앞에 있으면 급소를 확 차버리고 먼지나게 패줄거라는 둥 얘기했었죠.

저도 제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전 그 때 사람이 '굳는다'라는 게 그냥 비유하는 표현이 아니라는 걸 처음에 알았어요.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고 내장기관이 멈춘 듯한 그 느낌.

코 뚫려있고 입 벌려져 있었는데 조금의 공기도 들어오지도 나가지고 않더군요.

급소를 차버리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 그렇게 절 만져대고 그냥 가더군요.

뒤로 돌아서서 그 쇠붙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는데..

바보같이 전 그대로였습니다.

그대로 서서 굳은 채 였죠.

그리고 잠시 후 제 입을 통해서 비명소리가 나왔습니다.

사람 소리 같지도 않은 소리가요. 꺄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니고 그냥 아주 높은 톤의 일정한 소리랄까;;; 무슨 기계음같은 소리;; 아파트를 쩌렁쩌렁 울렸는데 너무 비현실적인지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데 다리가 왜그리 풀리던지..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정말 열발자국만 걸으면 되는데 그렇게 멀 수가 없었어요.

 

경비실 앞을 지나가는데 경비 아저씨는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방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눈물이 났습니다.

부모님 걱정 끼쳐드릴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이불에 얼굴 묻고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 정도라서 다행이다 싶긴 합니다.

어디로 끌고 갔다면 그 때 상태로는 그냥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더 심한 짓을 당했을 수도 있었죠.

어쩌면 경비실이 코 앞이라서 그냥 그 정도로만 끝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 아직도 그 때 일이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처음 얘기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일인데도 다시 생각해서 말하니 눈물 나고 손발이 싸늘하게 식고 몸이 덜덜 떨리더군요.

글 쓰는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진짜 몇 년이 지난 일인데-_-;;

 

어떻게 보면 운좋았던 저도 이런데 실제 피해자들의 마음 고생은 오죽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은 정말 빨리 잊고 살아가는 게 최선이지만 그게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 가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 때 제가 바보같이 수필 내용 떠올리면서 경계를 풀지 않았더라면,

의심하고 조심하고 주의했더라면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제가 잘못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범죄는 전적으로 가해자의 몫이지 피해자에게 책임을 찾으려하는 것은, 특히 성범죄에 있어서 그러는 것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피해자는 범죄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가해자가 아닌 자신을 비난하며 더욱더 큰 상처를, 극복할 수도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진했고, 사람을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때 일은 전적으로 그 인간같지도 않은 놈의 잘못입니다.

 

 

다만.. 의심과 경계, 조심은 꼭 필요하다는 교훈은 얻었습니다.

제가 그 놈을 의심했더라면, 그 놈은 제 마음 속에서 범죄자가 되었겠지만 실제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남자분들, 정말 결백하신 분들의 그 고충은 죄송하지만.. 이해하고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범죄자 1명 때문에 99명의 남자들이 의심받을 수 있지만 그 의심은 결국 지나가는 일이고 순간의 불쾌함으로 잊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99명을 믿고 의심하지 않다가 1명에게 당하면 그 상처는 평생 갈 수 있습니다.

그 피해자가 자신의 누나, 동생, 어머니, 딸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남동생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는 평범한 어느 집 딸내미입니다.

 

제 남동생과 제 아버지가 어디 가서 그렇게 의심 받으면 저도 정말 억울하고 기분 나쁘겠지요.

그러나 그 의심과 경계가 진짜 범죄자로부터 어떤 여자를 구할 수도, 저를 구할 수도 있는 겁니다.

 

밑에는 계용묵의 수필 구두 입니다.^_^

왜곡된 현대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안타깝지만, 교과서와 현실은 다릅니다. ㅠㅠ

 

 

 

 

구 두 - 계용묵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좀 더 재어지자 이에 호음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뚤어진 옆골목으로 살작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고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횡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을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새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