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는 주후 431년 제3회 에베소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에서 희랍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함께 모여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게된다.(基督論)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마리아를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주장하던 것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부터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이다. 당신에 모든 교회가 마리아는 ‘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인정하고 있을때였는데, 네스토리우스가 ‘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 라고 하기 보다는 예수를 낳았음으로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처치할 목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에베소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집트로 추방이 되었고 그의 제자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양성 하여 사방으로 파송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한 무리가 인도를 지나 중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때가 주후 635년 당나라 태종 9년때에 알로펜(Alopen-阿羅本;아브라함의 중국이름)을 단장으로 선교단이 있었다. 당 태종은 21명의 선교단에게 의전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환영을 하게 된다. 주후 638에는 태종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국비를 드려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워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하게 함으로 당나라에 선교의 길이 크게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색다른 종교가 페르시아에서 왔음으로 파사교(波斯敎)라고 하였는데 이 종교의 본거지가 로마인 것을 알고는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이라는 말에 교(敎자)를 부쳐서 대진교(大秦敎)라고 부르게 된다. 그 후에는 광명한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 당나라에서 경교, 또는 대진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 라는 관직을 주고 10 도와 385주(州)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태종때는 성탄절이 되면 향과 음식을 주고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경교는 당나라에서 주후 635-845년 동안의 210년간 국민들의 호응과 황실의 보호 속에서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 였다.
그러나 도교(道敎;Taoism; 유고중의 노자(老子) 중심의 도덕 종교의 한 형태) 신자인 무종(武宗 840-846)이 황제에 오르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는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의 사원들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승려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경교와 회회교, 함께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의 사제들까지 성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의 사정을 보면 문을 닫은 불교가 4,600개, 환속되어 간 승려가 무려 26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경교에 대한 탄압이 있게 되자 더 존속할 수 가 없게 되었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선교가 되고 있을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인 주후 668년이었다. 이 무렵은 우리나라 삼국, 특별히 신라와 당나라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학문과 문물 그리고 사상들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신라에도 경교가 소개되었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조비를 발견하였고, 주후 1928년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압록강 주변 만주의 안산(鞍山)지역에서는 경교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에서는 와제(瓦製) 십자가가 나왔고, 주후 1956년에 경주 안압지에서는 십자가 모양의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 상이 발굴되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자가 등이 있다.
200여년 동안 번영하다가 박해로 인하여 선교의 흔적이 없어졌는데 이 사실이 매몰된지 800년이 지난 주후 1625년에 경교비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의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이 비석의 비문은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되어 있고 당시 경교 선교 역사와 활동상황들이 736자로 소개가 되었다. 외국인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 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東洋傳來)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를 전념하였는데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머물면서 경교의 전래 가능을 연구하고 나서 고든 (E. A. Gordon) ‘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들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의 능이나 문 앞에 세운 무인상(武人像)들에서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경교(景敎)는 7세기경 페르시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유럽에서는 교세를 잃었지만 동방으로 옮겨가 기독교를 전래하였다. 중국의 경교 역사는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西安)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며, 원대(元代)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경교가 중국사회에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종교나 불교와 습합되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당에 수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당시 빈번한 문화교류를 행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주로 초기 기독교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동제십자무늬장식, 마리아상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
통일신라시대의 기독교(경교)
통일신라시대의 기독교(경교)
경교는 주후 431년 제3회 에베소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에서 희랍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함께 모여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게된다.(基督論)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마리아를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주장하던 것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부터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이다. 당신에 모든 교회가 마리아는 ‘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인정하고 있을때였는데, 네스토리우스가 ‘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 라고 하기 보다는 예수를 낳았음으로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처치할 목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에베소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집트로 추방이 되었고 그의 제자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양성 하여 사방으로 파송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한 무리가 인도를 지나 중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때가 주후 635년 당나라 태종 9년때에 알로펜(Alopen-阿羅本;아브라함의 중국이름)을 단장으로 선교단이 있었다. 당 태종은 21명의 선교단에게 의전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환영을 하게 된다. 주후 638에는 태종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국비를 드려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워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하게 함으로 당나라에 선교의 길이 크게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색다른 종교가 페르시아에서 왔음으로 파사교(波斯敎)라고 하였는데 이 종교의 본거지가 로마인 것을 알고는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이라는 말에 교(敎자)를 부쳐서 대진교(大秦敎)라고 부르게 된다. 그 후에는 광명한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 당나라에서 경교, 또는 대진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 라는 관직을 주고 10 도와 385주(州)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태종때는 성탄절이 되면 향과 음식을 주고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경교는 당나라에서 주후 635-845년 동안의 210년간 국민들의 호응과 황실의 보호 속에서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 였다.
그러나 도교(道敎;Taoism; 유고중의 노자(老子) 중심의 도덕 종교의 한 형태) 신자인 무종(武宗 840-846)이 황제에 오르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는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의 사원들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승려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경교와 회회교, 함께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의 사제들까지 성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의 사정을 보면 문을 닫은 불교가 4,600개, 환속되어 간 승려가 무려 26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경교에 대한 탄압이 있게 되자 더 존속할 수 가 없게 되었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선교가 되고 있을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인 주후 668년이었다. 이 무렵은 우리나라 삼국, 특별히 신라와 당나라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학문과 문물 그리고 사상들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신라에도 경교가 소개되었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조비를 발견하였고, 주후 1928년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압록강 주변 만주의 안산(鞍山)지역에서는 경교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에서는 와제(瓦製) 십자가가 나왔고, 주후 1956년에 경주 안압지에서는 십자가 모양의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 상이 발굴되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자가 등이 있다.
200여년 동안 번영하다가 박해로 인하여 선교의 흔적이 없어졌는데 이 사실이 매몰된지 800년이 지난 주후 1625년에 경교비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의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이 비석의 비문은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되어 있고 당시 경교 선교 역사와 활동상황들이 736자로 소개가 되었다.
외국인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 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東洋傳來)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를 전념하였는데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머물면서 경교의 전래 가능을 연구하고 나서 고든 (E. A. Gordon) ‘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들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의 능이나 문 앞에 세운 무인상(武人像)들에서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경교(景敎)는 7세기경 페르시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유럽에서는 교세를 잃었지만 동방으로 옮겨가 기독교를 전래하였다. 중국의 경교 역사는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西安)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며, 원대(元代)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경교가 중국사회에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종교나 불교와 습합되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당에 수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당시 빈번한 문화교류를 행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주로 초기 기독교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동제십자무늬장식, 마리아상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
참조 : http://blog.naver.com/bss2079?Redirect=Log&logNo=60019499568