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얀, 엔젤마을 북동쪽이라면 지능이 없는 짐승같은 놈들이 몰려있는 지역 아니냐?" "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조종?"
키에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엔젤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이틀정도의 거리에 작은 숲지대가 있다. 세상의 멸망 이후 지구상에 몇 안남은 숲은 인간이 다시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더 없이 귀한 재원이다. 하지만 돌연변이들이 먼저 그 곳을 차지하게 되면 인간의 힘으론 그 곳을 빼앗을 수 없었다. 특히, 그곳의 돌연변이들은 난폭하고 피를 좋아해 가끔 가까운 마을을 침입해 수많은 수상자를 내고 사라지곤 했다. 키에르도 카얀의 아버지인 카란과 함께 돌연변이로부터 마을을 지키기를 수차례 겪었다. 그러다 카란의 제의로 키에르는 사람을 모아 그 돌연변이들의 은거지인 북동쪽의 숲을 공격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돌연변이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살아남은 겨우 몇마리의 돌연변이에 의해 금새 그 수는 늘어났다. 돌연변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후, 카란과 키에르는 그 돌연변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을의 주변에 높은 성을 쌓았다. 그러자 그것들은 마을을 침입하는 대신 가끔 마을 근처를 배회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인간의 싸움으로는 그것들의 무한에 가까운 번식력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키에르가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 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카란과 키에르는 용감한 사람들을 모아 가까이 있는 돌연변이들을 토벌하러 나갈 때 두명의 여전사와도 함께 갔다. 일당 백의 싸움꾼들이였지만 오십 명 정도의 인원으로 몇백이 넘는 야수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3명 뿐이었고 그런 아비규환의 생지옥에서 키에르가 사랑하던 여전사가 목숨을 잃었다. 카란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카란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돌연변이를 토벌한 후에 키에르와 평화로운 결혼식을 하기로 약속한 여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의 여전사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카얀의 어머니가 되었다. 친구의 마을을 위해 사랑하는 연인까지 그런 생지옥에 데려간 자신과 카란의 변변치 못한 실력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는 자책 때문에 언제나 괴로움을 가슴 깊이 키워가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카얀은 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과거를 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키에르가 지금처럼 카얀의 아버지와 원수지간 처럼 지내는 것은 어떤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찾아가 어린 카얀에게 무술을 가르치던 키에르는 카란과의 대화 도중 그 당시의 일을 꺼내게 되었고 키에르는 그 동안 참고 있던 말을 하고 말았다.
'너의 변변치 못한 실력 때문에 그녀가 죽은거야.' '뭐야? 그런 싸움터에 여자를 데려온 네가 바보지.'
서로 속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지만 그 한마디씩의 말은 서로간의 발걸음을 20년이 넘게 단절시키고 말았다. 마을간의 교류 때문에 찾아가야 할 일이 있어도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며 서로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카얀이 고개를 떨군 키에르에게 다가가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아저씨. 벌써 제가 이렇게 클 만큼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젠..."
카얀이 위로의 말을 해보려고 다가갔지만 키에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난 아직 장가도 못갔다. 그게 억울해서 그래." "........." "내 여자를 죽게 했으면 지 여자라도 양보해야지. 네 엄마가 사실은 더 예뻤거든." "........" "근데, 어머니께선 잘 계시냐?" "돌아가셨습니다." "잉? 언제?" "작년에요. 암에 걸리셨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죠." "..........."
그가 사랑하던 여인과 카얀의 어머니는 무술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보기드믄 여호걸들 이었다. 이젠 기억에나 존재하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지는것 같아서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험, 험, 근데 조종이라니? 그 짐승들을 누가 부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네, 그자의 손짓 하나로 그 돌연변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요구조건은 무엇이냐?"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들이 사는 숲으로 식량과 물을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음......." "요구대로 할테니 여자를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그냥 제 아내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다음날 아버지께서 사람을 시켜 저희 마을의 한달 치 식량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구나." "예." "그놈들이 산 사람을 그냥 둘 리가 없지. 그러면 그 일을 스파키란 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거냐?" "예."
잠시 후, 둘은 카얀이 처음 뛰어들어간 집으로 그를 찾아갔다. 문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카얀은 칼을 빼들면서 뛰어들어갔고 키에르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보았던 사내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벌거벗은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카얀은 남자의 눈빛을 보며 살기가 없음에 칼을 다시 집어 넣었고 키에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여자를 감싸주었다.
"스파키. 무슨 짓입니까?"
키에르가 물었지만 정작 스파키란 남자는 아무 대꾸도 안했고 대신 카얀이 놀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스파키란 사람입니까? 이런, 눈 앞에 두고도 몰랐군요."
키에르는 여자에게 무어라 속삭이고는 내보냈고 스파키란 사내는 침대 한 켠에 놓인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카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평범한 사람이 그 유명한 도적떼를 전부 몰살시켰단 말인가?'
스파키란 사람은 아시안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아시안치고는 큰 키에 야무진 체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옷을 다 입더니 일어서서는 카얀에게 다가갔다. 카얀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려 했지만 스파키란 사내는 그의 손을 지나쳐 카얀의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음, 좋은 물건이군."
카얀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키에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스파키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대답을 하며 스파키가 칼을 카얀쪽으로 던졌고 키에르도 놀라서 뒤돌아 봤지만 그 칼은 카얀의 허리에 걸려있는 칼집에 정확히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카얀의 입이 벌어지며 스파키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약속대로 한달치 식량과 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낡긴 했지만 탈 것도 준비했습니다." "탈 것?" "저희 마을에 바이크가 몇 대 있습니다. 그 중에 좋은 것으로 고르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키에르가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카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대는 그 유명한 츄파일행을 하루만에 섬멸시킨 사람이고 또 자신의 일을 대신 부탁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카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그 츄파일행을 없앤 스파키가 맞습니까?" "그놈 이름이 그건가? 난 몰랐군." "저....... 정말..... 입니까?"
카얀이 의심의 눈빛을 만들며 스파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키에르가 정색을 했다.
"카얀, 이 분의 힘을 의심하지 말거라. 너도 소문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그렇긴 합니다만." "키에르. 하실 말씀이란게 뭡니까?"
스파키가 묻자 카얀이 한숨을 쉬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을의 북동쪽 이틀정도의 거리에 작은 숲이 있습니다. 그 숲은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자원이지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 숲은 돌연변이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숲에 살고 있는 돌연변이들은 다른 것들과 달라서 지능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짐승들을 부하처럼 거느리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자는 순식간에 마을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식량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 식량을 찾아달라는 건가? 늦었을텐데." "그것들이 제 아내를 데려갔습니다."
카얀은 이 말을 하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이 여자를 데려갔다면 이미....."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돌연변이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아시안입니다." "아시안?" "머리와 눈동자가 검었습니다." "..........." "그자가 제 아내를 데리고 가면서 일주일마다 식량과 물을 자기가 사는 숲으로 가져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대로 했지만 갔던 사람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조대를 보냈었군."
스파키의 말에 카얀은 흠짓 했다.
"어떻게......" "식량을 계속 원한다는 놈들이 배달꾼을 죽일 리가 없지 않는가."
스파키의 말에 키에르가 카얀을 쳐다보았다. 그 말은 아까 대화를 나누면서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말 그랬냐? 그 멍청한 네 애비가 기어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제 아내를 데리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많은 식량을 주다가는 저희 마을엔 먹을 것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려고 했는데...."
스파키가 카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마을을 위해서 여자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아버지께선 그렇게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카얀의 말에 스파키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키에르는 발끈했다.
"그런 미친 놈을 봤나! 지 며느리를.... 세상에!"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마을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지도자로선 어쩔 수 없는 판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자신이 나서지 않고 스파키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다.
일주일 전 스파키라는 떠돌이가 이 마을에 왔었다. 그는 일을 해 줄테니 식량을 달라고 했었고 키에르는 골치아픈 일을 맡겨버렸다. 메탈타운은 많은 양의 질 좋은 철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철을 기계로 만드는 기술은 갖고 있지를 못했다. 그래서 무슨 기계가 필요하면 멀리 있는 테크타운에 다양한 종류의 금속을 보내고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식으로 물물교환을 해 왔다. 한 달 전 지하에서 물을 뽑아올리는 펌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새로운 부품을 구하기 위해 테크타운으로 철을 보냈었다. 그리고 구하기 힘든 귀한 부품을 가져오는 도중 츄파라는 자가 이끄는 도적떼에게 당한 것이다. 그 부품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키에르는 마을의 안전이 걱정되어 직접 가지 못했고 마을에 있는 젊은 남자는 그 수가 모자라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나타났다. 키에르는 한 눈에 그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임을 알고 일을 부탁한 것이다. 부품만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스파키란 사람은 그 도적떼들을 전부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온통 상처 투성이었고 그의 힘에 의구심을 가진 키에르는 사람을 시켜 스파키란 사람에 대해 정보를 모았다. 알고보니 그의 이름은 그의 능력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몸에서 전류를 일으키며 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그의 몸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길트가 있는지 몰래 검사도 해 보았지만 발견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시간을 두고 의술이 발달한 엔젤마을에 연락을 해서 그 스파키란 사람이 어떻게 몸에서 엄청난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하는 차에 카얀이 찾아 온 것이다.
"전 제 아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 아내의 몸엔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두달이 되었습니다." "배가 부르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알지?" "저희 엔젤타운은 의학이 발달해 있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합니다. 자손은 귀하니까요." "의학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스파키가 묻자 카얀은 자신있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엔젤타운은 심한 상처나 병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와 장비들이 풍부한 편이죠." "그럼 난 당신의 아내만 데려오면 되나?" "그리고....." "그 우두머리를 죽이면 되겠군."
카얀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돌연변이들은 다시 지능이 없는 짐승들로 돌아갈 겁니다." "조건이 있다."
카얀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피어났다. 이런 위험한 일을 부탁한다면 상대는 틀림없이 무리한 조건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에 따라 아내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날 당신의 마을에서 머물게 해 다오." "네?"
의외의 말에 카얀은 다시 그 뜻을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말한 드대로다. 내가 가진 이상한 힘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길트에 감염된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을 알고 싶다." "......." "당신의 마을은 의사와 장비가 많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럼 내 몸을 제대로 살펴 볼 사람도 있겠군. 내일 출발하겠다." "저도 가겠습니다." "방해만 될텐데." "제 아내입니다."
카얀이 단호한 얼굴을 하며 두 주먹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스파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좋다. 하지만 네 목숨은 네가 지켜라. 그리고 키에르." "말씀하시오." "그 여자 좀 어떻게 해 주시오." "무슨 얘긴지......"
아까 들어올 때의 장면이 떠오른 키에르는 이 자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귀찮아 죽겠습니다."
다음날. 스파키와 카얀은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서 출발했다. 낮이 되면 버닝타임이 시작된다. 날마다 찾아오는 그 시간은 인간에게 떨어진 아주 귀찮은 재앙이었다. 버닝타임이라 불리는 그 시간엔 맨 살로 태양을 받았다가는 5분이 지나기 전에 물집이 생기면서 피부가 타들어간다. 처음 2-3분 정도는 견딜수 있지만 그 이상 햇볕에 피부를 노출시키면 위험하게 된다. 키에르가 제공해 준 바이크에 두 사람이 올랐다.
"키에르." "예."
마을의 은인인 스파키에게 지도자는 아직도 공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틀 후에 그 숲으로 탈 것을 큰 것으로 준비해서 보내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낡은 트럭이 있기는 한데 서둘러서 고쳐야 하겠군요." "그럼 수고하시오."
출발하면서 카얀이 물었다.
"차는 왜 부탁하셨습니까?" "넌 바보냐?" "에?" "올 때도 이런 바이크에 세명이나 탈 수 있을 것 같나?" "아, 그렇군요." "운전이나 똑바로 해."
한참을 달리던 그들은 12시가 가까워 오자 바이크를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서 작은 텐트를 쳤다. 버닝타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얼굴까지 천으로 덮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하지만 점심도 먹을 겸 멈춘 그들은 작은 텐트가 만들어 주는 그늘로 몸을 숨기며 앉았다. 카얀이 준비해 온 마른 빵과 물을 꺼내 스파키에게 건냈다. 스파키는 음식을 받고는 한 입 베어물며 카얀을 쳐다보았다.
"왜 거짓말을 했지?" "네?"
카얀은 뜨끔했다. 이 자는 처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에 땀이 흘렀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여버리고 이 자는 갈 길을 가버리면 그만이다. 스파키가 먹던 빵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이번엔 표정이 달랐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향해 손을 뻣을 듯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었다."
하지만 일단은 시치미를 떼야 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네 아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먼저 보낸 구조대가 전멸했다면 이미 여자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 짐승들 손에서 무사할리도 없고. 말해라. 거짓말을 하면 죽이겠다." ".........."
카얀은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고는 스파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시체가 되어 돌아온 구조대의 몸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나?" "스파키란 사람과 여자를 교환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저희 마을을 더 이상 건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우두머리라는 자를 직접 만났나?" "네." "왜 날 원하지? 난 모르는 놈인데."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저 당신을 데려오기만 하면 아내를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스파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년이 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누구에게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기억은 없다. 마주치는 인물들 중에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들도 많이 만났다. 돌연변이도 있었고 도적떼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한 적도 없었고 최소한의 살생만을 하며 피해다녔다. 그런데 누가 자신을 잡기 위해 인질극까지 벌이고 있다는 말에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모래가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는 카얀의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카얀은 아직 모르고 있는지 스파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카얀의 뒤에는 방금 그가 내려놓은 빵이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씩 모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봐. 뒤."
카얀이 얼른 뒤를 돌아보고는 일어서려 하자 스파키와 카얀 사이의 모래가 공중으로 속구치더니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마치 길다란 뱀처럼 생긴 그 물체는 모래속에서 몸의 일부만 내밀고는 카얀쪽으로 달려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카얀의 다리를 감은 그것은 자신이 나온 구멍으로 그를 당기려 하고 있었다.
스파키의 전설 - 1화 - 2424년<2>
"카얀, 엔젤마을 북동쪽이라면 지능이 없는 짐승같은 놈들이 몰려있는 지역 아니냐?"
"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조종?"
키에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엔젤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이틀정도의 거리에 작은 숲지대가 있다.
세상의 멸망 이후 지구상에 몇 안남은 숲은 인간이 다시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더 없이 귀한 재원이다.
하지만 돌연변이들이 먼저 그 곳을 차지하게 되면 인간의 힘으론 그 곳을 빼앗을 수 없었다.
특히, 그곳의 돌연변이들은 난폭하고 피를 좋아해 가끔 가까운 마을을 침입해 수많은 수상자를 내고 사라지곤 했다.
키에르도 카얀의 아버지인 카란과 함께 돌연변이로부터 마을을 지키기를 수차례 겪었다.
그러다 카란의 제의로 키에르는 사람을 모아 그 돌연변이들의 은거지인 북동쪽의 숲을 공격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돌연변이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살아남은 겨우 몇마리의 돌연변이에 의해 금새 그 수는 늘어났다.
돌연변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후, 카란과 키에르는 그 돌연변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을의 주변에 높은 성을 쌓았다.
그러자 그것들은 마을을 침입하는 대신 가끔 마을 근처를 배회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인간의 싸움으로는 그것들의 무한에 가까운 번식력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키에르가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 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카란과 키에르는 용감한 사람들을 모아 가까이 있는 돌연변이들을 토벌하러 나갈 때 두명의 여전사와도 함께 갔다.
일당 백의 싸움꾼들이였지만 오십 명 정도의 인원으로 몇백이 넘는 야수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3명 뿐이었고 그런 아비규환의 생지옥에서 키에르가 사랑하던 여전사가 목숨을 잃었다.
카란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카란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돌연변이를 토벌한 후에 키에르와 평화로운 결혼식을 하기로 약속한 여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의 여전사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카얀의 어머니가 되었다.
친구의 마을을 위해 사랑하는 연인까지 그런 생지옥에 데려간 자신과 카란의 변변치 못한 실력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는 자책 때문에 언제나 괴로움을 가슴 깊이 키워가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카얀은 어머니에게서 그러한 과거를 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키에르가 지금처럼 카얀의 아버지와 원수지간 처럼 지내는 것은 어떤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찾아가 어린 카얀에게 무술을 가르치던 키에르는 카란과의 대화 도중 그 당시의 일을 꺼내게 되었고 키에르는 그 동안 참고 있던 말을 하고 말았다.
'너의 변변치 못한 실력 때문에 그녀가 죽은거야.'
'뭐야? 그런 싸움터에 여자를 데려온 네가 바보지.'
서로 속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지만 그 한마디씩의 말은 서로간의 발걸음을 20년이 넘게 단절시키고 말았다.
마을간의 교류 때문에 찾아가야 할 일이 있어도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며 서로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카얀이 고개를 떨군 키에르에게 다가가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아저씨. 벌써 제가 이렇게 클 만큼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젠..."
카얀이 위로의 말을 해보려고 다가갔지만 키에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난 아직 장가도 못갔다. 그게 억울해서 그래."
"........."
"내 여자를 죽게 했으면 지 여자라도 양보해야지. 네 엄마가 사실은 더 예뻤거든."
"........"
"근데, 어머니께선 잘 계시냐?"
"돌아가셨습니다."
"잉? 언제?"
"작년에요. 암에 걸리셨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죠."
"..........."
그가 사랑하던 여인과 카얀의 어머니는 무술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보기드믄 여호걸들 이었다.
이젠 기억에나 존재하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지는것 같아서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험, 험, 근데 조종이라니? 그 짐승들을 누가 부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네, 그자의 손짓 하나로 그 돌연변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요구조건은 무엇이냐?"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들이 사는 숲으로 식량과 물을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음......."
"요구대로 할테니 여자를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그냥 제 아내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다음날 아버지께서 사람을 시켜 저희 마을의 한달 치 식량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구나."
"예."
"그놈들이 산 사람을 그냥 둘 리가 없지. 그러면 그 일을 스파키란 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거냐?"
"예."
잠시 후, 둘은 카얀이 처음 뛰어들어간 집으로 그를 찾아갔다.
문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카얀은 칼을 빼들면서 뛰어들어갔고 키에르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보았던 사내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벌거벗은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카얀은 남자의 눈빛을 보며 살기가 없음에 칼을 다시 집어 넣었고 키에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여자를 감싸주었다.
"스파키. 무슨 짓입니까?"
키에르가 물었지만 정작 스파키란 남자는 아무 대꾸도 안했고 대신 카얀이 놀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스파키란 사람입니까? 이런, 눈 앞에 두고도 몰랐군요."
키에르는 여자에게 무어라 속삭이고는 내보냈고 스파키란 사내는 침대 한 켠에 놓인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카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평범한 사람이 그 유명한 도적떼를 전부 몰살시켰단 말인가?'
스파키란 사람은 아시안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아시안치고는 큰 키에 야무진 체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옷을 다 입더니 일어서서는 카얀에게 다가갔다.
카얀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려 했지만 스파키란 사내는 그의 손을 지나쳐 카얀의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음, 좋은 물건이군."
카얀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키에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스파키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대답을 하며 스파키가 칼을 카얀쪽으로 던졌고 키에르도 놀라서 뒤돌아 봤지만 그 칼은 카얀의 허리에 걸려있는 칼집에 정확히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카얀의 입이 벌어지며 스파키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약속대로 한달치 식량과 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낡긴 했지만 탈 것도 준비했습니다."
"탈 것?"
"저희 마을에 바이크가 몇 대 있습니다. 그 중에 좋은 것으로 고르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키에르가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카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대는 그 유명한 츄파일행을 하루만에 섬멸시킨 사람이고 또 자신의 일을 대신 부탁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스파키. 죄송하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해 보시오."
그들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카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그 츄파일행을 없앤 스파키가 맞습니까?"
"그놈 이름이 그건가? 난 몰랐군."
"저....... 정말..... 입니까?"
카얀이 의심의 눈빛을 만들며 스파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키에르가 정색을 했다.
"카얀, 이 분의 힘을 의심하지 말거라. 너도 소문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그렇긴 합니다만."
"키에르. 하실 말씀이란게 뭡니까?"
스파키가 묻자 카얀이 한숨을 쉬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을의 북동쪽 이틀정도의 거리에 작은 숲이 있습니다. 그 숲은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자원이지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 숲은 돌연변이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숲에 살고 있는 돌연변이들은 다른 것들과 달라서 지능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짐승들을 부하처럼 거느리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자는 순식간에 마을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식량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 식량을 찾아달라는 건가? 늦었을텐데."
"그것들이 제 아내를 데려갔습니다."
카얀은 이 말을 하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이 여자를 데려갔다면 이미....."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돌연변이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아시안입니다."
"아시안?"
"머리와 눈동자가 검었습니다."
"..........."
"그자가 제 아내를 데리고 가면서 일주일마다 식량과 물을 자기가 사는 숲으로 가져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대로 했지만 갔던 사람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조대를 보냈었군."
스파키의 말에 카얀은 흠짓 했다.
"어떻게......"
"식량을 계속 원한다는 놈들이 배달꾼을 죽일 리가 없지 않는가."
스파키의 말에 키에르가 카얀을 쳐다보았다.
그 말은 아까 대화를 나누면서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말 그랬냐? 그 멍청한 네 애비가 기어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제 아내를 데리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많은 식량을 주다가는 저희 마을엔 먹을 것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려고 했는데...."
스파키가 카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마을을 위해서 여자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아버지께선 그렇게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카얀의 말에 스파키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키에르는 발끈했다.
"그런 미친 놈을 봤나! 지 며느리를.... 세상에!"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마을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지도자로선 어쩔 수 없는 판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자신이 나서지 않고 스파키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다.
일주일 전 스파키라는 떠돌이가 이 마을에 왔었다.
그는 일을 해 줄테니 식량을 달라고 했었고 키에르는 골치아픈 일을 맡겨버렸다.
메탈타운은 많은 양의 질 좋은 철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철을 기계로 만드는 기술은 갖고 있지를 못했다.
그래서 무슨 기계가 필요하면 멀리 있는 테크타운에 다양한 종류의 금속을 보내고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식으로 물물교환을 해 왔다.
한 달 전 지하에서 물을 뽑아올리는 펌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새로운 부품을 구하기 위해 테크타운으로 철을 보냈었다.
그리고 구하기 힘든 귀한 부품을 가져오는 도중 츄파라는 자가 이끄는 도적떼에게 당한 것이다.
그 부품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키에르는 마을의 안전이 걱정되어 직접 가지 못했고 마을에 있는 젊은 남자는 그 수가 모자라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나타났다.
키에르는 한 눈에 그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임을 알고 일을 부탁한 것이다.
부품만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스파키란 사람은 그 도적떼들을 전부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온통 상처 투성이었고 그의 힘에 의구심을 가진 키에르는 사람을 시켜 스파키란 사람에 대해 정보를 모았다.
알고보니 그의 이름은 그의 능력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몸에서 전류를 일으키며 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그의 몸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길트가 있는지 몰래 검사도 해 보았지만 발견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시간을 두고 의술이 발달한 엔젤마을에 연락을 해서 그 스파키란 사람이 어떻게 몸에서 엄청난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하는 차에 카얀이 찾아 온 것이다.
"전 제 아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 아내의 몸엔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두달이 되었습니다."
"배가 부르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알지?"
"저희 엔젤타운은 의학이 발달해 있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합니다. 자손은 귀하니까요."
"의학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스파키가 묻자 카얀은 자신있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엔젤타운은 심한 상처나 병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와 장비들이 풍부한 편이죠."
"그럼 난 당신의 아내만 데려오면 되나?"
"그리고....."
"그 우두머리를 죽이면 되겠군."
카얀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돌연변이들은 다시 지능이 없는 짐승들로 돌아갈 겁니다."
"조건이 있다."
카얀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피어났다.
이런 위험한 일을 부탁한다면 상대는 틀림없이 무리한 조건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에 따라 아내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날 당신의 마을에서 머물게 해 다오."
"네?"
의외의 말에 카얀은 다시 그 뜻을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말한 드대로다. 내가 가진 이상한 힘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길트에 감염된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을 알고 싶다."
"......."
"당신의 마을은 의사와 장비가 많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럼 내 몸을 제대로 살펴 볼 사람도 있겠군. 내일 출발하겠다."
"저도 가겠습니다."
"방해만 될텐데."
"제 아내입니다."
카얀이 단호한 얼굴을 하며 두 주먹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스파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좋다. 하지만 네 목숨은 네가 지켜라. 그리고 키에르."
"말씀하시오."
"그 여자 좀 어떻게 해 주시오."
"무슨 얘긴지......"
아까 들어올 때의 장면이 떠오른 키에르는 이 자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귀찮아 죽겠습니다."
다음날.
스파키와 카얀은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서 출발했다.
낮이 되면 버닝타임이 시작된다.
날마다 찾아오는 그 시간은 인간에게 떨어진 아주 귀찮은 재앙이었다.
버닝타임이라 불리는 그 시간엔 맨 살로 태양을 받았다가는 5분이 지나기 전에 물집이 생기면서 피부가 타들어간다.
처음 2-3분 정도는 견딜수 있지만 그 이상 햇볕에 피부를 노출시키면 위험하게 된다.
키에르가 제공해 준 바이크에 두 사람이 올랐다.
"키에르."
"예."
마을의 은인인 스파키에게 지도자는 아직도 공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틀 후에 그 숲으로 탈 것을 큰 것으로 준비해서 보내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낡은 트럭이 있기는 한데 서둘러서 고쳐야 하겠군요."
"그럼 수고하시오."
출발하면서 카얀이 물었다.
"차는 왜 부탁하셨습니까?"
"넌 바보냐?"
"에?"
"올 때도 이런 바이크에 세명이나 탈 수 있을 것 같나?"
"아, 그렇군요."
"운전이나 똑바로 해."
한참을 달리던 그들은 12시가 가까워 오자 바이크를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서 작은 텐트를 쳤다.
버닝타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얼굴까지 천으로 덮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하지만 점심도 먹을 겸 멈춘 그들은 작은 텐트가 만들어 주는 그늘로 몸을 숨기며 앉았다.
카얀이 준비해 온 마른 빵과 물을 꺼내 스파키에게 건냈다.
스파키는 음식을 받고는 한 입 베어물며 카얀을 쳐다보았다.
"왜 거짓말을 했지?"
"네?"
카얀은 뜨끔했다.
이 자는 처음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에 땀이 흘렀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여버리고 이 자는 갈 길을 가버리면 그만이다.
스파키가 먹던 빵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이번엔 표정이 달랐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향해 손을 뻣을 듯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었다."
하지만 일단은 시치미를 떼야 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네 아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먼저 보낸 구조대가 전멸했다면 이미 여자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 짐승들 손에서 무사할리도 없고. 말해라. 거짓말을 하면 죽이겠다."
".........."
카얀은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고는 스파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시체가 되어 돌아온 구조대의 몸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나?"
"스파키란 사람과 여자를 교환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저희 마을을 더 이상 건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우두머리라는 자를 직접 만났나?"
"네."
"왜 날 원하지? 난 모르는 놈인데."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저 당신을 데려오기만 하면 아내를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스파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년이 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누구에게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기억은 없다.
마주치는 인물들 중에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들도 많이 만났다.
돌연변이도 있었고 도적떼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한 적도 없었고 최소한의 살생만을 하며 피해다녔다.
그런데 누가 자신을 잡기 위해 인질극까지 벌이고 있다는 말에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모래가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는 카얀의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카얀은 아직 모르고 있는지 스파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카얀의 뒤에는 방금 그가 내려놓은 빵이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씩 모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봐. 뒤."
카얀이 얼른 뒤를 돌아보고는 일어서려 하자 스파키와 카얀 사이의 모래가 공중으로 속구치더니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마치 길다란 뱀처럼 생긴 그 물체는 모래속에서 몸의 일부만 내밀고는 카얀쪽으로 달려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카얀의 다리를 감은 그것은 자신이 나온 구멍으로 그를 당기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