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우리 집에 처음 TV를 들어 논 때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버지도 참 어지간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학교 숙직실에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처음 착륙하는 것을 보았고 드라마 '여로' 를 보기 위해 밤마다 엄마 눈치 살피면서 친구들 집을 전전해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극장은 명절이나 학교에서 단체 관람 때만 갈 수 있는 대단한 곳이었다. 하긴 공설 운동장에서 가끔 무료로 보여 주는 활동 사진도 꽤 인기를 끌 때였다.
그 때, 할아버지와 나는 사흘에 한번 꼴로 극장에 갈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원한다면 매일 갈 수도 있었으나, 당시 극장 프로는 이틀동안 한 프로가 상영되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런 축복이 가능했던 것은 숙부의 친구인 극장 사장이 극장에 무료로 들어 갈 수 있는 프리 패스 티켓을 할아버지께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적적함이 손자인 나의 극장 순례기를 쓰게 했고, 지금도 그 극장을 운영하고 계신 사장 아저씨가 나의 내면에 깊숙이 개입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극장은 마치 마술의 세계와 같았다.
삶, 의문, 애국, 사랑, 자비, 과학, 화폐, 죽음, 봉사, 슬픔, 충성, 환희, 두려움, 문학, 좌절, 꿈, 역사, 희생, 성공, 즐거움, 종교, 기쁨, 고독, 타락, 경제, 승리, 분노, 선함, 철학, 죽음, 동정심, 상징, 희망, 열정, 고통, 전쟁, 절망, 정치, 나눔, 상실, 이별, 무지...
영화는 나의 생명이었고 빛의 근원이었며 구원의 길이었다. 영화만이 나와 다른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채널이었다.
극장 안의 풍경은 늘 일정했다.
본전통 골목 상점들의 유치한 광고 선전물들... 독특한 톤의 대한 뉴스... 옆집 아가씨와 낯선 남자와의 낄낄거리는 소리...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스크린... 자주 끊어지는 영사기 필름과 아저씨들의 휘파람 소리...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들어 오는 조명아래 쑥스러운 표정들...
난 정말 다양한 종류의 많은 영화를 무수히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1년에 100편 정도의 영화를 수년동안 무차별하게 쏟아 넣었다.
거기에는 어떤 장르나 작품성도 없었고 심지어 미성년자불가도 상관치 않았다.
정통 서부 영화, 진짜 무서운 귀신 영화, 2차 대전 영화, 국적도 알 수 없는 영화,
철저한 반공 영화, 장풍 대결이 멋진 중국(홍콩) 영화, 저질 코메디 영화, 3류 깡패 영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영화,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 재미없는 영화
감독이나 주연 배우의 이름은 물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시작하여 미워도 다시 한번까지... 필름은 쉴새 없이 돌아갔다.
김찬삼 세계 여행기도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미국의 대도시, 유럽의 고풍스런 건축물, 중남미의 인디언의 모습, 아프리카의 황량한 풍경, 아시아의 기이한 풍습, 카리브해의 멋진 바다,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덕분에 성장한 후, 나도 여러 나라를 많이 돌아 다녔다. '89년부터 배낭 여행을 다닌 것도 이미 본 것 같은 것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프랑스 시골의 아름다움, 스페인 집시의 열정적인 춤, 고풍스런 일본의 뒷골목, 검붉은 네바다 사막의 풍경, 싱가폴의 찌는 무더위, 이탈리아 해변의 햇빛...
이렇게 쌓여진 Image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나의 저편에 빼곡이 저장이 되었을 것이 고, 나는 지금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내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받아 들일 때, 스크린으로 재구성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한 때 내가 영화 감독을 꿈꾼 것도 이런 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진 단 한 마디만 하셨고 나는 단번에 순종했다. 그 짓은 배고프다. 행시나 보렴...
시대가 너무 일렀고 정보도 없었으며 더구나 어떤 격려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했다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철이 들고도 근 10년 동안이나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 Image에 매몰되어 갔고 그것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한동안 잘 조작된 Image는 나를 끌고 다니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 Image가 거짓과 내통하는 교활한 놈임을 알아 버렸다.
처음부터 Image는 독이었다. Image는 본질을 어지럽히는 허상이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무분별하게 섭취한 감각적인 이미지는 탐욕과 폭력을 불러 들인다. 그래서 영혼이 이 독을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제 나의 삶 속에서 Image는 수명을 다한 건전지에 불과하다. 앞으로 삶은 그런 대로 평화로울 것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할 것이며, 크게 잘못될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Image 는 毒이었다
Image
나를 키운 8할은 Image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다.
우리 집에 처음 TV를 들어 논 때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버지도 참 어지간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학교 숙직실에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처음 착륙하는 것을 보았고
드라마 '여로' 를 보기 위해 밤마다 엄마 눈치 살피면서 친구들 집을 전전해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극장은 명절이나 학교에서 단체 관람 때만 갈 수 있는 대단한 곳이었다.
하긴 공설 운동장에서 가끔 무료로 보여 주는 활동 사진도 꽤 인기를 끌 때였다.
그 때, 할아버지와 나는 사흘에 한번 꼴로 극장에 갈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원한다면 매일 갈 수도 있었으나, 당시 극장 프로는 이틀동안 한 프로가
상영되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런 축복이 가능했던 것은 숙부의 친구인 극장 사장이 극장에 무료로 들어 갈 수
있는 프리 패스 티켓을 할아버지께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적적함이 손자인 나의 극장 순례기를 쓰게 했고, 지금도 그 극장을
운영하고 계신 사장 아저씨가 나의 내면에 깊숙이 개입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극장은 마치 마술의 세계와 같았다.
삶, 의문, 애국, 사랑, 자비, 과학, 화폐, 죽음, 봉사, 슬픔, 충성, 환희, 두려움, 문학,
좌절, 꿈, 역사, 희생, 성공, 즐거움, 종교, 기쁨, 고독, 타락, 경제, 승리, 분노, 선함,
철학, 죽음, 동정심, 상징, 희망, 열정, 고통, 전쟁, 절망, 정치, 나눔, 상실, 이별, 무지...
영화는 나의 생명이었고 빛의 근원이었며 구원의 길이었다.
영화만이 나와 다른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채널이었다.
극장 안의 풍경은 늘 일정했다.
본전통 골목 상점들의 유치한 광고 선전물들...
독특한 톤의 대한 뉴스...
옆집 아가씨와 낯선 남자와의 낄낄거리는 소리...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스크린...
자주 끊어지는 영사기 필름과 아저씨들의 휘파람 소리...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들어 오는 조명아래 쑥스러운 표정들...
난 정말 다양한 종류의 많은 영화를 무수히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1년에 100편 정도의 영화를 수년동안 무차별하게 쏟아 넣었다.
거기에는 어떤 장르나 작품성도 없었고 심지어 미성년자불가도 상관치 않았다.
정통 서부 영화, 진짜 무서운 귀신 영화, 2차 대전 영화, 국적도 알 수 없는 영화,
철저한 반공 영화, 장풍 대결이 멋진 중국(홍콩) 영화, 저질 코메디 영화,
3류 깡패 영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영화,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 재미없는 영화
감독이나 주연 배우의 이름은 물론,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시작하여 미워도 다시 한번까지...
필름은 쉴새 없이 돌아갔다.
김찬삼 세계 여행기도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미국의 대도시, 유럽의 고풍스런 건축물, 중남미의 인디언의 모습, 아프리카의
황량한 풍경, 아시아의 기이한 풍습, 카리브해의 멋진 바다,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덕분에 성장한 후, 나도 여러 나라를 많이 돌아 다녔다.
'89년부터 배낭 여행을 다닌 것도 이미 본 것 같은 것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프랑스 시골의 아름다움, 스페인 집시의 열정적인 춤, 고풍스런 일본의 뒷골목,
검붉은 네바다 사막의 풍경, 싱가폴의 찌는 무더위, 이탈리아 해변의 햇빛...
이렇게 쌓여진 Image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나의 저편에 빼곡이 저장이 되었을 것이
고, 나는 지금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내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받아 들일 때, 스크린으로 재구성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한 때 내가 영화 감독을 꿈꾼 것도 이런 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진 단 한 마디만 하셨고
나는 단번에 순종했다. 그 짓은 배고프다. 행시나 보렴...
시대가 너무 일렀고 정보도 없었으며 더구나 어떤 격려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했다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철이 들고도 근 10년 동안이나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 Image에 매몰되어 갔고 그것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한동안 잘 조작된 Image는 나를 끌고 다니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 Image가 거짓과 내통하는 교활한 놈임을 알아 버렸다.
처음부터 Image는 독이었다.
Image는 본질을 어지럽히는 허상이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무분별하게 섭취한 감각적인 이미지는 탐욕과 폭력을 불러 들인다.
그래서 영혼이 이 독을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제 나의 삶 속에서 Image는 수명을 다한 건전지에 불과하다.
앞으로 삶은 그런 대로 평화로울 것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할 것이며, 크게
잘못될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